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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각종꽃. (국내, 외,,

국화 , Chrysanthemum . 菊花 . 1

국화 , Chrysanthemum . 菊花 . 1

송나라 문인 구양수(, 1007~1072)가 “들꽃이 피어나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고 한 때가 바로 지금이다. 

나의 어린 시절, 산골에는 꽃이 많았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 무렵이면 밭에는 모란과 작약이 만개하여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모란, 작약과 더불어 국화를 3가품()이라 한다. 

구양수가 〈취옹정기()〉에서 말한 대로 ‘바람이 상쾌하고 서리가 깨끗한()’ 가을이 무르익을 즈음 산자락 여기저기에는 들국화가 결곡한 자태로 피어났다. 

찬바람이 불 때 피는 국화는 그 존재감이 남달랐다.

 

국화는 중국이 그 원산지라고 한다. 

그리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중국의 오래된 기서()의 하나인 《산해경()》에는 "여궤()의 산에 국화가 많이 있다" 하고 굴원()의 〈초사()〉에는 "아침에는 목란()의 이슬을 마시고 저녁엔 가을 국화의 꽃을 씹는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오래 전부터 국화는 있었다. 

중국송나라때 의 양국대가()인 유몽()의 〈국보()〉에는 품종에 신라국()의 이중국 송름을 들고 일명 옥매() 또는 능국()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고,  일본의 《왜한삼재도회()》에서는 4세기 경에 백제에서 청·황·홍·백·흑 등 오색의 국화가 일본에 수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 재배 국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양화소록》에서 고려 충숙왕 때 원나라에서 학정홍()·소설백() 등 여러 품종의 국화를 다른 꽃들과 함께 도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의종() 14년(1160년) 9월에 왕이 국화를 감상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중국과 같이 국화의 원산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이미 국화가 있었고 중국으로부터 도래된 국화와 더불어 재배 또는 교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백제에 있었다는 흑색 국화가 실제로 어떤 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짙은 붉은색을 흑색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습유기()》에는 중국의 종남산()의 오로동비()에 "영수()는 한()의 호묵()인데 검은 국화가 있어 그 빛이 먹과 같아 옛날에는 그 즙으로 글을 썼다"고 하였는데 그것과 같은 종류였는지 지금은 어느 것이나 알 길이 없다.


국화 재배는 그후 계속 발전하여 품종의 수도 많이 증가하였는데 《양화소록》에는 20종, 또 《화암수록》에서는 황·백·홍·자 등 도합 154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명한 유몽의 《국보()》에는 35종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국화의 한명() 별호는 그 품종만큼이나 많다. 

국화의 옛이름은 《본초강목()》에서는 절화()·여절()·여화()·여경()·일정()·갱생()·부연년()·치장()·금예()·음성()·주영() 등으로 적고 있다. 

이러한 이름 가운데는 여자의 성기를 연상하여 붙여진 것이 많다. 

그것은 국화의 존귀함을 생에 대한 신비한 상징성과 연계시켜 붙여진 것으로 짐작된다.


국화의 별명을 황화() 또는 황예()라 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 꽃빛이 황색이기도 하지만 황()의 사상이 중국 민족에 있어서는 신성한 것의 대명사로서 지상지고()의 군주를 황제()라 했듯이 국화를 꽃의 왕자라 하여 황화라 한 것이다.


국화는 그 상징성 또는 시제() 등과 관련하여 은군자()·은일화()·중양화()·오상()·상하걸()·황금갑()·동리()·동리가색() 등으로도 불린다. 

여기에서 '오상'이란 말은 서리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17~18세기에 유럽으로 건너간 국화의 꽃말은 '역경에도 꺾이지 않는 쾌활함'이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연년()·수객()·가우()·일우()·냉향() 등이 있다.

중국에서는 다음과 같이 국화의 색깔과 모양에 따라 매우 매혹적이며 세련된 이름들을 가진 것이 있다고 한다.

 

야생 국화종과 비슷한 노란 단추 모양의 국화는 '별이 가득한 하늘'이라 불리며, 하얀 깃처럼 생긴 국화는 '거위 깃틀 관'이라 하고 노란 깃처럼 생긴 국화는 '붉은 실'이라 하고 깔죽깔죽한 커다란 자줏빛 국화는 '신선들의 복숭아로 만든 술에 취한 국화'라고 하고 중심부가 노랗고 커다란 한송이 흰 국화는 '옥쟁반을 받친 황금의 잔'이라 했으며 섬세한 꽃잎의 변종들은 '솔 침상엽' 또는 '용의 수염'이라고 불렀다. 

