불교, Buddhism, 佛敎.
고려 중기의 불교.
혼탁과 광란의 분위기를 정화하고, 바르고 참된 불교의 뜻을 선양하기 위해 의연히 일어난 뜻 있는 승려가 이 시대에는 많이 나타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승려는 지눌(知訥)이다.
수도시절에 『육조단경(六祖壇經)』·『화엄론』·『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읽고 세 번을 크게 깨친 뒤, 송광산 수선사(修禪社)를 중심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여 새로운 선풍을 크게 떨쳤다.
그는 문도를 지도함에 있어 『금강경』·『육조단경』·『화엄경』으로 강론하였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경절문(經截門) 등의 3문을 열어 그들을 가르쳤는데, 이 전통은 현재까지 한국불교 선종의 근본이 되고 있다. 지눌은 성품이 근엄하였으나 자비로웠고, 불교의 율(律)을 엄격히 따랐으나 개차(開遮:열고 닫음)의 여유를 남겼으며, 참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구별하였으나 그것이 둘이 아님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선종의 승려로서 평생을 참선에 몰두하였지만 틈틈이 불경 읽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부처님 뜻을 전하는 것이 선(禪)이요 부처님 말씀을 깨닫는 것이 교(敎)라고 믿었기 때문에 선과 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선종이다 교종이다 하고 싸우는 것은 부처님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설파하면서, 이 무의미한 논쟁을 매듭짓기 위해 선교합일(禪敎合一)을 주창하였고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구현한 실천가였다.
이러한 주장과 실천은 신라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나 무애(無碍)한 행동, 대각국사 의천의 교관병수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지눌의 출현은 부패 타락한 귀족불교의 탁류를 적어도 나라 안 심산유곡까지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고, 우리나라 불교의 청신한 명맥을 유지하는 데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제자인 요세(了世)·승형(承逈)·혜심(慧諶) 등은 지눌이 출현하지 않았더라면 빛을 보지 못하였을 고려 중기의 고승들이다. 이들은 조계산 수선사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사상사에 큰 이정표를 세운 사상가들이다.
이들 중 요세는 참회와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소년시절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36세에 지눌의 제자가 되었으나 끝내 천태종풍을 버리지 못하였다.
참의(懺儀)를 닦음에 있어 육신이 허락하는 한 하루에도 53불(佛)에게 예배하기를 12번씩 하였으며, 남해산(南海山) 기슭에 80여 칸의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짓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았다.
오로지 산 속에만 머물러 50년 동안 한번도 서울의 속진(俗塵)을 밟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 하루 일과로 그는 『법화경』 1부와 아미타불 1만 번을 염불하였다.
그가 지방에서 활약하고 있던 시기에 중앙불교계에는 말할 수 없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1211년(희종 7)에는 최충헌(崔忠獻)이 무인정치로 왕을 폐립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권세를 남용하자 승도들은 이에 맞서 싸우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고, 중국대륙에서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고 있던 몽골족의 침입에 대비해서 격퇴를 기원하는 호국적 불사가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신종은 거의 달마다 각종 도량(道場)을 열고 멸적(滅賊)을 기원하는 것을 조정의 일과로 삼았고, 희종도 소재도량(消災道場)·인왕도량(仁王道場) 등을 1년에 몇 차례씩 개설하였으며, 강종도 연생도량(延生道場)·성변소재도량(星變消災道場) 등을 거의 매월 개설하여서 적군의 격퇴를 기원하였다.
제23대 고종 재위 46년 동안에는 거란과 몽골의 침략으로 호국적인 기복불사가 더욱 성행하였다. 이 시기에도 각종의 도량을 개설하여 보살계를 받거나 담론법석(談論法席)·진병법석(鎭兵法席) 등의 모임을 가지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행사를 아울러 행하였는데, 그 모두가 호국적 불교에서 나온 의식이었다.
앞서 현종 때 각간(刻刊)되었던 대장경판(大藏經版)이 1232년 몽골병에 의하여 소실되자, 고종은 1237년부터 1251년까지 16년 동안에 걸쳐 각장(刻藏)을 계속하여 재조대장경을 완성하였다.
현종 때에 대장경을 판각하여 외적을 물리쳤던 사실을 본받아 적병을 물리치고자 하였던 것이며, 국가적 전란을 겪으면서도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모든 불보살(佛菩薩)의 가호를 빌기 위함이었다.
이 대장경은 우리 민족이 남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장경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대의 문호로 알려진 이규보(李奎報)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는 『능엄경』·『능가경(楞伽經)』 등의 대승경전을 즐겨 읽었으며, 혜문(惠文)·각월(覺月) 등의 승려와 특별한 교우를 맺어 선도(禪道)에도 많은 흥미를 보였다.
승형과 혜심은 지눌의 문하에서 심요(心要)를 체득한 고승들로서 승형은 능엄선(楞嚴禪)으로 경기지방에서 현풍(玄風)을 떨쳤다.
승형은 지눌의 문하에서 공부한 뒤 청평산에 있는 이자현의 유적을 찾아 그의 「문수사기(文殊寺記)」를 보고 『능엄경』이 깨달음의 요로(要路)임을 느끼고 그곳에 머물면서 『능엄경』을 공부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능엄경』이 선가의 필수교과로서 존경받게 된 것은 승형에 의한 것이다.
혜심은 지눌이 가장 사랑한 수제자로서 지눌이 입적하자 그 자리를 이어 수선사 제2세가 되었으며, 크게 종풍을 진작하였다. 그는 고칙(古則) 1,125수와 여러 조사의 염송을 모아 『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편찬하였다. 혜심은 이 책을 적극 활용하여 후진육성에 힘썼으며, 이로 인하여 고려불교는 역사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내용을 고려인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정리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되며, 조계산문에서 대대로 중요한 교과서로 삼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으로 채택되고 있다.
지눌과 혜심 이후 고려불교는 충렬왕대까지 수선사가 중심이 된 조계종에 의해서 다소 안정되어 있었다. 혜심의 뒤를 이은 수선사 제3세는 청진국사(淸眞國師)이지만 그의 생애는 전혀 전하지 않는다.
제4세 혼원(混元)은 1252년부터 5년 동안 수선사에 머물렀고, 제5세 천영(天英)은 고종·원종·충렬왕의 3대에 걸쳐 활동하였으며, 제6세 충지(冲止)는 1286년부터 7년 동안 수선사 사주(社主)로 있으면서 지눌의 유궤(遺軌)를 한층 더 빛나게 하였다.
충지 이후 수선사의 법맥을 이은 이로는 제10세 만항(萬恒)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제7·8·9세의 사주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이는 원나라의 고려 지배기간중 수선사의 활동에 관한 기사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과 함께 생각할 때, 수선사의 위치가 몽골의 분열정책에 의하여 새로 생겨난 다른 많은 결사들과 동등한 계위로 격하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충렬왕 때에 조계산 수선사 이외의 지역에서 활약한 가장 두드러진 승려로 일연(一然)과 혜영(惠永)이 있었다. 일연은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저서 중 『삼국유사』는 우리나라의 종교사적인 고사들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수록하여 후세에 구체적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또한 혜영은 화엄교학을 천명함으로써 높이 평가받고 있을 뿐 아니라 원나라에서도 그 명승이 널리 알려진 고승이었다.
고려왕실의 기복적 미신의 폐풍은 지눌·혜심 등의 교화를 통해서 일시적으로 저지를 당하는 듯하였으나 선(禪)의 종지가 하근기 중생에게는 어렵다는 점 때문에 다시 기복적 불교가 성행하였다.
지눌의 법맥을 잇는 수선사 중심의 활동이 점차로 그 힘을 잃어갔고, 몽고의 강한 영향권에 속했던 13세기 말∼14세기 초까지의 불교계는 승려도 사찰의 수도 많았고 불사(佛事)도 빈번히 거행되기는 하였으나, 불교의 진면목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충렬왕 때의 승려들은 형식상 사회적 우대를 받았지만 뇌물을 주고 선사 또는 수좌(首座)가 되는 예가 허다하였으며, 심지어는 승려의 상당수가 취처(娶妻)하는 한심한 상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충렬왕 때를 기점으로 사(社)라는 이름이 붙은 사찰 중심의 결사(結社)가 많이 생겼다. 이는 수선사와 같이 사찰명인 동시에 그 사찰을 중심으로 수행을 위해 모이는 신도단체의 이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후기의 불교.
몽골족의 지배하에서 자주적인 발전역량을 상실했던 고려의 불교계는 충렬왕 이후 타락과 분열·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다행히 충렬왕 때까지는 지눌로부터 시작된 건전한 불교기풍이 그의 제자들의 직접·간접적인 영향 아래 하나의 일관된 맥락으로 이어졌지만, 제26대 충선왕으로부터 제30대 충정왕 때까지의 고려는 철저한 이민족의 압제 밑에서 민족문화 불모의 터전이 되고 말았다.
