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활 의 지혜,

신정 [申晸] , 구정[ 舊正 ]

신정 [申晸] 구정[  ]

신정과 구정

‘민족의 대이동’ 또는 ‘귀성 전쟁’으로 비유되는 귀성 문화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사회의 한 모습을 보여주지. 요즘에는 자식들을 보러 도시로 올라오는 부모들이 많다지만 여전히 설날이나 추석이면 도로가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이 많아.

근대사회에서는 지역에 따른 특성이나 명절들 간의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설을 신년 의례로, 추석을 수확 의례로 표준화시켰어. 근대 산업사회에서 시간은 곧 생산성과 연결되므로 설에서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장기간의 명절을 쇠는 전통을 계승하거나 지역에 따라 제각기 추석 또는 중양절을 선택하여 가을 명절을 쇠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표준화된 질서 체계를 확립하는 정책이 법정 공휴일 제도야. 법정 공휴일 제정은 근대사회에서 국가가 시간을 통제 관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거.

음력은 달의 차고 기움을 기준으로 달을 나누고, 계절의 변화를 기준으로 해를 나누는 역법이야. 오랫동안 우리네 삶의 질서를 일구어온 시간 체계였지. 일할 때와 놀 때, 신에게 제사를 올릴 때를 정하는 시간 체계는 모두 음력이었어.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사회에서는 음력 중심의 시간 체계 대신 서구의 태양력 중심의 시간 체계를 중심으로 생활 질서를 통제하기 시작했어. 1896년 1월 1일 김홍집 내각이 처음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새로운 시간 체계로 선포했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시간을 독점 관리하고 통제했어. 이때 쟁점은 양력과 음력.

귀성 전쟁 고향에 내려갈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새벽부터 서울역에서 진을 치고 있는 모습.

1910년대부터 일제가 양력을 사용하고 음력 폐지를 유도하면서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음력폐지론이 공공연하게 조선인 사회 내부에 등장했지. 음력폐지론의 초점은 음력설을 향하고 있었거든.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음력설은 버려야 할 과거 문화로 여겨졌어. 음력설을 구정, 양력설을 신정이라 칭하고 구정을 버려야 할 구습으로 치부했잖아. 보건사회부에서는 음력설을 버리고 양력설을 추진하는 목적을 이렇게 설명.

문화민족으로서 과학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비과학적이며 부패한 미신 행위의 근원이 되는 불합리한 음력을 폐지하고 세계만방이 통용하고 있는 양력을 전용함으로써 우리 생활을 과학적이며 시시각각으로 향상 발전하는 신사상, 신문화의 조류에 호응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계몽함을 목적으로 한다.

(편집부, 「이중과세를 타파하자」, 『새살림』 1957년 신년호)

양력설을 주장하는 명분은 ‘문명한 나라에서는 모두 양력을 쓴다’, ‘모든 선진 국가는 신정을 쇠는 것이 상식이다’, ‘음력은 비과학적이다’, ‘음력은 미신이다’ 따위였어. 일제강점기와 마찬가지로 1950년대에도 정부는 음력설을 쇠지 못하도록 단속했지. 1960년대에는 증산과 수출, 성장과 발전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구정 공휴일을 인정하지 않는 정책을 시행했어. 1970년대에는 근대화 및 근검절약을 주입하면서 역시 구정 공휴일 불가론을 펼쳤지. 심지어 정부에서는 구정 대신 신정을 법정 공휴일로 제정.

하지만 서민들은 여전히 음력설을 고수했단다. 정부의 시책은 음력설을 양력설로 전환시키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음력설과 양력설로 나뉘어 두 차례에 걸쳐 설을 지내는 결과를 낳았지.