 

붉은 바탕과 흰 점이 있는 것은 '단풍잎과 갈대의 꽃'이라고 했고 붉은 선 무늬의 흰 국화는 '붉은 바탕에 덮인 백설'이라 했는데 거기엔 눈을 찬미하는 어린 소녀나 중앙 아시아 눈 덮인 불모지를 떠난 사랑하는 왕차오 췬을 연모하는 어린 소녀의 사연이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목은() 이색()의 시로 말미암아 우리 예원()에서는 상파()란 이름이 흔히 사용되고 있다.

들국화()란 말은 국화의 종() 이름이 아니고 구절초·개미취·개쑥부쟁이 등과 같이 산야에 절로 피는 야생종 국화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것은 문인들이 만들어낸 이름으로 우리의 정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 우리들의 사랑을 받은 꽃이 되었다.

 

도연명이 갈건을 벗어 술 거르는 장면을 그린 명나라 화가 정운붕()의 〈녹주도()〉를 보면, 무리 지어 핀 흰 들국화 사이로 자줏빛과 노란 들국화가 드문드문 섞여 있다.

국화가 지고 긴 겨울의 여백을 지나면 매화가 찾아온다. 

매화가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꽃이라면 국화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꽃이라 할까. 

원나라 하중()의 〈국화()〉라는 시부터 읽어본다.

국화는 유인과 같고
매화는 열사와 같다.
모두 빙설 속에서 피어나지만
품격은 서로 같지 않구나.

차가운 눈 속에서 봄을 알리는 매화를 보고 열사()의 이미지를 떠올렸다면 서리 내리는 추운 계절에 저 홀로 피어 있는 국화의 자태에서 은인자중하는 은자의 풍도를 본 것이다. 

 

다음은 당나라 시인 원진()의 〈국화()〉이다.

도연명의 집처럼 집을 둘러 핀 국화 떨기
빙 두른 울타리 옆으로 해는 기울어간다.
꽃 중에서 국화만을 편애하는 건 아니지만
이 꽃이 지고 나면 더 이상 꽃이 없으리니.

이 시에서도 국화는 1년 중 마지막에 피는 꽃으로 등장한다. 

 

당시칠언 화보()]에 이 시의 정경을 그림으로 새긴 판화가 있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채여좌()가 그림을 그리고 유차천()이 판각한 것이다.

울타리 옆 소나무 너머로 지는 노을과 시들어가는 국화를 연결하여 사라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었다. 

 

소나무와 국화를 좋아했던, 지조의 상징

도연명은 혼란기를 살면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역사적으로, 지조를 위해 곤궁함을 감내하거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긴 이들을 높이고 기렸다. 

은()ㆍ주() 교체기의 백이()와 숙제(), 자기를 알아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형가(), 늙어서도 고궁()의 절개를 견지했던 영계기() 등이다. 

도연명은 「술을 마시며」 제2수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선한 일 많이 하면 보답이 있다는데

백이, 숙제는 서산에서 살았네.

선과 악이 진실로 보답 받지 못한다면,

무슨 일로 부질없이 그런 말을 내세웠나.

영계기는 90에도 새끼 띠 하였는데,

하물며 젊은 시절의 굶주림과 추위쯤이야.

고궁()의 절개를 믿지 않는다면,

백대 후에 장차 누가 전해 주리오.

 

상단의 4구와 하단의 4구에서 의미가 반전되고 있다. 

상단에서는 백이, 숙제 같은 사람이 굶어 죽고 영계기 같이 도를 깨달은 이들이 추위에 고생했으니 적선()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회의하고 있다. 

하단에서 이를 반전시켜서, 어려움 속에서도 굳게 절개를 지켜 훌륭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하였다. 

 

백이와 숙제는 은ㆍ주의 왕조 교체기를 맞아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바를 따르고자 죽음도 개의치 않았다. 

진()ㆍ송()의 교체기를 살았던 그는 이 때문에 더욱 백이, 숙제와 같이 절의를 지킨 사람들에게 경도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절개를 소나무, 국화 등 자연물에 빗대어 드러내곤 한다.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듯이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 데서 변함없는 절개를 상징하였다. 