이 시대에도 고승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과 기력을 잃은 지배자들은 이미 나라와 백성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멸망이 임박한 원나라의 쇠잔한 기력에 간신히 이끌려가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충선왕 때에는 만승회(萬僧會) 등의 기복행사 위주의 신앙이 성행하였고, 충혜왕은 방종하기 짝이 없었으며 술사(術師)들의 말을 믿어 실덕(失德)이 심한 무자격자였다. 충목왕과 충정왕 때에는 왕의 위엄도 사상도 볼만한 것이 없는 시대였다.
이 시대의 고승으로는 충숙왕 때에 왕사와 국통을 역임한 정오(丁午)와 왕사 혼구(混丘), 국통 무외(無畏), 그리고 조계산 수선사 제10세 만항(萬恒)과 중국 원제(元帝)의 총애를 받은 의려(義旅), 그 밖의 왕사 조형(祖衡)·조륜(祖倫)·뇌묵(雷默)과 인도승인 지공(指空) 등이 있었다.
이 중 혼구는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3대에 걸쳐서 존경을 받았던 고승으로서 성품이 단정하고 엄하였으며 천성이 자상하여 그 친척이 모두 소미타(小彌陀)라고 불렀다 한다.
1326년(충숙왕 13) 3월에 원나라를 거쳐서 고려로 들어온 인도승 지공은 개경과 금강산 등에 머물면서 고려불교계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켰다.
자안(子安)은 법주사(法住寺)·국녕사(國寧寺)·민천사(旻天寺) 등에 있으면서 유식학을 크게 폈을 뿐 아니라 『심지관경소기(心地觀經疏記)』 등을 지어 많은 강사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경론장소(經論章疏)』 92권을 펴내기도 하였다.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 776구(句)를 지어 각 구절마다 주해를 붙인 뇌묵(雷默)은 오로지 암자에만 머물러 『법화경』을 송하며 아미타불을 염하고, 불경을 서사(書寫)하는 것을 일과로 하여 20년을 보냈다고 한다.
공민왕대에는 복구(復丘)·보우(普愚)·신돈(辛旽)·혜근(慧勤) 등이 왕사로 임명되어 왕을 보필하며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들 중 신돈은 수도승 또는 학승으로보다는 공민왕의 정치개혁을 도운 정치가였으므로 다른 승려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나, 나머지 세 고승들은 고려불교의 끝을 장식한 사상가요 수도승으로서, 특히 배불정책 밑에서 조선불교의 맥락을 잇게 하는 초석이 된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승들이다.
조계산 천영의 제자인 복구는 21세에 승과(僧科)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한 뒤 오로지 수도에 힘쓰면서 명리를 바라지 않았지만, 공민왕의 즉위와 함께 왕사로 책봉되어 적지않은 감화를 왕에게 미쳤다.
보우는 임제종(臨濟宗)을 도입하여 선문(禪門)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고 고려 말의 불교계에 생기를 불어넣은 점에서 한국불교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승이다.
보우는 1348년에 귀국하여 여러 차례 공민왕의 부름에 불응하다가 1356년에 왕사가 되어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면서 왕도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일변하고 선문구산을 일문(一門)으로 통합하고 종파의 이름을 ‘도존(道存)’이라 할 것을 건의하는 등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기를 주장하였으나, 그 뜻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지은 「태고암가(太古菴歌)」·『태고집(太古集)』 등에는 그의 깊은 경지와 구세(救世)의 큰 뜻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보우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고려 승려로는 경한(景閑)과 나옹이 있다.
경한은 무심선(無心禪)을 제창한 보기 드문 고승으로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고 알려지는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나옹은 일찍부터 많은 이적을 남겼고 1371년에는 왕사가 되었다. 우주를 각계(覺界)로 삼고 만유를 불신(佛身)으로 보며, 천지일월산천초목(天地日月山川草木)을 법(法)과 심(心)으로 풀이하는 것이 지눌을 거쳐 원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 맥락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염불관(念佛觀)·정토관(淨土觀)도 역시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이들 고승들 중 보우의 밑에서는 혼수(混修)·찬영(粲英) 등이 나왔으며, 나옹의 밑에서는 자초(自超)·축원(竺源)·법장(法藏) 등의 고승들이 나와서 조선 초기 불교의 명맥을 잇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 시대에는 배불(排佛)의 움직임이 크게 나타나고 있었다. 1352년(공민왕 1)에 이색(李穡)은 비교적 온건한 어조이기는 하였으나 왕에게 불교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중세 이후 불교도의 수가 더욱 늘어났으나 오교양종(五敎兩宗)은 명리를 구하는 소굴이 되었으며, 큰 냇가 깊은 산골에 절 없는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으니 나라의 백성 중 놀고 먹는 자가 많아져서 지식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제현(李齊賢)과 더불어 불교에 조예가 깊은 불교신자로 널리 알려져 있어 극단적인 배불론자가 될 수는 없는 사람이었지만, 다소의 몰지각한 승려들과 왕실의 지나친 맹신현상에 대해서는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보우도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을 때 선문구산의 폐를 말한 것은 이색이 지적한 사실과 관계가 없지 않은 것이었고 이와 거의 같은 시기의 일이었다.
1361년 어사대에서는 승려의 무리가 과부나 외로운 여자를 꾀어 머리를 깎아 비구니를 만들고는 함께 거처하면서 음욕을 함부로 하고 불사(佛事)를 권해 풍속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보고를 한 일이 있다. 이로부터 몇 해 뒤에 배불론자인 정도전(鄭道傳)은 이론과 실제 두 가지 면에서 대대적인 불교배척운동을 펴기에 이르렀다.
그의 불교배척 논의는 상당히 일반적인 편견에 좌우된 느낌이 있어, 전적으로 상대방을 납득시킬 만한 것은 못 되었지만 부분적으로는 타당하였다. 특히 당시의 불교 이해 및 실천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다.
공민왕 말기에는 ‘태조구세지상(太祖九世之像)’이라는 것을 만들어 태조의 전신(前身)을 아홉 가지로 말하면서, 왕위에 오르기 바로 전에는 어느 절의 소였고 죽은 뒤에는 보살이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여 김자수(金子粹) 등에 의하여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불교도들의 윤리적 타락에 관한 비판은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에 의해서도 신랄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욕심을 적게 해야 하는 교(敎)를 믿는 자들이 금욕(金欲)·정욕(情欲)을 더욱 밝히고 있다는 데에 집중되고 있다.
조선시대.
고려 말부터 거세게 일기 시작한 배불의 기세는 왕조가 바뀐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때에도 불교배척의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던 유학자들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본격적인 불교배척을 꾀하였으며, 위정자의 정책적인 불교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시대의 불교는 억압당하고 배척을 받았던 불교수난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불교.
왕실의 불교정책
1392년 7월에 이성계(李成桂)는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고 태조가 되었다. 태조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고려 말에는 보우·나옹 등의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무학(無學)과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태조는 즉위년에 무학을 왕사로 삼고 궁중에서 승려 200명에게 반식(飯食)을 하였다.
연복사(演福寺)에 탑을 중창하고 문수회(文殊會)를 베풀었으며, 해인사의 고탑(古塔)을 중수하면서 탑 안에 대장경을 인성(印成)하여 안치하고 복국이민(福國利民)을 발원하였다.
1394년에는 천태종의 고승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았고, 『법화경』 3부를 금서(金書)하여 고려 왕씨(王氏)들의 명복을 기리게 하였다.
1397년에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위하여 흥천사(興天寺)를 세웠으며, 진관사(津寬寺)에 수륙사(水陸社)를 만들게 함으로써 이후 해마다 수륙도량을 열어 군생(群生)의 명복을 빌었다.
이듬해에는 강화도의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으며, 흥천사의 수선사주(修禪社主) 상총(尙聰)이 선을 닦고 경을 강설하는 승풍을 장려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상서(上書)하자, 태조가 그 뜻을 따랐다.
이 밖에도 건국의 경찬사업(慶讚事業)으로 대장경을 인간(印刊)하고 금은자 사경 등을 하게 하였으며, 사원을 없애고 승려를 도태시켜야 한다는 주변의 여론이 빗발치듯할 때, 개국의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척불정책에 휩쓸리지 않았다.
태조의 양위를 받은 정종은 숭유정책의 첫 단계로서 서울의 동서남북과 중앙에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설치하였고, 제3대 태종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숭유배불정책(崇儒排佛政策)은 시작되었다.
태종은 즉위년에 궁중에 있던 인왕불(仁王佛)을 내원당(內願堂)으로 옮기게 하고 궁중에서의 불사(佛事)를 모두 폐지하였다.
1402년에는 서운관의 상소를 좇아 서울 밖의 70개 사찰을 제외한 모든 사찰 전토(田土)의 조세를 군자(軍資)에 소속시키고 사찰 노비(奴婢)를 나누어서 기관에 분속시키게 하였다.
