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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역사적인), 국내,외

박제가, 朴齊家. 1

박제가, 朴齊家. 1

불운한 생애

박제가( : 1750~1805)는 영조26년 11월 5일 우부승지() 박평()의 서자()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19세 때 이덕무()의 소개로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가 실학을 연구하였으며, 이덕무 · 유득공() · 이서구() 등 실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이들 세 사람이 합작하여 영조52년(1776) 시집 ≪건연집()≫을 내어 청나라에까지 소개되어 극찬을 받았으며, 우리 나라 시문사대가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778년(정조2년) 사은사 채제공()을 수행하여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調) · 반정균() 등으로부터 새 학문을 배우고 돌아와 실사구시의 사상을 토대로 『북학의()』 내외편을 저술하였다. 1779년(30세 때) 3월 정조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처음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학파의 문헌을 대량으로 수입하여 출판하였으며, 이 때부터 정조의 신임과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순조 원년까지 여러 직책을 맡았으며 청나라에 사은사의 수행원으로 네 번이나 다녀왔다. 1801년 신유사옥()때 사돈 윤가기()의 옥사에 연좌되어 함경도 종성부()로 유배되었다가 1805년 3월 석방되었지만 같은 해 4월 25일 고향에서 별세하였다.

저서에는 『북학의』, 『명농초고()』, 『정유시고(稿)』, 『유정집()』, 『병오소회()』 등이 있다. 그의 개혁사상을 담은 저술로는 그의 초기 저술인 『북학의』와 『병오소회』이다. 전자는 그가 제1차 연행에서 돌아와 저술한 책으로서 청조의 문물을 관찰하고 돌아와 이용후생에 필요한 선진기술과 도구를 도입하고 국내의 상업과 외국무역을 장려하는 것이 부국강병의 첩경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 저술을 통해서 북학파라는 말이 형성되었다.

후자는 정조10년(1786년) 1월 22일 정조가 국정에 관한 의견을 직접 듣고자 조참()을 마치고 향재() · 시종관()에게 왕 앞에서 국정에 관한 의견을 상주()케 하고 서관() 이하는 각자의 소회를 문서로써 상주케 하자 많은 소회가 상주되었고, 그도 여기에 소회를 상주하여 그의 개혁적 의견을 제시했다.

정조는 1779년 서얼 출신의 검서관을 둘 때 그를 발탁하였고 그의 과격하고 혁신적 주장에 관하여 관심을 갖고 여러 차례 사은사의 수행원으로 연행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집을 방문하기까지 하였으며 그의 건의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도 그의 과격한 문체반정()에 대하여 자송문()을 올리라고 할 정도로 그의 문체는 과격했으며, 그와 친했던 박지원과 이덕무도 이를 항상 걱정하고 충고할 정도였다. 그를 항상 아끼던 정조가 급서하자 남인시파()가 몰락하고 이 여파로 평소 그의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을 미워하던 무리들에게 박해의 기회를 주게되어 결국 그는 유배되기까지 당하였다.

박제가는 선배들 가운데서 이지함( )과 조헌( ), 유형원( )을 경모 · 사숙하였으며, 박지원과 홍대용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박지원 · 이덕무 · 유득공 · 이서구 · 이희경() 등과 친하게 지냈으며, 그와 함께 검서각()에서 일했던 13세 연하인 정약용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김정희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牧牛圖(목우도)朴齊家(박제가).本貫:密陽(밀양).字:次修(차수).號:楚亭(초정)貞蕤(정유).葦杭道人(위항도인).

                   朝鮮後期(조선후기) 實學者(실학자).

            英祖(영조) 26年(1750~1805) 純祖(순조) 5年.