 

도연명은 「술을 마시며」 제4수에서,

홀로 선 소나무를 만나게 되어,
날개 거두고 멀리에서 돌아왔다.
거센 바람에 무성한 나무 없는데,
이 그늘만이 유독 쇠하지 않았다.14)

라고 하여 소나무가 풍파에 지친 자신에게 의지처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귀거래사」에서는, 동산의 오솔길은 거칠어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그래도 남아서 자신을 반기고 있음을 읊는다.

도연명은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국화에 대해서도 어려움에 굽히지 않는 절개를 배우고자 하였다. 

 

「화곽주부(簿)」 제2수에서, 서리를 무릅쓰고 피어 있는 국화를 소나무와 함께 칭송하여 '서리 아래의 호걸'이라는 것이다.

향기로운 국화는 숲에 피어 빛나고,
푸른 소나무는 바위산 위에 늘어서 있다.
이 곧고 빼어난 모습을 간직한 채,
우뚝하니 서리 아래 호걸이 되었구나.

다른 꽃들은 시들어 떨어지는 계절에, 서리를 무릅쓰고 피어나는 국화 및 푸른 잎이 지지 않는 소나무의 기상을 칭송하고 있다. 

힘든 시대를 살았던 도연명에게 소나무와 국화는 바로 마음이 서로 통한 벗이었다.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의 〈농가월령가〉에는 “만산(滿) 풍엽()은 연지()를 물들이고 / 울 밑에 황국화()는 추광()을 자랑한다”라고 하여 국화는 음력 9월의 계절감을 나타내는 소재로 나온다.

황봉지() 편찬의 [당시칠언 화보()]에 실린 원진()의 시 <국화>.

 

명나라 왕무학()이 글씨를 쓰고 채여좌()가 삽화를 그렸다.

추운 계절에 피는 꽃이라서 그런지 국화에는 인고의 이미지가 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나 노천명의 〈국화제()〉 시에서 보이는 이미지도 옛 한시에 그 맥이 닿아 있다. 

영물시()에 뛰어났던 이규보(, 1168~1241)의 〈국화를 읊다()〉에 그런 이미지가 잘 드러난다.

서리를 견디는 자태 외려 봄꽃보다 나은데
삼추를 지나고도 떨기에서 떠날 줄 모르네.
꽃 중에서 오직 너만이 굳은 절개 지키니
함부로 꺾어서 술자리에 보내지 마오.

이 시 앞에는, 국화가 봄철의 꽃보다 나아 술잔 속에 띄우니 흥취가 더한다는 내용으로 쓴 시가 한 수 더 있다. 

이러한 절개를 가진 꽃을 함부로 꺾어 술좌석에 보내서는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듯, 얼른 그 외경심을 주목하여 이 시 한 수를 더 지었으리라. 

물론 이 시 속에는 한 사람의 문인으로 당당히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이규보의 자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으려는 절조()가 엿보인다.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국화를 보고 자연스럽게 이런 시상이 떠오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오래 축적된 문화사적 배경이 있다.

 

남부지방에서 불리는 〈각설이 타령〉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굿자()나 한 장 들고 봐
구월이라 국화꽃
화중군자() 일러있고

이와 같이 국화는 매화·난초·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로 일컬어 왔다. 

국화·연·매화·대나무를 사일()이라고 한다. 

국화는 또 가우()라고도 하는데 모란 작약과 함께 삼가품()이라고 한다.


군자는 뜻이 맞는 친구를 선택한다. 

삼익우()가 있는데 솔·대나무·매화가 여기에 들어간다. 

매화와 대나무는 군자이기도 하고 익우()이기도 하지만 국화는 여기에 제외되어 있다. 

그 이유를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볼 수 있다.


국화의 고귀함을 인정하면서도 '국화는 은일자()'라는 성격을 부여한 것이다. 

이 영향으로 국화는 은군자() 또는 은사()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 대중()은 하나의 선을 획책해 놓은 꽃으로 위치를 굳혀 버린 것이다.

국화는 뭇 꽃들이 다투어 피는 봄이나 여름을 피하여 황량한 늦가을에 고고하게 피어난다. 