이와 같이 노비를 줄임으로써 사원의 토지까지도 삭감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많은 토지가 국가에 몰수되었다. 이에 1406년(태종 6) 2월에 조계종의 승려 성민(省敏)이 여러 차례 의정부에다 사원과 토지와 노비를 종전대로 둘 것을 호소하였다.
당시의 정승 하륜(河崙)이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으므로 성민은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가서 신문고를 치고 왕에게 척불정책의 완화를 직접 호소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태종은 오히려 그 해 3월에 전국에 242개 사찰만을 남게 하고 나머지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모두 국가에서 몰수하도록 하였으므로, 242개 사찰 이외에는 모두 폐사(廢寺)가 되고 말았다.
태종은 또 재위 6년에서 7년 사이에 11종(宗)의 종단을 축소시켜 7종으로 만들었다. 태종 6년 3월까지는 조계종(曹溪宗)·총지종(摠持宗)·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화엄종·도문종(道門宗)·자은종(慈恩宗)·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남산종(南山宗)·시흥종(始興宗)의 11종이 존재하고 있었다.
태종 7년 12월 이전의 총지종과 남산종을 합쳐서 총남종(摠南宗)으로 만들고, 중도종과 신인종을 합쳐서 중신종(中神宗)으로,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을 합쳐서 천태종으로 만듦으로써 조계종·천태종·화엄종·자은종·중신종·총남종·시흥종의 7종으로 줄인 것이다.
국사·왕사의 제도를 없애고 도첩제(度牒制)를 엄히 실시하였으며, 승려를 시켜 비오기를 기원하는 기우불사를 폐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산릉(山陵)의 곁에 사찰을 세워서 명목을 빌게 했던 옛 관습도 폐지하였다.
제4대 세종은 즉위년부터 더 심한 훼불(毁佛)을 강행하였다. 이에 승려들은 1419년(세종 1)과 1422년에 중국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국내의 심한 불교박해 사정과 이에 대한 구원을 호소하였으며, 세종은 명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배불책을 늦추고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세종은 태종 때 폐지한 사찰과 노비 중에서 완전히 처리되지 못한 것을 모두 정리하였고, 1422년에는 매년 초에 사찰과 산천에 사람을 보내어서 복을 비는 의식과 경행의식을 중지시켰다.
세종의 척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424년 4월에 단행된 종단의 폐합이다. 그는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합쳐 교종으로 만듦으로써 지금까지의 7종을 선교 양종(兩宗)의 2종파로 줄였을 뿐 아니라 전국에 사찰 36개 소, 토지 7,950결, 승려 3,770명으로 한정시켜 버렸다.
종단을 폐합하여 축소시킴으로써 사찰의 수를 많이 줄일 수 있게 되고, 이에 따른 적지않은 토지와 노비가 국가의 큰 재산으로 몰수될 수 있다는 계산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종은 성밖의 승려에게 도성의 출입을 금지시켰고 연소자의 출가를 엄금하였다.
세종도 나중에는 불교를 신봉하는 국왕이 되었다. 중년 이후 불경을 즐겨 읽고 내원당을 세웠으며 법요(法要)·조상(造像)·조사(造寺) 등에도 열을 올렸다. 그러나 숭유억불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지 못하였고 유생들의 반발만 극한에 달하였다.
제5대 문종도 승니(僧尼)가 되는 것을 금하고 승니의 도성출입을 금하는 등 배불정책을 계속하는 듯하였으나, 그의 재위기간은 2년에 불과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호불왕(大護佛王)이라고 할 수 있는 제7대 세조는 즉위하자 이전까지의 배불정책을 외면하였다. 본래 신심이 두터워서 평소에 신미(信眉)·수미(守眉)·설준(雪峻) 등의 고승과 가까이 지냈던 그는 일찍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에 공자와 석가의 도에 대하여 그 우열을 언급하게 되었을 때에 하늘과 땅의 차이 같다고 비교할 만큼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은 1447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그에게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1457년에 왕세자가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하여 『금강반야경』을 수서(手書)하였고, 명을 내려 『능엄경』·『법화경』 등을 대조하며 교정하게 하였으며, 홍준(弘濬)·신미 등으로 하여금 기화(己和)의 『금강경설의(金剛經說誼)』를 교정하고 오가해(五家解)에 넣어 한 책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영가집(永嘉集)』의 제본동이(諸本同異)를 교정하고 『증도가(證道歌)』의 언기주(彦琪註)·굉덕주(宏德註)·조정주(祖庭註) 등을 모아 한 책으로 인행(印行)하였으며, 『법화능엄번역명의집(法華楞嚴翻譯名義集)』 등을 인행하였다.
그 밖에도 많은 경전을 금서(金書) 또는 묵서(墨書)하게 하였으며, 이 모든 경에 왕은 친히 발어(跋語)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미로 하여금 월출산 도갑사(道岬寺)를 중창하게 하고 약사여래상을 안치하였다.
1458년에는 신미·수미·학열(學悅) 등에게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대찰에 나누어 봉안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합본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를 출간하였으며, 불교음악인 영산회상곡(靈山會上曲)과 불교 가무극인 연화대무(蓮華臺舞)가 만들어졌다. 1461년 6월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많은 불전(佛典)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이듬해에 『능엄경언해』가 간행되었고, 1463년에는 『법화경』을, 해를 이어서 『금강경』·『반야심경』·『원각경』·『영가집』 등의 경전을 국역, 간행하였다. 이는 세조가 남긴 공헌 중 가장 큰 치적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또 1464년 5월에는 태조가 세웠던 흥덕사(興德寺)의 터에 대원각사(大圓覺寺)를 세우게 하였는데, 6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4월에 완성하였다. 그 뒤 이 사찰에다 대불상과 대종(大鐘)을 만들어 안치하였으며, 13층의 대석탑을 세워 1467년 사월초파일에 낙성을 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세조는 정인사(正因寺)를 세우고, 해인사·상원사(上院寺)·월정사(月精寺)·청학사(靑鶴寺)·회암사(檜巖寺)·신륵사(神勒寺)·쌍봉사(雙峯寺)·표훈사(表訓寺) 등 사찰의 중수와 보수를 도왔고,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와 오대산·금강산의 여러 사찰과 낙산사(洛山寺) 등을 찾아 공양하는 등 외호불사(外護佛寺)를 많이 일으켰다. 그리고 앞서 세종이 폐지했던 도성경행(都城經行)을 부활시켜 성황을 이루게 하였다.
왕은 승려에게 범죄의 혐의가 있으면 반드시 국왕에게 먼저 계청(啓請)해서 허가를 받고 난 뒤에 고문하게 하였으며, 관속(官屬)이 함부로 사찰에 출입하는 것을 엄금하였고, 도승(度僧)과 선시(選試)의 법을 『경국대전』에 명기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세조가 지금까지의 가혹했던 승정(僧政)을 완화시키고 승려의 권익을 보장하여 줌으로써 승려의 도성출입은 자유롭게 되었고 출가도 제한을 받지 않게 되었다.
성종이 즉위하자 척불정책은 더욱 엄하게 행하여졌다. 1471년(성종 2) 6월에는 도성 안에 있던 염불소를, 12월에는 간경도감을 폐지하였고, 1473년 8월에는 사대부의 부녀자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1475년에는 도성 내외의 비구니사찰을 헐어버리게 하였다.
1475년 12월에는 국왕의 생일 때 사찰에서 개설했던 축수재(祝壽齋)를 폐지하였으며, 1492년 2월에는 도첩(度牒)의 법을 정지시키고 도첩이 없는 승려는 모두 정역(定役)과 군정(軍丁)으로 충당시켰다.
성종이 금승(禁僧)의 법을 세워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승려를 환속시킴으로써 사원은 텅텅 비게 될 형편이었다. 이러한 때에 인수(仁粹)·인혜(仁惠) 두 대비(大妃)가 금승의 법을 취하하라는 전교를 내렸으므로 한때 중지가 되었으나 성종의 본심은 척불에 있었으므로 불교의 수난은 멈추지 않았다.
불심(佛心)이 대단했던 인수대비가 불상을 만들어서 정업원(淨業院)에 보냈을 때 유생들이 이를 빼앗아 불태움으로써 대비가 크게 노하였을 때도 성종은 유생들을 벌하지 않았다.
성종은 승려들에게 공재(供齋)하는 풍습을 엄금하고 사찰을 창건하거나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는 등 척불책을 철저히 함으로써 승려의 수를 줄였고 사원을 폐사로 만들었다.
다음 왕인 연산군은 선종의 도회소(都會所)인 흥천사(興天寺)와 교종의 도회소인 흥덕사(興德寺) 및 대원각사를 모두 폐하여 공해(公廨)로 삼았고, 삼각산의 모든 절에서 승려를 쫓아내어 폐사로 만들었으며, 성내의 비구니사찰을 없앤 뒤 비구니들을 궁방(宮房)의 노비로 만들었다.