  

                   

                      


그는 당시의 주자학적 존명배청적인 학문분위기 속에서도 과감하게 청나라의 문물을 도입하고 그들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업을 중시하고 외국과의 통상을 주장하는 등 일본과 1876년에 체결한 강화조약 보다 98년이나 앞서 개국을 주장하였고, 놀고 있는 양반들에게 상업에 종사하게 하고 검약만이 미덕이 아니라 적절한 소비가 재화융통의 활성화를 가져와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는 등 당시의 어떤 개혁 사상가들도 생각하기 힘든 주장을 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국방의 문제나 농업의 문제 등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개혁안을 내세워 정약용의 실학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해외무역의 ???

임진 · 병자 양란으로 전국의 토지가 황폐화되고 국가의 재정수입이 감소되자, 17세기 초엽부터 방납에 따른 관리의 부패를 방지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대동법()을 시행하기 시작하여 17세기 말경에는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하였다. 대동법은 지방의 특산물인 공물을 미곡으로 대신해서 납부하는 제도인데 불가피한 경우에는 미곡 대신 포목이나 돈(대동전())으로 대납할 수도 있게 했다.

이렇게 대동법이 시행됨에 따라 화폐의 사용이 늘어나 화폐경제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중앙에서 필요한 특산물 구입을 위해서 국가에서 공인()을 선정하여 구입케 함으로써 그들이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여 상품의 구매와 유통을 담당하게 되어 상업이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공인 외에도 도고 등 자유상인이 생겨 이러한 구매 유통에 관여함으로써 18세기에는 상업이 매우 발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상업이 발달하고 상대적으로 농업이 침체되자 초기의 실학자들은 농업을 위해서는 상업을 억제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 대표적인 학자는 이익이었다. 그러나 이익의 족손()인 이중환()과 박제가는 상업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특히 박제가는 상업의 장려와 유통의 필요성은 물론 해외무역과 국가개방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박제가는 당시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우려하고 있는 것처럼 중농정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후생적() 측면, 즉 백성을 이롭게 하고 생활을 넉넉하게 하기 위해서 상업을 장려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물자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서 상업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제 사람들이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고 있으면 그 밖의 것은 무용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나 쓸모 없는 물건도 써서 구제하지 않으면 이른바 쓸모 있는 물건도 한편으로 막혀 통용되지 않고 한 구석에서만 통행되어 고갈되기 쉽다. ··· 이용할 줄 모르고 생산할 줄 모르니 백성은 날로 궁핍하여지는 것이다. 

무릇 재물은 샘()에 비유되는 것이다. 퍼 쓸수록 자꾸 가득 차고 사용하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나라에 비단옷을 입지 않으면 비단 짜는 사람이 없게 되고 여공도 쇠하게 될 것이며, 비뚤어진 그릇을 탓하지 않으면 기교를 숭상하지 않아서 공장()과 도야()의 기예가 없어질 것이며, 농사가 황폐화되어 그 대책이 없을 때 상업이 그 업을 잃어버리면 백성의 곤궁을 구제하지 못한다.”

박제가는 이처럼 먹고 입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재화의 유통을 통해서 생활의 윤택을 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농업이 황폐화 될 때 그 대안으로써 상업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그는 검약만이 미덕이라고 여겨졌던 시대에 소비를 권장하여 생산을 촉진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절약과 검약만을 강조하는 다른 경세사상가들과는 달리 그의 탁월한 경세관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또한 물자가 원활하게 유통되지 않음으로써 어떤 한 지방의 풍요가 다른 지방의 빈곤을 구하지 못하는 점을 들어 유통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또한 사대부도 놀고 있는 사람은 상업에 종사하여야 한다고 한다.

“무릇 놀고먹는 자는 나라의 큰 좀입니다. 놀고먹는 자가 날로 늘어가고 사족()은 날로 번성하고 있습니다. ··· 신은 청컨대 무릇 수륙으로 왕래하면서 판매하고 무역하는 일을 모두 사족에게 맡겨 종사하도록 하여, 혹은 재물을 빌려주거나 가게를 지어주어 업적이 드러나면 발탁해서 권장하고 날로 이익을 추구하게 하면 점차 놀고먹는 자의 수가 줄어들 것이며, 즐거이 직업에 종사하는 마음이 생겨 지방 귀족의 권세를 약화시키고 풍속을 변화시키는 데에도 일조가 될 것입니다.”