<양력과세(설을 쇰) 안 한다>
몇 해를 두고 면사무소와 경찰지서원에 의하여 양력과세를 해야 한다는 계몽선전이 있었으나 올해에는 웬일인지 그러한 이야기가 드물어 국기를 게양하는 집마저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 D : ‘일본놈이 하던 걸 왜 해야 되나’
농부 A : ‘절후가 맞지 않으니 곤란’
제대 군인 C : ‘음력과세 하거나 양력과세 하거나 이런 일에 지나친 간섭 말고 정치나 깨끗이 할 일이지’
국민교원 B : ‘글쎄요, 오랜 습관이 하루아침에 잘 고쳐지겠습니까’

이 밖에 또 ‘남이 모두 안 하는 걸 혼자서 할 수 없다’는 등으로 오늘의 농촌도 해동할 무렵의 음력 초하룻날을 쌀밥과 밀주와 약간의 건어 등으로 즐기기로 한 것 같다.

(<한국일보>, 1956년 1월 9일)

정부의 음력설 폐지라는 강력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여론을 이끌어내지 못해 결국에는 1985년 음력설이 ‘민속의 날’이란 이름으로 공휴일로 지정됐어. 1989년에는 민속의 날이란 낯선 명칭 대신 우리 고유의 명칭인 ‘설’을 되찾게 됐지. 일제강점기부터 1985년까지 85년 동안 강력한 정책이 시행됐지만 양력설은 자리 잡지 못했어. 이제 음력설이 우리의 설날이지.

다른 것은 다 바뀌었는데 유독 음력설만큼은 고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 의례나 기념 투쟁은 하나의 역사적 상징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새해 새 출발 하는 ‘설’만큼은 서민들의 뜻대로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음력설을 구정이라고 부르는 방식은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것으로 보이는데, 새로운 설이 아닌 오래된 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시간관념 아래, 새해는 음력에 근거하여 시작되었다. 음력에 기반한 전통적 시간체계는 1896년을 기하여 공식적으로는 양력을 따르게 되었다. 양력설이 한국인들의 일상 생활에 좀 더 체계적으로 도입된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자신들의 시간 체계에 맞는 양력설을 새롭고 진취적이라는 의미에서 신정으로 부르고, 피식민지인인 한국인들이 쇠는 음력설은 오래되어 폐지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구정으로 불렀다. 일제가 전통 설을 지칭한 구정이라는 명칭은 일제의 양력설 정책을 답습한 해방 후 한국 정부에 의해서도 사용되었고, 그 사용이 장려되기도 했다.

음력설은 해방된 뒤에도 공무원이나 일부 국민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새해를 맞고 차례를 모시는 날이었음에도 정부는 1985년에서야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음력설을 하루만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1989년에는 관공서의 ‘공휴일에관한규정’을 개정하여 음력설을 설날로 개칭하고 전후 하루씩을 포함하여 총 3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이로써 전통 설은 구정이라는 낙후된 이미지를 벗을 수 있었고 구정이라는 단어는 이제 일상적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신정 연휴 변천사

신정은 양력으로 1월1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1949년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규정」이 만들어지면서 3일 연휴로 지정됐다.

당시 음력설은 이중과세라는 이유로 공휴일로 채택되지 않았다가 85년부터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하루를 쉬었다.

그러나 1989년에는 명칭이 민속의 날에서 설날로 바뀌면서 3일간 쉬게됐고, 신정연휴는 2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1999년부터 신정연휴는 다시 1일로 줄었다.

출처 ^ 참고문헌,

[신정과 구정 (10대와 통하는 문화로 읽는 한국 현대사, 2014.)

[구정 [舊正] (한국세시풍속사전)

[金宅圭. 韓國農耕歲時의 硏究, 1985년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신문·잡지 편 1876년 ~ 1945년, 2003년

[李杜鉉 外. 韓國民俗學槪說. 民衆書館, 1974년

[日正공휴일 公約채택 民政의원들 正式요청. 朝鮮日報, 1984. 12. 20.

[日正, 祖上의 날로 党政 公休日 합의. 朝鮮日報, 1984. 12. 23.

[日正 公休日 의결 명칠 民俗의 날로. 朝鮮日報, 1985. 1. 19.

[日正은 [설날]로…連休 확정 올해는 日曜日겹쳐. 朝鮮日報, 1989. 1. 17.

[네이버 지식백과] 신정연휴 변천사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신정 #구정 #민속의 날 #공휴일 #신정 #음력설 #우리 고유의 명칭인 설 #역사적 상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