승려를 환속시켜 관노로 삼거나 혼인시켰으며, 사찰의 토지는 모두 관부(官府)로 몰수하였다. 이러한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하여 불교는 더욱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승과마저도 실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시대는 불교가 그 존재성을 완전히 무시당한 시기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그의 생모인 정헌왕후(貞憲王后)의 신불(信佛)에 의해 불교를 복구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는 듯하였으나 배불의 큰 조류는 어쩔 수 없었고, 결국은 어느 왕보다 더 심한 폐불정책을 보여주었다.
1507년(중종 2)의 식년(式年)에 승시(僧試)를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승과(僧科)는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불교는 중종에 의해서 선종과 교종의 양종마저도 없어지게 되었고, 그 뒤 무종파(無宗派)의 혼합적인 현상으로 전락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 당시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횡포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1509년에 몇 사람의 유생이 청계사(淸溪寺)의 경첩(經帖)을 훔쳐간 것과 1510년 3월에 흥천사(興天寺)의 5층 사리각(舍利閣)에 방화한 사건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또 중종은 같은 해에 각 도의 사찰을 폐사로 만든 뒤 토지를 향교에 속하게 하였다.
1512년에는 흥천사와 흥덕사의 대종(大鐘)을 녹여 총통(銃筒)을 만들게 하였으며, 원각사를 헐어 그 재목을 연산군 때 헐린 민가에 나누어주게 하였을 뿐 아니라 경주의 동불(銅佛)을 부수어서 군기(軍器)를 만들게 하였다.
1516년에는 『경국대전』에 있는 도승조(度僧條)를 지워서 빼어버리게 하였으며, 1518년에는 도성 남쪽의 비구니처소를 철거시키고 불상을 헐게 하였다. 중종은 역사상 가장 혹독한 배불왕이었다.
배불 속의 고승.
건국 초기의 고승으로는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無學)과 그의 제자 기화(己和)가 있었다. 무학은 나옹의 법을 이어받은 뒤 태조가 조선을 창업하는 데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태조가 신도(新都)인 한양(漢陽)으로 천도하는 데 주역이 되었고 다난한 건국사업을 도왔을 뿐 아니라, 태조가 태종에 대한 노여움으로 함흥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을 때는 태조로 하여금 다시 서울로 오게 하여 부자의 사이를 가깝게 하는 데도 공헌하였다.
기화는 배불의 기세가 치열할 때, 정법(正法)을 수호하고 오해와 무지를 없애기 위해서 크게 노력한 조선 초기의 명승이다.
특히, 그는 『현정론(顯正論)』·『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등을 지어 불교를 탄압함이 합당하지 못함을 밝혔을 뿐 아니라, 유교와 불교는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도가의 사상까지를 포함하여 삼교일치(三敎一致)를 제창함으로써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조 때의 고승인 신미(信眉)와 수미(守眉)는 세조가 믿고 숭배한 승려들로서 속리산에서 서로 만난 동갑의 동학(同學)이었다.
이들은 세조의 인경불사(印經佛事)와 간경도감의 역경사업에 큰 힘이 되었으며, 그 밖의 불교문화사업과 세조 자신의 신불(信佛)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두 승려를 일컬어 이감로문(二甘露門)이라고 불렀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도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설잠(雪岑)이라 이름한 뒤 양주의 수락사(水落寺)와 경주의 금오산 용장사(茸長寺) 등에서 머물렀다.
그는 여러 차례 세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교리면에서는 특히 『법화경』에 깊은 조예를 보여 『법화별찬(法華別讚)』을 저술하였는데, 선(禪)의 안목으로 『법화경』을 보아 참신한 해설을 붙이고 있다.
연산군과 중종의 혹심한 척불 속에서 한국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고승으로 정심(淨心)과 지엄(智儼)이 있었다.
정심은 연산군 때에 환속하여 황악산에 들어가서 여자 신도와 거짓으로 혼인생활을 하는 것처럼 꾸미고 숨어 살다가 선법(禪法)을 지엄에게, 교법(敎法)을 법준(法俊)에게 전하여 실낱 같던 법맥(法脈)을 가까스로 잇게 하였다.
지엄은 말년에 지리산 초암에 머물면서 제자의 양성에 몰두하였는데, 후학들에게 『선원도서(禪源都序)』와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을 가르쳐 여실한 지해(知解)를 얻게 하고, 다음에 『선요(禪要)』로써 지해의 병을 제하게 하였으며, 때때로 『법화경』·『화엄경』·『능엄경』 등의 대승경전으로써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들 불전(佛典)들은 모두가 현재 우리나라 불교 강원(講院)의 교과과정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그 연원을 지엄에 두고 있다. 그의 문하에서 영관(靈觀)과 일선(一禪)이 배출되었으며, 다시 영관 밑에서 휴정(休靜)·선수(善修)의 두 대사가 배출되어 크게 불교를 중흥시켰다.
조선 중기의 불교,
문정왕후의 흥불(興佛)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왕비로서 중종의 혹심한 배불정책 속에서도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여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려고 노력하였다. 1545년에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대비로서 섭정하게 됨에 따라 평소에 품었던 불교중흥의 뜻을 펴고자 하였다.
대비는 1550년(명종 5) 12월에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부활시키고, 그 이듬해에 보우(普雨)에게 교단중흥의 중책을 맡겼다.
이에 보우는 문정대비를 도와 봉은사(奉恩寺)를 선종 본사로 삼고, 봉선사(奉先寺)를 교종 본사로 삼았으며, 도승법(度僧法)과 승과를 다시 시행하는 등 교단중흥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에 승과 예비시험을 시행하고 1552년에는 본고사인 승선(僧選)을 실시하였다.
교단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고, 유능한 승려들이 승선에 응시하였다. 조선시대의 최고 고승인 휴정도 이때의 승과출신으로 명종대에 교종판사(敎宗判事)와 선종판사(禪宗判事)를 역임한 바 있었고, 유정(惟政) 역시 그 뒤의 승과에 등용되었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이와 같이 보우가 문정대비의 도움을 받아 불교를 중흥시켜가는 과정에 대해 당시 조정의 대신과 유생들은 크게 반발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보우를 타도하려는 상소가 빗발치듯하였고, 전국의 유생들이 동원되어 터무니없는 죄목을 날조하여 보우를 요승(妖僧)으로 규정하고 참살해야 한다는 주장이 극심하였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고 시위까지 하였지만 문정대비는 숭불흥교(崇佛興敎)의 정책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고 보우를 옹호하였다.
불교중흥의 기세는 1565년 4월에 문정대비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사업은 중단되고 보우는 곧 잡혀 제주도로 귀양가서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장살당하였다.
이로부터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다시 떨어져서 사역(使役)과 천대로 그 양과 질이 저하되었으며 불교는 산중으로 다시 숨게 되었다.
보우와 문정대비에 의한 15년 동안의 불교부흥운동이 비록 중도에서 꺾이고 말았으나, 궁중에 불법숭상의 기풍을 깊게 하고 불교계에 유능한 인물을 배출시켜 교단의 명맥이 유지되었으며, 후일에는 국난을 극복하는 데도 승려들이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보우는 유생들에게 시샘과 미움을 받고 요승이라는 악명을 뒤집어썼지만, 사실은 요승이 아닌 지략과 학식을 갖춘 걸승(傑僧)이요 순교자였다.
의승군(義僧軍)의 구국(救國).
보우와 문정대비에 의해 부흥의 빛을 보았던 불교계의 고승들은 유생들의 탄압에 의해 산 속으로 쫓겨가서 살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적침입으로 국가가 위태로워지자 산 속에서 뛰쳐나와 대창과 낫으로 외적을 무찌르고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는 데에 앞장을 섰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당쟁의 혼란 속에서 정치적 지주를 잃고 있던 이 땅을 무인지경처럼 휩쓸어버려 왕성도 무너지고 국왕 선조는 북쪽으로 피란 길을 떠났다.
이러한 때에 공주 갑사(岬寺)의 청련암(靑蓮庵)에 있던 영규(靈圭)는 500여 명의 의승군을 이끌고 청주성(淸州城)의 왜적과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고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의주로 피란갔던 왕은 처음으로 승전보가 전해지자 영규에게 당상(堂上)의 직과 상을 내렸지만, 왕의 특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영규는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다시 금산(錦山)의 왜적을 물리치다가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 금산성 싸움에서 조헌을 비롯한 700명의 의사(義士)와 영규가 거느린 800명의 의승이 끝까지 싸우다가 순교함으로써 왜적도 끝내 성을 버리고 물러나게 되었다. 영규는 바로 휴정의 제자였다.
또 묘향산에 있던 휴정도 왕의 부탁을 받고 산에서 내려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함을 받은 뒤, 전국의 승려에게 격문을 돌려 모든 불교인이 왜적을 몰아내는 싸움에 가담할 것을 호소하였다.
휴정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1,500명의 의승을 모았고 그의 제자 유정은 금강산에서 일어나 광동지방을 중심으로 800명의 의승을 모았으며,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일어나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의승을 이끌고 각각 참전하였다.