 

자연의 현상에서 인생의 진실을 배웠던 우리 선조들은 늦가을 찬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에서 외롭게 피어난 그 모습을 보고 이 세상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자연 속에 숨어사는 은사의 풍모를 느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꽃의 외화()보다는 꽃에 담긴 덕()과 지()와 기()를 취했는데 국화는 일찍 심어 늦게 피니 군자의 '덕'이요, 서리를 이겨 피니 선비의 '지'며, 물 없어도 피니 한사()의 '기'라 하여 이를 국화의 삼륜()이라 하였다.

 

위()나라 종회()는 〈국화부()〉에서, 국화에는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동그란 꽃송이가 높다랗게 달려 있음은 천극()을 본 뜬 것이요
둘째, 잡색이 섞임이 없이 순수한 황색은 땅의 빛깔이고
셋째, 일찍 심어 늦게 피는 것은 군자의 덕이며
넷째, 서리를 뚫고 꽃이 피는 것은 굳세고 곧은 기상이요
다섯째, 술잔에 꽃잎이 떠 있음은 신선의 음식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전형적인 은사로는 도잠(, 365~427년)을 꼽는다. 

그는 육조()시대의 전원()시인으로 〈귀거래사()〉와 더불어 지조와 은일의 상징으로 그 이름이 높았다. 

가난한 선비였던 도연명은 호구지책으로 천성에 맞지 않는 관직에 몸 담았다가 80여일만에 사직하고 〈귀거래사〉를 썼는데 그 속에 있는 다음과 같은 시구로 은사 도연명과 국화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삼경()은 이미 황폐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여전하구나 

송나라의 범석호()는 〈국보()〉의 서()에서 국화의 은사적인 풍모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가을이 되면 모든 초목들이 시들고 죽는데 국화만은 홀로 싱싱하게 꽃을 피워 풍상 앞에 오만하게 버티고 서 있는 품이 마치 유인()과 일사()가 고결한 지조를 품고 비록 적막하고 황량한 처지에 있더라도 오직 도()를 즐기어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국화는 그 아름다움이나 상징성과 관련하여 이를 사랑했던 많은 문인들이 각기 나름대로 새롭고 특수한 어휘를 사용해서 국화를 예찬한 글을 쓰다보니 그 속에서 국화의 새로운 별명이나 아호가 생겨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시인 이은상()은 흰 국화의 화분을 집안에 들여놓고 '선생'이라 부르기로 했다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오늘 백국화 한 분()을 내 조그마한 서실()로 뫼셔 드리며 스스로 '선생'이라 부르는 뜻은 세상이 하도 구지분하고 어지럽고 시속()이 또한 얕고 엷어 미황() 속에서 허덕이므로 나는 물러나 조용히 이 꽃 앞에 와서 탄원하고 질의하고 묵상함으로써 무엇을 얻자 함이다.

알뜰하기로는 친구인 채로 귀하기로는 손님인 채로 점잖기로는 군자인 채로 정답기로는 식구인 채로 나는 여기 선생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아니한다. ······

나는 이제 내 서실로 뫼셔 드린 백국을 '축민선생()'이라 부르기로 한다. ······

내가 국화를 위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반기는 까닭은 스스로 저 옛사람과 더불어 다른 것이니······ 그와 함께 호흡을 섞고 담론을 바꾸어 이 시대의 고민, 이 민족의 고민을 해소시켜 보려는 것이다. - 이은상, 〈상국삼도()〉 중에서

 

도연명의 여향(), 천고에 드리웠네,

휴정(, 1520~1604: 서산대사)이 남긴 [청허집()]에 보면 〈소나무와 국화를 심다()〉라는 시가 있다.

지난해 처음 뜰 앞에 국화를 심고
올해는 또 난간 밖에 소나무를 심었네.
산승이 화초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색즉시공을 알게 함이라네. 使

 

불교의 색즉시공()의 진리를 들어 허상에 집착하지 말라 일갈한다. 

왜 하필이면 국화와 소나무일까? 대사의 마음이야 자신만이 알겠지만, 대사가 속으로 도연명을 알고 또 좋아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정선(), 〈동리채국()〉(부채 그림)

18세기, 종이에 담채, 22.7×59.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품 

정선은 〈동리채국()〉에서 도연명(, 365~427)의 시 〈음주()〉 제5수를 그림으로 재현하였다.

 선비의 평상복을 입은 도연명이 소나무가 서 있는 사립문 앞에서 국화를 따다가 남산을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다.