그는 이중환처럼 상업발전을 위해서는 운송수단이 발전해야 한다고 보고 이의 적극적인 육성을 강조했다. 이중환이 우리 나라는 산이 많아 수레보다는 배로 교역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고 물자의 수상운송을 강조한데 대하여 그는 육상운송수단으로서의 수레와 수상운송수단으로서의 배의 역할을 다같이 중시했다. 물론 그도 무역에 있어서 육상보다는 수상 또는 해상운송이 더 편리하다고 보고 있었지만 그가 육상운송수단으로서 수레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상업 외에도 군사적 · 농업적 목적과 같은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나라가 작고 백성이 가난하다. 지금 밭가는 일을 부지런히 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여 상업을 통하게 하고 수공업에 혜택을 주어 나라의 유익한 것을 총동원하더라도 오히려 부족할까 걱정이다. 또 반드시 먼 곳과 물건을 통하게 한 후에야 재화가 늘어나고 백가지 쓰임새가 생길 것이다. 대체로 수레 백대에 싣는 화물의 양이 배 한 척에 싣는 것에 못 미치고, 육로로 천리를 가는 것이 배로 만리를 가는 것보다 편리하지 못하다. 그러한 까닭으로 통상하는 자는 수로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재화의 유통의 필요성과 수상운송의 편리함을 역설하고 더 나아가 해외무역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우리 나라는 3면이 바다요, 서쪽은 중국의 산동()까지 직선으로 600여 리이고, 남해의 남쪽은 중국의 오 · 초 지방의 끝과 서로 바라보인다. 송나라의 배가 고려에 통상할 때에는 중구의 남족의 명주()에서 7일이면 예성강에 닿았으니 가깝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400년 동안 외국과는 단 한 척의 통상도 없었다.”

그는 우리 나라가 해외통상에 무관심할 때 일본은 과거 우리 나라를 통해서 중국 물건을 사감으로써 우리 나라는 중개무역에서 생기는 이득을 챙길 수 있었으나 이제 일본은 중국과 직접 무역을 하고 그 외 30여 국과도 교역을 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고, 우리 나라도 중국의 도움을 받아 많은 나라와 교역의 길을 터야 한다고 한다. 그는 단지 중국 배만 상대로 통상하고 해외의 다른 나라와 통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김안국()의 주장은 한때의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해외 많은 나라와 개국 · 통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해상운송에 필요한 선박의 제도에 관해서도 우리 나라의 선박제조기술의 낙후성을 지적하고 매년 4월에 황당선()으로 황해도에 와서 해삼을 따 가지고 8월에 돌아가는 중국 광녕각화도() 출신의 선원들을 꾀어 선박제조 기술을 배우고 우리 나라 공인들로 하여금 중국 것과 같은 견고한 선박을 제조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구차한 방법으로 선박제조 기술을 습득하려고 한 것은 당시 중국이 군사의 필요상 선박 제조 기술을 해외에 유출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후에 정약용도 다른 제조기술은 중국으로부터 배워와야 한다고 하면서도 선박제조 기술은 중국에 의뢰할 수 없고 외국의 표착선을 통해서 그 기술을 스스로 습득해야 한다고 한바 있는데 이것은 중국이 선박제조기술을 전수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항해술과 선원문제에 있어서도 외국의 표류 당한 사람들과 대청도() 소청도 흑도()의 사람들을 모와 수로()를 인도하도록 하고 중국의 해상들을 불러오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박제가는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유가사상의 억상정책에서 과감히 탈피해서 상업만이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보고 상업의 장려는 물론 해외의 많은 나라와 개국통상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모든 산업의 핵심은 농업이었으며, 따라서 상업종사자가 많아지면 농민의 이농현상으로 농업이 쇠퇴한다는 생각에서 일반 유학자는 물론 대부분의 실학자 예컨대 이익 · 정약용 · 이규경(: 이덕무의 손자)까지도 상업장려 정책에 반대 내지 소극적 입장을 취하였지만, 박제가는 이중환, 유수원 등의 상업장려책을 받아들이고 개국과 해외무역을 권장하였는데 이것은 실로 당시로서는 시대를 초월한 탁견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박제가는 놀고 있는 사대부들이 상업에 종사하여 놀고먹는 사람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홍대용의 국민개로사상을 이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상업을 천시하는 당시의 통념으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혁신적인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업에 관한 혁신적인 견해는 이지함 · 조헌 · 유형원 등에서도 나타나며, 그가 이들의 견해를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보건대 그들의 견해를 수용하였으리라고 여겨진다. 아무튼 그의 해외통상과 사대부계급의 상업종사에 관한 주장은 상업천시의 사회풍조와 양반사회의 벽을 뛰어 넘으려는 시도로서 그의 합리적이면서도 급진적 개혁성향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농업생산력 증가