이 밖에도 의엄(義嚴)·경헌(敬軒)·신열(信悅)·청매(靑梅)·해안(海眼)·법견(法堅)·쌍기(雙冀) 등은 모두 쟁쟁한 의승장들이었고, 각처에서 일어난 의승의 총수는 5,000여 명에 이르렀다.
도총섭 휴정은 73세의 고령으로 제자 의엄에게 병권의 일부를 대행시켰으며, 광동지방에서 달려와 도총섭의 주력승군과 합세한 유정을 승군도대장(僧軍都大將)으로 삼아서 실전을 도맡게 하였다.
1593년 1월에 이들 의승군은 명나라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무찔러 평양성을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처영은 행주산성 싸움에서 용맹히 싸워 크게 공을 세웠다.
유정은 왜적이 정유년에 재침하였을 때도 의승군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서생포(西生浦)의 왜적을 포위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적진 속을 드나들며 적정을 탐지하고 평화회담에도 힘을 썼다.
후방에서도 팔공산성·금오산성 등의 산성을 쌓는 일을 비롯하여 4,000여 석의 군량미를 조달하고 많은 집기물을 제공하는 등의 공적을 남겼다.
전란이 끝난 뒤 그는 산성의 방비를 위해 힘쓰다가 잠시 산사(山寺)로 돌아가 쉬었는데, 그때 또 조정에서 일본과의 국교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서 다시 유정을 불러 그 문제를 일임하였다.
유정은 1604년(선조 37) 7월에 왕의 특명으로 일본에 가서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 그때 그는 국교상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혀갔던 동포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일본에서 겪은 일과 그 성과 및 일본인들의 유정에 대한 대우들에 관해서는 흥미있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설보화상(說寶和尙)의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1636년(인조 14)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때에도 의승군들이 일어나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 중 각성(覺性)과 명조(明照)는 대표적인 의승장이다.
임진왜란 때에 스승 부휴(浮休)를 대신하여 싸움터에 나가서 명나라 장수와 함께 바다에서 왜적을 무찔렀던 각성은 1624년 조정에서 승려들로 하여금 남한산성을 쌓게 하였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역사(役事)를 감독한 뒤 3년 만에 완공하였다.
지리산 화엄사에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3,000여 명의 의승군을 모아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하고 남한산성을 향하였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명조는 1627년(인조 5)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 4,000여 명의 의승군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의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군량미를 모아 보급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승단의 활동.
휴정이 교화력을 펼친 뒤 불교계에는 조선 건국 이래 최대의 고승들이 활약하는 시대가 된다. 한편으로 구국을 위한 의승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불교의 혜명(慧明)을 전승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고승은 휴정과 선수(善修)이다.
휴정은 조선시대 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좌선(坐禪)·진언다라니(眞言陀羅尼)·염불(念佛)·간경(看經) 등의 경향으로 나누어져 있던 당시 불교계의 상황 위에서 휴정은 선교불이(禪敎不二)를 강조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선을 통하여 견성(見性)을 이룩하는 우리나라 불교의 전통을 다시 한번 새로운 각도에서 재확립시켰다. 휴정 이후 우리나라의 불교승단은 거의가 휴정의 후손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만큼 그의 영향력은 큰 것이었다.
선수는 휴정과는 동문으로서 휴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대선사였다. 그는 평생 신도로부터 받은 모든 시물(施物)을 남김 없이 그 자리에서 나누어주어 자신이 가지는 일이 없었으며, 뛰어난 인품과 덕화에 도를 묻는 무리가 항상 끊이지 않았다.
휴정과 선수의 제자들은 각각 유파(類派)를 형성하거나 개인적으로 교화활동을 전개하여 조선시대 불교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휴정의 제자에는 유정을 비롯하여 언기(彦機)·태능(太能)·일선(一禪)·인영(印英)·원준(圓俊)·해안(海眼)·인오(印悟)·법견(法堅)·경헌(敬軒)·영규·처영·의엄(義嚴) 등 뛰어난 인물이 많았으며, 유정·언기·태능·일선의 네 사람은 가장 대표적인 제자로서 휴정문하의 4대파(四大派)를 이루었다.
그 중 언기는 유정과 더불어 휴정문하의 쌍벽을 이룬 이로서, 선과 교를 별문(別門)으로 보지 않는 휴정의 경향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敎) 안에서도 일승(一乘)·삼승(三乘) 등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청중의 근기(根機: 깨닫는 능력)에 따라서 대승과 소승, 깊고 얕은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하였다. 그에 의해서 형성된 편양파(鞭羊派)는 여러 파들 중에서 가장 성하였다.
태능은 임진왜란 때 의승으로 참전하였으며, 나중에는 축성(築城)하는 일에도 종사하여 공을 세웠다. 그도 역시 사상적으로 선과 교를 일원이류(一源異流)로 보는 전통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현변(懸辯) 등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 소요파(逍遙派)의 문풍(門風)을 떨쳤다.
일선(一禪)은 처음 『법화경』을 배우고 나중에 휴정의 법을 이은 이로서, 『법화경』 3,000부를 찍어 배포하였을 뿐 아니라, 병란으로 승풍이 퇴폐하고 승려들이 선가(禪家)의 본분으로 되돌아오지 않음을 개탄한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문하에 충언(冲彦)·태호(太浩) 등 많은 제자들이 있어서 정관파(靜觀派)를 이루었다.
이 밖에도 법을 묻는 이에게 『도서(都序)』와 『절요(節要)』로 결택(決擇: 배움의 길을 바로잡음)하게 하고 『선요(禪要)』와 『서장(書狀)』으로 참증(參證: 깨달음을 증명함)하여 스스로 법을 얻게끔 지도했던 경헌, 임진왜란 때 의승장의 한 사람으로서 출정하였다가 은거한 뒤 자연을 벗삼아 순수한 선게(禪偈)를 남겼던 인오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의승군을 일으켜 전공을 세운 뒤 구례화엄사에 머물렀던 해안, 스스로 휴정의 문파에 속함을 자처하면서 수많은 이적(異蹟)을 남겼을 뿐 아니라 석가모니불의 소화신(小化身)이라고 전해지는 일옥(一玉) 등도 많은 제자들을 길러 크게 선풍(禪風)을 떨쳤다.
부휴선사의 문하에서도 각성(覺性)·응묵(應默)·희옥(希玉)·성현(聖賢)·인문(印文)·담수(淡水)·희언(熙彦) 등이 7파(七派)을 형성하여 그 문풍(門風)을 크게 떨쳤다.
이 중 벽암의 문파가 가장 성행하였으며, 희언은 보기 드문 초연도인(超然道人)의 풍모를 보여준 고승이었다. 이들에 의해 새로운 기풍을 회복한 불교계에는 그 이후에도 휴정의 문손(門孫)과 부휴의 문손 두 계통에서 쟁쟁한 인물들이 배출되어 불교계에 적지않은 업적들을 남겼다.
휴정의 후대에는 앞에서 본 그의 제자들 이후로 응상(應祥)·의심(義諶)·도안(道安)·지안(志安)·상언(尙彦)·유일(有一)·의소(義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학장(學匠)과 종사(宗師)들이 이어 나왔다. 이들 중에는 선지(禪旨)에 깊은 선사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화엄을 중심으로 한 강경(講經)의 대가들이었다.
부휴선수의 후대에도 그의 문하 7파 이후에 처능(處能)·수초(守初)·성총(性聰)·수연(秀演)·최눌(最訥) 등의 종사들이 있었으며, 그 밖에도 많은 대가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 승려 사이에서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독특한 전법방식에 따라 권속 관념이 생기게 되었고, 자연히 그 승풍(僧風)에도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그것은 대개 선과 교의 두 종파 중 어느 편에 치중하느냐에 따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 기준이었지만, 실제로는 모두 표면상으로 선과 교의 일치를 주장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으므로 큰 차이가 없었고, 포용성의 넓고 좁음에 차이를 보였을 뿐이다.
크게 휴정과 부휴의 2개 파로 나누어져 있던 조선 중기의 승단은 연초(演初) 때에 합일이 됨에 따라, 그 뒤의 승려들에게는 그 전과 같은 뚜렷한 계보를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배불(排佛)과 불교계의 흐름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다소 호전되었지만, 위정자 및 유생들의 부당한 핍박과 시달림은 계속되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비롯한 주요 장소에 산성을 수축하고 수비하는 일은 모두 승려에게 맡겼고, 관가와 유생들에게 종이와 기름과 신 등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으며, 그 밖의 잡역을 시켰다. 승려들은 여전히 사회에서 가장 심한 천인대접을 받고 있었다.
또한 현종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탄압하여 승려들의 사회적 냉대는 점차 심해졌다. 현종은 즉위와 동시에 양민이 출가하여 승니(僧尼)가 되는 것을 금하였고 또 이미 승니가 된 사람들도 환속할 것을 권하거나 명령하였다.