도연명은 남북조시대에 동진에서 송()으로 바뀌는 시기를 살았는데, 젊은 시절 큰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과 잘 맞지 않아 출사()와 퇴은(退)을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그는 팽택령()으로 있을 때, 현을 순시하는 독우(: 지방을 순찰하는 감찰관)가 오니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아전의 말에 “오두미()의 하찮은 녹봉 때문에 향리의 소인에게 허리를 굽실거릴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결기 있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거래사()〉는 그때의 감회를 표현한 작품이다. 

그 후 줄곧 전원에 묻혀 살면서 바뀐 왕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가 절개를 지켰다 하여 ‘정절()’이라는 사시()를 수여하였다.

 장승업(), <도연명애국도()>

제작연도 미상, 종이에 담채, 128.8 x 31.7cm, 개인 소장. 작품

 

도연명은 〈귀거래사()〉에서 “세 오솔길은 황폐해졌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네()”라고 하였고, 또 “햇빛이 장차 뉘엿뉘엿 지려 하는데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댄다()”라고 노래하였다. 

도연명의 집 주변을 나타낸 그림에는 으레 국화와 함께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소나무와 국화는 도연명의 분신이자 은일의 표상인 것이다. 

도연명이 살던 여산() 자락은 그 풍광이 우리나라와 비슷하고 국화와 소나무도 낯익어 더욱 친근감을 준다. 

 

송나라 때 화가 이공린()의 〈연명귀은도()〉를 비롯한 일련의 도연명 그림이나 앞에서 말한 당시화보에서 보듯이 화폭에 늙은 소나무가 강조되어 나타나는 것에는 이러한 연유가 있다. 

한 그루의 노송에서 풍기는 절조와 고독감이 도연명의 생애와 잘 어울리고 있다. 모두 스무 수로 된 도연명의 〈음주()〉 시 중 제7수이다.

 

가을 국화 자태도 아름다워라
이슬에 젖은 꽃잎을 따 보네.
근심을 잊는 술에 띄워 마시니
세속 떠난 마음 더욱 깊어지네.

이 연작시는 도연명 시의 풍격을 대표하고 있다. 

 

전원에 묻혀 지내면서 삶의 참의미를 자각하는 철리적인 측면과 한가하고 호젓한 심상을 자아내는 일상생활의 서정이, 세상을 좀 살아본 문인들에게 커다란 공명을 준다. 

도연명을 그린 그림에 흔히 나타나는 ‘추국유가색()’은 이 시에서 온 것이다.

 

국화를 도연명과 결부시키게 된 것은 아무래도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가 〈애련설()〉에서 “진나라 도연명은 국화를 사랑하였다” 하고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인데 “도연명 이후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다”라고 한 말 때문일 것이다. 

 

〈애련설〉은 짧고 쉬우면서 문인들의 기호에 잘 맞아떨어져 널리 암송되었다. 

일제 때 문필로 이름을 날린 문일평()이나 이후 한문학적 교양이 풍부했던 미술사학자 김용준(), 수필가 윤오영() 등의 글을 보면 도연명의 영향을 실감하는데, 그들이 책에 가장 즐겨 인용하는 시가 〈음주〉 제5수이다. 

 

그중 한 대목이다.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본다.
산 기운은 저녁 무렵에 아름답고
나는 새도 서로 더불어 돌아온다.

 

'동리채국()', 이 말 역시 여기서 나왔다. 

이 시는 도연명의 〈오류선생전()〉, 〈귀거래사〉, 〈도화원기()〉와 함께 가장 널리 알려진 글이다. 

〈음주()〉의 이 두 수와 〈귀거래사〉, 그리고 주돈이의 언급으로 도연명은 은일자의 상징이 된 것이다.

 

지식인의 은거는 평민이 시골에 사는 것과 달리 정치적이고 철학적이다. 

저 멀리 요순시대의 소보(), 허유()에서부터 한나라 때의 상산사호(), 그리고 도연명보다 조금 앞선 시기의 혜강(), 완적() 같은 죽림칠현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은나라 이윤()이나 주나라 강태공()도 발탁되어 재상이 되기 전에는 은자였다. 

이렇듯 세상이 혼란스럽거나 자신과 맞지 않을 때는 은거하고 때가 되면 출사하여 뜻을 펴는 것이 전통적인 지식인의 처세였다. 

청나라 중기의 화가인 정섭()이 “총명하게 세상 살기 어렵고, 바보스럽게 세상 살기 어렵지.