박제가는 우리 나라와 중국의 생활상태를 비교하여 당시 우리 나라의 비참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중국을 모델로 하여 그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일반 백성들은 모두 조석의 양식이 없어 열 집 있는 마을에 하루 두 끼니를 먹는 사람은 몇 사람 안되고, 이른바 비상시에 대비하여 옥수수 몇 자루와 고추 수십 개가 그을러진 띠 집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중국백성들은 모두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털로 만든 담요를 덮고 잠자며, 침대와 탁자도 사용하고 있다. 밭갈이하는 농부는 옷을 벗지 않고 가죽신에 종아리를 묶고 밭에서 소를 부린다. 그런데 우리 나라 시골 백성들은 해마다 목면으로 만든 옷 하나 못 입고, 아이를 낳아도 침구도 구경 못하고 짚자리로 이불을 대신한다. 자손을 키워 10세 전후가 되어도 여름 · 겨울 없이 발가벗고 다니고 신이나 버선의 제도가 있는 줄을 모른다.”

그는 이와 같이 우리 나라의 농촌현실의 비참함을 지적하고 상대적으로 잘 살고 있는 중국의 백성들의 여유 있는 생활상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농잠총론()」에서 중국의 농기구와 영농방법 등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그는 우선 농기구 봇도랑 비료 등을 중국과 꼭 같이 개량해야하며, 양잠에 있어서도 누에고치를 다루는 방법, 그것을 기르는 방법, 고치를 켜는 방법, 그것을 짜는 방법 등, 기타 양잠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그는 또한 곡식을 까부르는데 필요한 양선(), 농업용수의 관개에 필요한 수차(), 베를 짜는 직기 등의 도입 내지 개선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의 농기구와 그 사용제도를 도입하면 그 이익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한다.

그는 상업에 있어서 육상운송의 수단으로서 수레의 사용을 권장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수레를 이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는 수레를 이용하여 장안의 분뇨와 재를 실어내어 비료로 사용하면 많은 농산물 증산을 기할 수 있으며, 도시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김옥균도 약 100여 년 후에 수레를 이용하여 분뇨 등을 거두어 들여 농업에 이용하자는 제의를 한 바 있다. 이 외에도 그는 볍씨개량 · 토지개량 · 파종법 · 시비() 등 모든 면에서 중국에서 배워야 한다고 한다.