그는 서울의 비구니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철폐하고 거기에 모셨던 열성(列聖)의 위판(位版)을 땅에 묻어버렸으며, 사찰 소속의 노비와 위전(位田)은 모두 본사(本司)로 돌리게 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1749년(영조 25)에도 있었는데, 영조는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하였다. 정조는 불교를 신봉한다고 하면서 불교를 옹호하는 듯한 몇 가지 조처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철저한 이기주의적 기복신앙이었으며, 다른 왕족, 왕가 주변사람들의 불교신앙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승려들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연히 더욱 은둔적·체념적인 길을 택하거나, 주위의 조건에 적절히 대처하여 이익을 얻어보려는 경향도 나타냈다.
이와 같은 탄압 속에서 정면으로 반대의 뜻을 천명했던 승려는 처능이었다. 처능은 현종이 불교를 탄압하자 그에 항의하는 「간폐석교소 諫廢釋敎疏」를 올려, 조선왕조의 척불책과 배불사상을 논파하였다.
이 소는 조선시대 모든 상소문 중 가장 길고 분량이 많은 것이었으며, 현종의 더 심한 박해를 미연에 방지하는 구실을 하였다.
이 시대의 사상 조류로는 『화엄경』의 중시를 들 수 있다. 우리 불교사에서 『화엄경』의 사상이 매우 중시되어 온 것은 하나의 전통이다.
이 시기에 와서 그 전통은 거의 모든 문중, 거의 모든 승려들 사이에 아무런 이론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편양 언기와 부휴·선수의 문중에서 특히 중시되고 있었다. 의심(義諶)은 『화엄경』의 동이(同異)를 연구한 뒤 음석(音釋)을 가하였다.
같은 편양문하의 도안(道安)은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릴 정도로 『화엄경』을 자주 설법하였다.
정혜(定慧)는 화엄에 통효하여 그것을 강설하는 데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하며, 지안(志安)은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그때 모인 청중이 1,400명이나 되었다. 새봉(璽篈)도 선암사(仙巖寺)에서 화엄강회를 베풀었는데, 그때 모였던 1,207명의 회중(會衆) 명단은 지금도 남아 있다.
정조 때의 의소(義沼)는 『화엄사기(華嚴私記)』를 지었고, 상언(尙彦)은 소실된 『팔십화엄(八十華嚴)』 간본을 새로 간행하였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문예진흥기인 영조·정조 때에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또한 유·불·도 3교의 일치를 주장하는 것도 이 시대 불교사조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수초(守初)를 비롯한 성총(性聰)·수연(秀演) 등이 다 그 방면의 선구자요, 의소·응윤(應允)도 그러하였다.
조선 중기 후반의 불교수행은 대개 선이냐, 교냐, 염불이냐 하는 세 가지로 나뉘어왔다. 이 밖에 진언집(眞言集)이 생기고, 여러 가지 의식이 성행되면서 밀교적 경향도 다시 대두한 것이 사실이나, 이러한 여러 가지 경향들을 이론적으로 회통시키는 데는 화엄의 도리가 필요하며, 실천으로는 선의 실수(實修)가 필요했던 것이다.
수도가 부족했던 승려나 거사들 사이에서는 잡신(雜信)·미신(迷信)의 경향도 강하게 보였던 것이 이 시대 불교의 특색 중 하나가 되었다.
당대의 화엄종주였던 도안은 노장(老莊)에도 밝고 시문에 매우 뛰어난 재질을 보였으나, 그의 사상은 매우 잡박하여 오히려 선가(禪家)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명부(冥府)의 시왕(十王), 귀매(鬼魅)의 정령, 객관적인 정토를 다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가 하면 묘향산의 운봉(雲峰)은 도안만큼 이름은 나 있지 않았으나, 『심성론(心性論)』을 저술하면서 원효의 문장을 방불하게 하는 글을 지어 원만공적(圓滿空寂)한 심체(心體)가 한량없는 공덕과 무량한 묘용(妙用)을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였다.
새봉은 선·교를 혼합할 뿐만 아니라 북두(北斗)를 숭배하였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칠성신앙(七星信仰)은 이러한 습관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승려들 사이에서는 반야(般若)의 관조(觀照)가 철저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는데, 의소는 그 관(觀)이 철저하지 못한 까닭으로 천당과 지옥의 실재를 증명하려고 헛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최눌은 음양오행의 설을 유물론적으로 받아들여 바다의 조석(潮汐)을 그것으로 풀이하였고 산신(産神)·역신(疫神)·신신(身神)·명신(命神)·음양오행신(陰陽五行神) 등이 실재한다고 하고, 그것 때문에 자기의 몸이 약하다고 설명하였다.
조선 후기의 불교.
조선 후기의 불교계는 이렇다 할 종(宗)이 없는 무종파의 교단으로 존립하였다. 비록 종파나 종명(宗名)이 없었지만 불교는 엄연하게 존재해 있었고, 차별적인 종명과 종지(宗旨)가 없는 오직 하나로 이루어진 통불교(通佛敎)의 교단이었다. 그러나 이 교단은 불교인의 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척과 억압의 정책에 의해서 무기력하게 팽개쳐진 것이었다.
무종파의 상황은 법맥을 중심으로 하여 본다면 교단의 주축은 선종이었다. 그러나 휴정과 선수 이후로 그 법손(法孫)들이 수선(修禪)에만 전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교(經敎)의 연구에 힘쓴 경향이 짙었고, 한때는 간경(看經)·강학(講學)에 전념하는 고승들이 수없이 이어 나왔다. 그리하여 긍선(亘璇)의 『선문수경(禪文手鏡)』 저술 이후, 불교계에는 새로운 선담(禪談)의 바람이 일어났다.
승려들은 고성염불(高聲念佛)로 정토(淨土)에 왕생할 업(業)을 닦았고, 때로는 진언을 외워 비밀법(祕密法)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단의 변천 결과로 승단 안에는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이 형성되기에 이르렀고 승려의 수행도 선과 교와 염불의 3문으로 나누어짐에 따라서 대부분의 대사찰에는 선방·강당·염불당을 갖추고 있었다.
선론(禪論)과 염불회(念佛會).
긍선이 선학연구의 지침서로서 『선문수경』을 저술하자 이때부터 조선 말기의 불교계에는 새로운 선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의 불교계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선의 연구서로서 긍선은 이 책에서 조사선(祖師禪)·여래선(如來禪)·의리선(義理禪)의 3종선(三種禪)을 세우고,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格外禪)으로, 의리선을 최하급의 선이라고 보았다.
이 『선문수경』에 대해 가장 먼저 반론을 제기한 이는 근세의 고승으로서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을 펼친 의순(意恂)이다. 그는 『사변만어(四辨漫語)』를 지어 의리선과 격외선, 여래선과 조사선, 활인검(活人劍)과 살인검(殺人劍), 진공(眞空)과 묘유(妙有)의 네 가지 측면에서 백파의 선론을 반박하였다.홍기(洪基)도 긍선의 『선문수경』이 고석(古釋)에 어긋나서 그것을 고쳐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을 지어 긍선의 선론을 지적하고, 고석을 인증하여 그 잘못된 바를 변증하였다.
이에 대하여 긍선의 문인이며 법손인 유형(有炯)은 『선원소류(禪源溯流)』를 지어 의순의 『사변만어』와 홍기의 『선문증정록』을 다시 반박하고 긍선의 『선문수경』을 비호하였다.
그 뒤 서진하(徐震河)는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를 지어 긍선·의순·홍기·유형의 선론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여기서 서진하는 긍선의 설을 찬성하거나 또는 반대하였지만, 그때까지의 선론을 총정리하여 집대성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이 긍선의 선론을 중심으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로 하는 선에 이론이 가해지고 논쟁이 일어남으로써, 조선 말기 불교계의 한 시대적 특징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 시대의 불교계에는 고성염불로 일과를 삼는 미타정토신앙의 풍조가 널리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미타신앙은 불교 전래와 거의 동시에 이 땅에 들어왔고 통일신라 때부터 성행하였다.
특별히 정토종(淨土宗)의 성립은 보지 못하였지만, 미타염불은 모든 불교인에게 거의 보편화되었고, 특히 조선 말기에는 크게 성행하였다. 많은 사찰에는 염불당이 있어서 만일회(萬日會)를 설(設)하고 아미타불을 칭념하여 정토왕생을 원구하는 염불의 모임들을 가졌다.
불교도들이 1만 일을 한정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는 이 만일염불회는 부쩍 성행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건봉사(乾鳳寺)와 망월사(望月寺)의 염불회가 유명하였다.
건봉사의 만일회는 전후 3회에 걸쳐 대법회를 가졌다. 처음은 순조 때에 용허(聳虛)가 시작하여 마쳤고, 두번째는 철종 때에 벽오(碧梧)가 시작하여 마쳤으며, 세번째는 만화(萬化)가 1881년에 시작하여 1908년에 마쳤다.
