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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 荒山大捷.

황산대첩, 荒山大捷.

1380년(우왕 6) 9월에 이성계() 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 )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

 

14세기 후반에 극심하던 왜구의 노략질은 1376년 홍산(鴻山)에서 최영()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하였다. 

1376년 홍산대첩에서 최영에게 대패한 왜군이 1378년 5월 지리산 방면으로 다시 침입하였고, 1380년 8월에는 진포(:)에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침입, 충청·전라·경상 3도의 연안지방을 약탈·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 원수 나세(최무선 등이 화통()·화포()로써 왜선을 격파, 전부 불태워버리자 퇴로를 잃은 왜적은 더욱 발악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양광(楊廣)·전라(全羅)·경상도 순찰사(慶尙都巡察使)로 임명, 이 지방의 방위 책임을 맡게 하였다. 적은 함양() ·운봉() 등의 험지()를 택하여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황산 북서쪽에 이르렀을 때 적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적은 산을 의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고전에 빠졌으나, 이를 무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최영의 홍산대첩과 더불어 왜구 격파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싸움이며, 이를 계기로 왜구의 발호가 쇠퇴하였다. 1577년(선조 10)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황산대첩비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세워졌다.왜구는 이 해 8월 진포 전투에서 고려군에게 대패당한 뒤 금강 상류로 올라가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진입하여 상주·선산 등지를 소각하고, 경산에서 진로를 바꾸어 남해안에서 출구를 찾으려고 하였다. 함양에서 고려군의 추격을 물리치고 9월에는 남원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한 채 운봉 인월역으로 퇴각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한편 고려군은 이성계를 주장으로 하는 토벌군을 편성하여 운봉 부근 황산 일대의 지형을 정찰하고 공격로를 선정하였다. 황산은 이 일대 교통의 요충으로서 전쟁 시에는 전략적 중요성이 증대되는 곳이며, 또한 인접한 지리산의 험준한 지형으로 말미암아 비정규전이 행해질 때 중요 거점을 제공하는 곳이다. 고려군의

선공으로 시작된 황산전투는 왜구의 완강한 저항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전진을 포기한 채 퇴각하였다. 이성계 부대는 험로에서 왜구의 정예와 조우하여 고전하였으나 이성계의 분전으로 재 돌진하였다. 이에 사기를 회복한 고려군이 공격하였으나 왜구는 필사의 저항을 하여 다시 고려군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성계가 탄 말이 화살을 맞아 두 번씩이나 거꾸러졌고, 이성계도 다리에도 화살을 맞고 왜구에게 포위되기까지 하였다. 왜구 진영에는 아기발 도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그의 무술과 지휘가 탁월하여 왜구의 전투력이 빛을 발하였다. 이에 이성계는 이지란과 합세하여 아기발도를 화살로 죽이니 왜구의 대오가 크게 와해되었고, 이 틈을 타 고려군은 왜구를 급습을 전개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는 왜구의 시체가 언덕을 이루고 그 피가 냇물로 흘러들어 6, 7일간이나 물빛에 핏기가 가시지 않았다고 기록될 정도로 고려의 대승으로 끝났으며, 여기서 살아 지리산으로 달아난 왜구의 수효는 70여 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1380년 8월에 5백척의 대선단으로 진포(: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타고 온 배를 밧줄로 단단히 묶어놓고 상륙해 충청·전라·경상 3도 연안의 주()·군()을 약탈·방화·살육하였다. 시체가 산야를 덮고, 그들이 운반 중에 흘린 쌀이 길 위에 한자나 깔릴 지경이었다. 

 

조정에서는 나세()를 상원수로, 최무선()을 부원수로, 심덕부()를 도원수로 하여 왜적을 치도록 하였다.

진포 싸움은 최무선이 만든 신무기인 화포를 처음 사용해 묶어놓은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어 격렬했던 왜구의 만행에 쐐기를 박는 계기가 되었다. 목숨을 구한 360여 명의 적들은 옥주(: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했는데, 선박이 소실당하고 퇴로를 잃게 되자 상주·영동·옥주 등지로 진출해 약탈을 자행하였다.

상주 방면으로 진출한 왜구의 주력부대는 다시 경산( :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을 침략하고, 사근 내역(沙斤乃驛: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에 집결, 반격하였다. 왜구를 추격하던 9 원수[배극렴(裵克廉)·김용휘(金用輝)·지용기(池勇奇)·오언(吳彦)·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배언(裵彦)·도흥(都興)·하을지(河乙址)] 가운데 박수경과 배언을 포함, 5백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9월 왜구는 남원 운봉현()을 방화하고, 인월역(: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 인월리)에 주둔하면서 장차 북상하겠다고 하여 조정을 놀라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왜구 토벌에 용맹을 떨친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에 임명하고, 변안열()을 체찰사(使)에, 우인열(禹仁烈)·이원계(李元桂)·박 임종(朴林宗)·도길부(都吉敷)·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등을 원수로 삼아 이성계를 도와 왜구 대토벌 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양측은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들이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죽음을 각오한 이성계가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왜군은 함양과 운봉 등의 험지를 택하여 동서로 횡행하므로, 이성계는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원()에서 배극렴() 등과 합류하였다.

이성계는 각 부서를 정비한 다음 운봉을 넘어 왜군이 주둔해 있던 황산 북서쪽에 이르렀다.

이때 적은 산을 의지하여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성계는 고전에 빠졌으나, 이를 무릅쓰고 부하 장병을 격려하여 적을 대파하였다.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 격전을 벌여 아지발도()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때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물들어 6, 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하며, 포획한 말이 1,600여 필이고 병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고려사』열전 변안열()전에 의하면, 처음에는 적군이 아군보다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왜구 부대의 규모나 이성계의 군공이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음).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과 함께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 뒤부터 왜구의 세력은 약화되고, 고려의 왜구 대책은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1577년(선조 10)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황산대첩비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어 파편만 남은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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