총명하면서 바보스럽게 세상을 사는 것은 더욱 어렵지()”라고 한 말이 처세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상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능력을 가진 지식인이 초야에 묻혀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게다가 이전의 포부를 접고서 자신이 만족할 만한 새 삶의 길을 개척하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느끼듯이 결코 녹록하지 않다. 

이런 면에서 도연명의 삶과 문학이 동병상련의 지식인에게 일종의 로망으로 다가와 시문에 즐겨 인용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수의 상징.

국화는 옛부터 불로장수를 상징하였다. 

옛사람들은 단순히 국화의 은일미()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식용에 공하여 불로장수한다는 데 더 관심을 가졌던 사람도 많았다. 

국화의 다른 이름에 갱생()·장수화()·수객()·부연년()·연령객() 등으로 부른 것은 이와 같이 장수의 의미가 있는 데 따라 붙여진 것이다.


국화의 식용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의 《본초경()》에서는 "줄기는 자색()이요, 향기롭고 그 맛이 감미로우며 그 잎사귀로 국을 끓일 수 있는 것이라야 진국()이다"라고 하였고 《포박자()》에서도 식용 여부로써 진국이나 아니냐를 판별한다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신선가류()가 등장하게 되어 국화를 복용한 신선의 전설이 수없이 생겨나게 되었다. 

강풍자()는 감국화()·백실산()을 먹고 신선이 되었다고 하고, 도사 주유자()는 국초()를 달여 마시고는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갔다고 하며, 유생()이 흰 국화의 즙을 짜서 화단증지()하여 일 년을 복용하고 500세를 살았다고 《포박자》에 기록하고 있다. 

한나라 유향()의 《열선전()》에서는, 팽조가 국화를 먹고 1700세를 장수하였는데 얼굴빛은 17~18세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화의 상징은 황당한 신선설만 낳게 한 것이 아니라 일반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국화가 불로장수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국화에 기국연년()·기국연년()·송국연년()이라는 축수의 문구를 부쳐 장수화로 환갑·진갑 등의 잔칫상에 헌화로 많이 사용하였다. 

민화에서 괴석()에 층층이 벌어져 피어 있는 국화를 그린 그림은 국화와 바위가 모두 장수를 뜻하기 때문에 고수()와 익수()를 뜻한다.


국화의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국화주는 특히 호주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열선전》에 나오는 팽조는 술에 국화꽃을 띄워서 국화주를 만들었는데 위()나라의 문제()가 15살밖에 못 산다고 예언되었던 것을 국화주의 비법을 알려주어 장수하게 했다고 한다. 

 후술하는 비장방()의 고사에서는 국화주가 액막이의 용도로 등장한다. 

이리하여 불로장수나 액막이를 위하여 국화주를 마시는 풍습을 낳게 되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화투의 9월 국화에 술잔이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은 단순한 풍류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와 같은 연명장수의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국화의 상징

국화에 대한 문화적 인식이나 관념은 일찍이 중국에서 먼저 형성되었다. 

문화의 이식과정에서 중국의 국화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또 선인들은 이를 적극 수용하였다. 

국화의 상징성은 중국과 우리나라가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인고()와 절개 & 국화.

국화는 온갖 꽃이 만발하는 봄·여름을 마다하고 서리가 내리고 찬바람이 부는 늦가을에 고고히 피어난다.

국화에는 오상()·상하걸()·세한조() 등의 아칭이 있는데 이것은 늦은 가을에 다른 대부분의 꽃이 시들고 난 후에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연()하게 꽃을 피우는 국화의 내한성()에 연유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국화의 생태는 인간사회에서의 현실저항을 상한다. 

오랜 세월 격정과 고통을 견디어 낸 인간의 인고와 희생을 상징한다. 

외압에 굴하지 않고 굳은 의지로 살아가는 기골찬 인물에 비유되기도 하고 온갖 유혹과 무서운 고초에도 굴하지 않는 충절과 여인의 절개를 상징하기도 한다.


꺼져가는 고려 사직을 지키려다 순사()한 정몽주는 그의 장편시 〈국화탄()〉에서 "나는 국화를 사랑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국화는 곧 충절을 상징하는 것이다.

부녀자들이 사용하는 비녀에는 그 머리에 국화무늬를 새긴 국화잠()이 있다. 

이 국화잠은 장수를 기원하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부녀자의 절개를 상징하는 것이다.