또한 이 시대에 와서 승려들 사이에 이판승과 사판승의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 참선·간경·염불의 삼문(三門)으로 수행을 했던 이시대의 승려 중 참선과 염불하는 승려를 수좌(首座)라 하고 경을 공부하는 승려를 강사(講師)라고 불렀다.
이들 수좌와 강사는 가급적이면 시끄러움을 피하여 산중의 사암(寺庵)에 머물렀으며 사원의 사무와 관가나 유생들에 의해 주어지는 역임(役任)에 종사하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
이에 따라 자연히 사원을 운영하고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해야 할 승려층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수도하는 수좌와 강사를 이판승이라 하고, 사원의 제반 업무를 맡아보는 주지 등의 승려를 사판승(事判僧)이라 하였다.
이판승은 잡무를 멀리하고 공부에 의하여 교단의 혜명(慧明)을 계승함으로써 불교의 명맥을 이어갔고, 사판승은 비록 무식하고 공부에는 힘쓰지 못하였으나 유생들과 위정자의 횡포를 견디면서도 사찰의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하여 사원의 황폐를 방지하고 교단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승려 입성(入城)의 자유.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역사(役事)가 도성 안에서 있을 때에만 승려의 입성이 허락되었을 뿐, 대부분의 시기에는 천인과 죄인처럼 취급되어 도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1895년(고종 32) 4월에 입성의 금령(禁令)이 해제되었는데, 여기에는 일본승려들의 힘이 컸다. 이듬해에는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일본승려들과 합동으로 성내의 원동(苑洞)에서 무차대법회(無遮大法會)를 베풀었다.
그 뒤 1898년 봄에 다시 성내의 승려를 축출하고 출입을 금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오래지 않아 풀리게 되었다.
오랫동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성내에 출입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자 승려들은 자유롭게 서울을 중심으로 포교할 수 있게 되었고, 배척과 천대의 굴레에서 벗어나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들을 하게 되었다.
암담하였던 불교는 다시 밝은 빛을 비출 수 있게 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국가의 관리를 다시 받게 되었고, 또 일제의 통치권 아래에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근대 국가의 관리.
조선 중엽 이후 굳게 닫혔던 성문이 근대에 들어오면서 열려지게 됨에 따라 자유로운 불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국가에서도 뒤늦게나마 자각을 하여 지금까지의 불교배척의 억압정책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를 꾀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아울러 불교계에서도 전국 사원의 통일적인 통제를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1899년에는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한국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인 국내 수사찰(首寺刹)로 삼고 13도에 각각 하나의 수사(首寺)를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하였다.
1902년에는 정부에서 사원의 국가관리를 위하여 궁내부(宮內部) 소속으로 관리서(管理署)를 설치하였다. 관리서는 사사관리세칙(寺社管理細則)을 제정하고, 대법산(大法山)과 중법산제(中法山制)를 실시하여 전국 사찰 및 승려에 관한 사무 일체를 맡아보았다.
대법산은 국내 수사인 원흥사로 정하고, 중법산은 도내 수사 16개 절을 지정하였다. 오랫동안 관심 밖에서 방치되었던 전국의 사찰 및 승려는 이를 계기로 국가행정의 범위 안에서 보호를 받게 되었다. 관리서는 궁내부에 소속원 정부의 한 관서였기 때문에 국가공무원인 관리가 관리주사(管理主事) 등의 사무직에 임명되어 제반 서무를 맡아 하였다.
당시 정치의 혼란과 공무원의 부패로 인하여 이 관리서가 제도적·이념적으로는 아주 훌륭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뚜렷한 발전을 도모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로 인하여 승려의 위치나 일반적 대우가 나아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관리서와 대법산의 제도도 오래가지 못하고 1904년 1월에 폐지됨에 따라, 그 소관 사무는 내부(內部) 관방(官房)에 옮겨졌다가 2월에는 내부 지방국(地方局)의 주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뒤 1906년에 이보담(李寶潭)과 홍월초(洪月初) 등이 원흥사에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설립하였다.
이 불교연구회는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것이었으므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기관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여기에서 명진학교(明進學校)라는 새로운 교육기관을 창설하였다는 것은 길이 남을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명진학교는 현대적인 불교교육을 위한 최초의 교육기관으로 불교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원흥사를 교사로 하여 1906년에 세웠던 것으로서 오늘날 동국대학교의 전신이 된다.
1908년 3월에는 전국 승려 대표자 52명이 원흥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종단의 이름을 원종(圓宗)으로 결정한 뒤 원흥사에다 종무원(宗務院)을 설치하였다. 1910년 서울 전동에 각황사(覺皇寺)를 세우고 조선불교중앙회무소(朝鮮佛敎中央會務所)로 삼을 때까지 원흥사는 근대 한국불교의 발상지요, 새 불교의 요람지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원종의 종정(宗正) 이회광(李晦光)은 일본으로 가서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연합하기로 합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개한 국내의 승려들은 승려대회를 열었고, 1911년 정월에는 영남·호남의 승려들이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웠다.
임제종은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두었다가 그 뒤에는 동래 범어사(梵魚寺)로 옮겨, 서울 원종과 맞서서 포교활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미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조선총독부가 생긴 뒤의 일이었으므로, 불교종단도 총독부의 지배하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총독부는 사찰령(寺刹令)을 제정하여 이 땅의 모든 사찰과 승려문제를 규제하였으므로, 원종과 임제종의 대립도 저절로 없어지고 우리나라의 불교는 국가의 운명과 함께 조선총독의 관리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교단
1910년 8월에 나라를 잃은 이 땅의 불교는 1911년 6월 새로운 사찰령이 제정, 반포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지배 아래에서 새로운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즉 총독부 사찰령에 의하여 한반도 내의 교단은 30곳의 본산제(本山制)로 형성되었으며,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 하여 지금까지의 종론(宗論)을 통일하고 중앙에 30본산회의소(本山會議所)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교단은 조선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각각 30군데의 교구(敎區)로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30본산회의소가 있었으나 각 본사간의 유기적인 연관관계가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30본산 주지들이 포교 및 교육사업의 일원화를 꾀하기 위하여 연합규제를 마련하고 30본산 연합사무소를 서울의 각황사(覺皇寺)에 두었다.
이 연합사무소는 이름 그대로 30본산의 연합사무만을 집행하였을 뿐, 전국사찰을 통할하고 전국 승려를 통제하는 권한은 없었다.
그리하여 실질적인 중앙통제기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필요성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총무원(朝鮮佛敎禪敎兩宗中央總務院)이다. 중앙총무원이 1922년 1월 각황사에 설치된 뒤 그 해 5월에는 같은 각황사에 불교선교양종중앙교무원(佛敎禪敎兩宗中央敎務院)이 설치되었다. 몇 년 뒤에는 양원(兩院)이 하나로 뭉쳐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이 되었다.
1929년 1월 각황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종헌(宗憲)과 교무원의 원칙(院則) 및 교정회법(敎正會法)·종회법(宗會法) 등을 제정하였으며, 7명의 교정(敎正)을 선출하여 종단 최고의 원로기관으로 하였다.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명실공히 중앙통제기구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서 근본적인 어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시 총본산운동(總本山運動)을 전개시키기에 이르렀다.
1941년 봄에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曹溪寺)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고 불리던 종단의 이름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교단을 통제하기 위하여 31본산 위에 전국 사찰을 통일적으로 총괄하는 총본산을 두었는데, 그 총본산을 태고사로 삼았다.
1941년 4월 23일부터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사법(太古寺寺法)의 인가를 얻어 조계종으로 발족한 이 종단에서는 제1대종정(宗正)을 중원(重遠)으로 추대하고 그 해 6월 6일부터 총본사인 태고사 종무원에서 종무를 시작하였다. 이 조선불교조계종도 1945년 8월 15일의 광복과 더불어 한국불교조계종(韓國佛敎曹溪宗)으로 정비되어 새로운 출발을 보게 되었다.
광복과 함께 1945년 10월에는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일제의 사찰령과 당시까지의 사법(寺法)을 폐지하고 새로운 불교교헌(佛敎敎憲)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조계종 초대 교정에 박한영(朴漢永)을 추대하였다. 이로써 한국불교는 식민지정책의 굴레를 벗어나서 불교문화를 무한히 꽃 피울 내일을 약속하게 된 것이다.
교육 및 문화사업
불교의 현대적 교육은 1906년 명진학교가 설립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 뒤 각 지방에 불교학교를 설립하게 하였는데 이는 젊은 불교인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 건립이라는 명분으로 각 지방의 사찰재산들이 징발당하였으므로 이를 방지하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명진학교의 교장은 당시 불교연구회 회장이었던 이보택(李寶澤)이 맡았으며, 1907년에는 이회광이 선임되었다.