박제가는 농업에 조예가 깊은 그의 친구인 이희경()에 관하여 언급하는데, 이로 미루어보건대 그는 그로부터 많은 농업에 관한 지식을 얻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다만 그가 우리 나라와 중국과의 풍토 및 기후조건의 차이를 간과하고 일방적으로 중국식 농업 방법을 최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농업개혁에 있어서 우리의 농업여건과 중국의 농업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을 결부시켜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서 농업을 고찰함으로써 농산물을 재화로 간주하는 농업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은 농업문제해결을 위한 탁견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경제력 향상,,,

박제가는 경세사상가답게 국방의 문제를 단지 전술 전략적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국가경제력의 향상, 민생의 안정, 기술의 전반적 개발을 토대로 국방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군사란 반드시 민생의 생활과 연관을 시켜놓은 후에야 비용을 들이지 않고 준비될 수 있는 것이다. 수레는 군사를 위한 것은 아니지만 수레를 사용하면 그것은 군수품을 나르는 운송수단이 되며, 벽돌은 군사를 위한 것이 아니지만 벽돌을 사용하면 만민을 위한 성곽을 만들 수 있고, 백공()의 기예와 목축 등의 일은 군사를 위한 것이 아니지만 삼군의 군마와 전투에 쓰는 기계를 갖추는데 사용된다. 기계가 갖추어지지 않고 예리하지 않으면 군사에 사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망대와 창과 방패 등 앉아서 치고 찌르는 것은 군무로서는 말단이요 나라안에 재능 있는 사람이 쓰기에 편리한 기계를 만드는 것이 군무의 근본이다.”

그는 이처럼 군무의 근본을 쓰기에 편리한 기계의 제작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곧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유용한 병기의 제작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생산력이 낙후되고 기술이 정체되어 군사장비도 뒤떨어지는 것은 중국의 기술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의 칼은 반드시 자를 수 있는데 우리의 칼은 쉽게 무디어져 남의 갑옷을 뚫지 못하고 반면 우리의 갑옷은 쉽게 뚫어지니, 이것은 야공()에 결함이 있는 것이다. 남의 담벽은 모두 견고하나 우리의 성곽은 완전하지 못하니, 이것은 벽돌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활은 비를 맞아도 상하지 않는데 우리의 활은 잠깐 따뜻한 기를 잃어도 쓸 수가 없으니, 이것은 활의 결함이다. 적은 말을 타고 수레를 타서 날카로움을 더하는데 우리 병사의 다리는 피로하고 또한 무거운 짐을 짊어지니 싸울 수 없다.”

그는 이렇게 우리 군사 장비의 낙후성을 지적한 후 군사상 급선무는 수레와 벽돌을 만들고 목축과 향의 재산을 권장하고 여러 가지 기예를 장려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율곡이 제시했던 바와 같이 병사에게 급료를 지급하고 군의 정예화를 기한다면 국방의 만전을 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군량미 30만석의 비축과 수레와 배를 통한 군량미의 운송 그리고 둔전을 두어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또한 말을 군마로 이용함에 있어서 우리의 말은 중국의 말과는 달리 말구종이 있어서 전시에 군마로 이용하기 불편하므로 후일 전사가 타야할 말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 중국의 훈련과 이용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박제가는 국방문제는 국가의 경제력의 향상과 민생의 안정 그리고 전반적 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해결해야 한다고 보고 있으며 단순한 전술전략적 차원으로만 보고 있지 않다. 그가 기술의 발전을 기하려면 우리 나라가 존명배청사상에서 벗어나 벽돌 굽는 방법에서부터 수레나 배 만드는 방법 등 모든 선진 기술을 청나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박제가의 경세사상은 17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도고상업에 활력을 제공하여 중상주의적 산업정책을 제시하였고, 사대부도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는 사민 평등사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농업생산물도 재화로 간주하는 등 매우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존명배청사상의 분위기에서도 과감하게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유연하고도 합리적 사상은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과격한 개혁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제시한 중상주의적 개혁안은 채제공의 신해통공정책에 의하여 좌절되었고 청의 문물을 도입해야한다는 북학사상은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뒤이은 신유사옥()으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서 좌절되었지만 그가 터 놓은 개혁의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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