 

《춘향전》의 십장가()에서는 국화가 등장한다.

구자()낫을 붓치니 / 구고()의 학()이 되야
구만장공() 놉히 날아 / 구곡간장() 매친 한을
구중심처() 알외고져 / 구월상풍() 요락()한들
구월황화() 이우릿가

여기서의 국화는 곧 춘향의 절개를 상징한다. 

구월의 차가운 서릿발에도 이울지 않는 국화처럼 춘향의 일편단심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임을 저항하듯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혹독한 상설()의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국화는 봄이 아직 빠른 세한에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매화와 어딘가 닮은 점이 있다. 

양자를 '세한이우()' 등으로 병칭하기도 한다. 

 

매화가 봄이 오는 것을 고하는 화괴() 또는 춘풍제일지()라고 할 수 있는 데 반해서 국화는 "이 꽃이 지고나면 이제 다시 피는 꽃은 없게 된다()"

[당나라 원진의 〈국화〉 시구절]는 표현에서와 같이 '일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만추()의 꽃'이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매화가 꽃의 선봉()이라면 국화는 꽃의 전군(殿, 후미의 군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국화의 한자인 ''의 어원은 그해 꽃의 구극(), 즉 꽃의 마지막 꼴찌라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 

육전()의 《비아()》에 '국()'은 원래 '국()'이라고 썼는데 이것은 궁()을 의미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다.

국화와 매화의 이미지의 차이를 원대()의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국화는 유인()과 같고 
매화는 열사와 같도다 
모두 풍설 속에서 꽃이 피지만 
표격()은 전혀 같지 않구나 

 

국화의 은사로서의 상징성은 다시 확대되어 기품이 높고 고결한 감이 드는 만년의 인간상을 상징한다. 

만년을 맞으면서 꾸겨짐이 없이 성스러운 생활 태도를 지녀 존경을 한몸에 모으고 있는 인물에 비유되는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 연배자, 공로자, 경험이 풍부한 사람에게 비유되고 있다.

 

국화의 이와 같은 고귀하고 고결하며 성숙한 모습의 이미지는 어디에서 ?

첫째로 국화는 험한 환경에 강한 꽃이라는 것이 그 이유의 하나인 것 같다. 

국화가 생장 성숙에 이르기까지는 만리장정()에 견줄 만한 신산()을 겪어야 한다. 

한기()에 시달리면서 개화한 그 가치는 실로 높은 것이다. 

시인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고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라고 했다.


둘째로 전술한 바와 같이 국화는 그해의 꽃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피는 꽃이라는 데서 노경의 성숙, 노경의 미에 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늙어서 인격·교양·학문·기능 등 모든 면에서 노숙한 경지에 이른다. 

 젊어서도 노숙한 소양을 일찍부터 습득한 경우도 없지 않다. 

일반적으로 여러 대를 이어온 노포()가 품격이 있고 세간의 평가를 받는 것처럼 인간에 대한 평가도 비슷한 점이 없지 않는 것이다.


셋째로 일반적으로 국화의 색깔이 황색이라는 것과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황색은 수확의 색이다. 

다 익은 곡식이나 과실은 가을을 물들이고 풍성한 결실을 가져온다. 가을은 '황금의 계절'이라고도 표현해 왔다. 

만물의 성장의 종점으로 사람들은 즐겁게 이를 받아들이고 감사한다. 

봄은 청색으로 만물의 성장을 상징하는 데 대해서 황색은 인과관계의 골 쪽에 선다. 

성숙 외에 정점()·완비()·존엄 등 여러 가지 정도에 따라 최고단계를 가리키는 색이다.

그래서 국화의 별명으로 황화(·)가 생겨났다. 

황색에 빛나는 번성한 모습의 꽃을 의미한다.

 

충신과 열녀의 이미지, 굳고 결곡하여라

국화야, 너는 어이 3월 동풍 다 보내

낙목한천()에 홀로 피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정보(, 1693~1766)의 시조이다.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꿋꿋한 절개가 ‘오상고절()’이다. 

이 말은 소동파의 〈겨울 풍경()〉이라는 시에 “연꽃은 지고 나면 비를 받칠 덮개가 없지만, 국화는 시들어도 서리를 이겨내는 가지가 있다(, )”라는 대목에서 유래한 듯하다. 