1908년 불교연구원에 이어서 원종종무원이 원흥사에 들어선 다음 명진학교는 불교사범학교(佛敎師範學校)로 고쳐졌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능인보통학교(能仁普通學校)·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등을 세웠으나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고, 1916년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을 설립하였으나 3·1운동 때 학림의 학생들이 많이 활약하였고 또 독립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에 총독부의 제지를 받다가 1922년 30본산연합 제규(制規)가 폐지된 뒤 폐교되고 말았다.
1921년에는 따로 동광학교(東光學校)가 설립되었고, 1922년에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경영하였는데, 1925년에 이 두 학교를 병합하여 불교전수학교로 만들었다.
이 불교전수학교는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그 뒤 1940년에는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로 학교명을 고쳤으며, 1946년 9월에는 동국대학(東國大學)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53년에는 동국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이 밖에도 서울과 각 지방에는 종립학교(宗立學校)가 설립되어 초·중·고등학생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교육기관 이외에 이 시대의 문화사업으로는 불교지(佛敎誌)의 간행을 들 수 있다. 신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불교계 최초의 잡지로 발간한 것은 1910년 12월에 창간된 『원종 圓宗』을 들 수 있으나, 이는 원종 종무원의 기관지이며 겨우 2호로서 종간되었다.
불교문화의 종합지이며 본격적인 불교잡지는 발행인 권상로(權相老)가 1913년 2월에 발간한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잡지는 1913년 8월에 19호로 종간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해동불교(海東佛敎)』가 박한영(朴漢永)에 의해 발간되었는데, 1914년 6월에 8호로 종간되었다. 1915년 3월에는 『불교진흥회월보(佛敎振興會月報)』가 이능화(李能和)에 의해 발간되었다가 같은 해 12월에 9호를 내고 종간되었고, 1916년 4월에는 다시 이능화가 『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를 발간하였으나 3호를 내고 종간되었으며, 1917년 3월에 다시 이능화가 『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總報)』를 발행하여 1920년 5월까지 21호를 발간하였다.
1924년 7월에는 권상로가 『불교(佛敎)』를 발행하여 10년을 속간하다가 1933년 6월에 107호를 내고 종간되었고, 또 1937년 3월에 『불교』지가 다시 속간되어 이를 『신불교(新佛敎)』라 하였는데 광복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밖에도 1914년에 동경 유학생들이 발간한 『금강저(金剛杵)』와 1920년에 통도사에서 발간한 『취산보림(鷲山寶林)』, 또 같은 해에 조선불교청년회 통도사지회가 발행한 『조음(潮音)』, 1924년 7월에 조선불교회가 발행한 『불일(佛日)』, 같은 해에 북경 불교유학생회에서 발행한 『황야(荒野)』, 1935년에 발간된 『불교시보(佛敎時報)』, 불교전수학교 교우회에서 발행하였던 『일광지(日光誌)』 등이 있었다.
현대 우리나라의 불교사에 있어 가장 큰 과제는 일제시대에 문화적인 탄압의 일환책으로 일본식 불교를 신봉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대처승(帶妻僧)을 장려함으로써 흩어졌던 승단을 다시 정화하는 데 있었다. 일본인들의 승려 대처화는 무뢰배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크게 호응을 얻었고, 식민지정책의 비호 아래 무뢰한 파계괴법승(破戒壞法僧)들의 사원 장악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소수의 비구승들은 최후의 보위책으로서 1926년 12월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 현재의 禪學院)을 설립하였다. 그 뒤 이곳을 중심으로 모든 정화운동이 미약하나마 전개되기에 이르렀고 1941년 3월 13일에는 이 선학원에 당대의 고승들이 모두 참석하여 비구승대회(比丘僧大會)를 열었다.
이때 석가모니의 교지(敎旨)를 천명하고 정법(正法)의 수호를 위해서는 승풍(僧風)을 정화하고 대처승의 비리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비구승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오히려 그 대회가 불법임을 주장하며, 선학원을 중심으로 하는 비구승의 세력을 거세하는 작업에 착수하기까지 하였다.
1945년에 광복을 맞았으나 불교종단의 암운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광복 초의 혼란을 틈타 종권다툼은 더욱더 극을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1950년 이래, 각지의 뜻 있는 승려들은 다시 절을 찾아 정법수호(正法守護)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다.
전국의 각 사찰마다 비구와 대처승의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고, 절을 뺏고 빼앗기는 싸움은 유혈사태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조실(祖室)을 추방하거나 선원(禪院)을 이동하기도 하였으며, 숱한 문화재들이 파괴되고 도굴된 것도 많았다.
6·25전쟁이 발발하였을 때도 이와 같은 사정은 변하지 않았다. 신심 있는 승려가 지키지 않는 절은 이미 수도장이라기보다는 관광지였고 놀이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위는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게 상세히 보고되기에 이르렀고, 이승만은 “처자 있는 사람들은 절에서 물러가고, 한국 고유의 승풍을 살리기 위해 독신승이 사찰을 지키게 하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 담화는 정화추진의 일대 전기가 되었다.
1954년 6월 24일 서울 안국동의 선학원에서는 원로 비구(元老比丘)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교단정화대책위원회(敎團淨化對策委員會)를 구성하였고, 8월 24일에는 제1차로 전국비구승 대표자대회가 소집되어 정화운동의 기본방침을 결정하였다.
교계 신도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언론도 적극적으로 위원회의 결의사항을 지지하였고, 사회정화·민족종교부흥이라는 관점에서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성원을 받았다.
1954년 9월 28일에는 제2차 전국비구승대회가 열렸고, 이 대회에서 새로운 종헌(宗憲)이 채택되었으며, 종정에 송만암(宋曼庵), 부종정에 하동산(河東山), 도총섭(都摠攝)에 이청담(李靑潭) 등이 선출되었다.
대처승들은 새로운 물결의 흐름을 완강하게 거부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도저히 쌍방의 합의점을 찾을 길이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더구나 종정으로 추대된 송만암마저 정화방법에 이의를 제기하게 되자, 전국비구승대회는 하동산을 새로운 종정으로 추대하고 대처승들에 의해 강점되었던 태고사(太古寺)를 다시 되찾기 위해 법적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 11월 5일에 그곳을 정식으로 접수하여 조계사라고 개칭하였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쌍방은 전권대표 5명씩을 선발할 것을 합의하여 불교정화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그 회합에서도 양측의 합의점은 찾지 못하였다.
1955년 8월 11일에는 제5차 전국승려대회가 소집되었는데, 많은 논란을 겪은 끝에 새로운 종단의 출범에 관한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들이 제기되고 검토되었다.
그때 조계사에는 1,003명의 비구가 참석하였고, 새로운 종단의 종정으로 석우(石友)가 추대되었다. 1958년 8월 13일 다시 하동산이 종정으로 추대되었고, 효봉(曉峰)·청담 등 여러 고승들과 함께 대처승을 설득하고 회유하여 극렬한 반대만을 일삼던 대처승들은 신종단(新宗團)의 출범에 협조하기에 이르렀다.
1962년 4월 12일 통일종단이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당국의 협력과 신심 있는 수도자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오랜 불교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불교재산관리법」에 의하여 등록된 18개 종단이 있다.
한국 최대의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을 비롯하여 통합종단의 구성에 끝내 불응하여 별립(別立)한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이 있다.
그 밖에 대한불교진각종(大韓佛敎眞覺宗)· 대한불교진언종(大韓佛敎眞言宗)· 대한불교불입종(大韓佛敎佛入宗)· 대한불교법화종(大韓佛敎法華宗)· 한국불교법화종(韓國佛敎法華宗)· 대한불교일승종(大韓佛敎一乘宗)·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 대한불교원효종(大韓佛敎元曉宗)·대한불교화엄종(大韓佛敎華嚴宗)· 대한불교총화종(大韓佛敎總和宗)· 대한불교법상종(大韓佛敎法相宗)· 천화불교(天華佛敎)· 대한불교미륵종(大韓佛敎彌勒宗)· 대한불교정토종(大韓佛敎淨土宗)· 대한불교용화종(大韓佛敎龍華宗)· 대한불교보문종(大韓佛敎普門宗) 등이 있다.
참고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각훈)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조선불교약사(朝鮮佛敎略史)』(권상로, 신문관, 1917)
-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이능화, 신문관, 1918)
- 『정병조의 불교강좌』(정병조, 민족사, 1997)
- 『미래사회를 향한 불타의 가르침』(대한불교진흥원 편, 1995)
- 『불교학개론』(동국대학교 출판부 편, 1993)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한국인의 종교』(윤이흠·정병조 외, 문덕사, 1991)
- 『한국불교사개설』(김영태, 경서원, 1986)
- 『한국불교사연구』(안계현, 동화출판공사, 1982)
- 『불교문화사』(동국대학교 출판부, 1980)
- 『한국의 불교』(이기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4)
- 『한국불교사』(우정상·김영태, 진수당, 1969)
- 『朝鮮禪敎史』(忽谷快天)
- 『李朝佛敎』(高橋亨, 寶文館, 1929)
불교 [Buddhism, 佛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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