 

도연명과 관련한 국화의 이미지가 은일자의 모습이었다면, 이제 국화는 말을 삼가고 역경을 견디는 인고를 넘어 매운 향기를 지닌 기품 있는 절개의 풍도()로 다가온다.

국화 이미지에 가장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은 역시 도연명이지만 그전에 굴원(, BC343?~BC278?)의 이미지가 깔려 있다. 

굴원은 〈이소()〉에서 “아침에는 목란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가을 국화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먹네(, )”라고 노래하였다. 굴원은 충신이다. 

이런 충신의 이미지가 국화와 결합해 있다. 

 

명종 때 송순(, 1493~1582)도 국화에 충신의 의미를 담은 시조를 지은 적이 있는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목은 이색(, 1328~1396)의 〈대국유감()〉이 있다.

인정이 어찌하여 무정한 물건과 같은지 人情那似物無情
요즘엔 닥치는 일마다 불평이 늘어간다. 觸境年來漸不平
우연히 동쪽 울 바라보니 부끄럽기만 하네 偶向東籬羞滿面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마주하고 있으니. 眞黃花對僞淵明

목은은 왜 국화꽃을 보며 얼굴 가득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자신을 가짜 도연명이라고 자조하는 것일까? 이기(, 1522~1600)의 〈송와잡설()〉에 이 시에 대한 배경 설명이 풍부하다. 

 

고려말에 우왕()이 폐위되어 강화()에 있을 때에 목은이 미복()으로 가서 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국화()를 보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윤근수()의 [월정만필()]에는 길재()가 목은에게 거취에 대한 의리를 물었을 때, “나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과 함께해야 하니 떠나갈 수 없지만 그대는 떠나가도 좋다” 하였다. 

목은이 그때 장단의 별장에 있다가 그에게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다()”라는 시구를 지어주었는데, 당시 목은의 심사가 잘 녹아 있다. 

서애 유성룡도 “진짜 국화가 가짜 연명을 마주하고 있다()”에 목은의 마음이 다 담겨 있다고 논평하고는 슬프다고 하였다. 

시류에 영합하는 사람이면 애초 부끄러움이 없을 터인데, 절개를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부끄럽다고 한 목은의 심정을 읽은 때문이 아닐까.

 

정몽주(, 1337~1392)가 스물다섯에 쓴 〈국화탄()〉이라는 시가 있다.

사람은 함께 말할 수 있으나
미친 그 마음 나는 미워하고
꽃은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꽃다운 그 마음 나는 사랑한다.
평소에 술을 마시지 않지만
너를 위해 한 잔 술을 들고
평소에 웃지 않지만
너를 위해 한바탕 웃어보리라.

 

시인은 별로 웃어볼 일 없는 세상에 찬란하게 핀 국화를 보고 위안을 받고 있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세태를 한탄하는 뜻과 훗날 사직()과 운명을 함께한 지조를 읽어볼 수 있다. 

같은 시에 “마침 10월로 바뀌는 즈음이라 날씨가 점점 추워지건만, 찬란하게 옛 모습 드러내고 유유히 맑은 향기 지니고 있네()”라고 한 구절은 자신의 미래를 예견해 보이고 있는 듯도 하다. 

 

포은() 역시 고려 말엽에 한 승려가 “강남 만 리에 들꽃이 만발하였으니, 봄바람 부는 어느 곳인들 좋은 산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몸을 피할 것을 암유하자, 

눈물을 흘리며, “아, 이제 늦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는 이야기가 여러 문헌에 전한다. 

목은과 포은의 행적과 일화에는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 

 

일찍이 문일평은 정몽주의 이 시를 소개하면서 “국화가 충신에게 사랑을 받고, 충신이 국화를 사랑한 것은 그럴듯한 일이다”고 했는데, 과연 그럴듯하다.

변 사또의 수청을 거부하고 곤장을 맞는 춘향의 노래에도 국화가 나온다. 

이해조()가 [춘향전]을 개작한 신소설 [옥중화()] 중 한 대목이다.

구자() 낫을 딱 부치니 구자로 아뢰리다.
구고()의 학이 되어 구만장공() 높이 날아
구곡간장() 맺힌 한을 구중심처() 아뢰고져
구월상풍() 요락()한들 구월황하() 이우릿가

아홉 구() 자를 반복하여 자신의 절개를 나타내고 있는데 그 절개의 상징물로 ‘구월황화()’, 즉 국화를 등장시키고 있다. 

국화는 절개나 충절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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