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선은 1325년에 경상북도 영천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기의 관료. 왜구가 창궐하자 화약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중국 상인에게서 염초 제조법을 배워 화약과 화포를 만들었으며 1380년 진포에서 왜선을 섬멸하는 데 공을 세웠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이용해 무기를 만든 발명가이자 장수이다. 고려 최초의 화약 무기 제조 관청인 화통도감을 건의해 세웠으며, 자신이 개발한 화약 무기로 금강 하구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다.
본관은 영주(永州)이며, 1325년 광흥 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았으며 병법(兵法)을 즐겼다고 한다. 14세기에 고려는 왜구(倭寇)의 잦은 침입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오랜 전란으로 생활이 피폐해지면서 규슈[九州]와 쓰시마[對馬島] 등의 주민들은 고려와 중국 해안 지역에 대한 약탈에 나섰는데, 14세기 후반에는 그 규모도 커졌을 뿐 아니라 내륙 깊숙한 지역까지 침입하기도 했다. 왜구의 침입으로 고려는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컸고, 해안 지역에 살던 주민들 대부분이 피난하여 평야 지대의 농토가 황무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조세 운반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가 재정에도 타격이 컸다. 최무선은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화약(火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중국 강남 지역에서 온 상인들에게서 정보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이원(李元)이라는 상인에게서 화약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염초(焰硝) 제조법을 배워 화약 개발에 성공했다. 그 뒤 최무선은 여러 차례 조정에 건의해 1377년(우왕 3)에 화통도감(火都監) 설치를 이끌어냈으며, 제조(提調)로 임명되어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 군포(二將軍砲)·삼장 군포(三將軍砲)·육화 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화전(火箭)·철령 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 오룡 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 천화(觸天火) 등의 다양한 화기를 개발했다. 그리고 전함(戰艦)에 관해서도 연구해 군사와 장비를 많이 실을 수 있는 누선(樓船)도 개발했다. 이처럼 화약과 화기 제작을 주도한 최무선은 1380년(우왕 6) 왜구가 전라도 해안 지역을 침략해오자 부원수(副元帥)로 임명되어 직접 참전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화기를 사용해 진포(鎭浦)에서 왜구의 선박 500여 척을 격파했다. 1383년(우왕 9)에도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으며, 1389년(창왕 2)에는 박위(朴葳)와 함께 쓰시마[對馬島] 정벌에도 참여했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기를 사용하면서 고려는 왜구와의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화기를 해안 지역에 배치하면서 왜구의 침입에 대한 방어체제도 정비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그의 벼슬은 문하 부사(門下府事)에 이르렀으며, 조선 건국 이후에는 검교참찬(檢校參贊)으로 임명되었다. 최무선은 1395년(태조 4) 5월 8일(음력 4월 19일)에 죽었으며, 1401년(태종 1)에 의정부 우정승과 영성 부원군(永城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조선 왕조에서는 화약을 개발해 왜국 격퇴에 큰 공을 세운 최무선의 업적을 목화씨를 가져와 서민생활의 개선에 기여한 문익점(文益漸)과 함께 매우 높이 평가했다. 최무선은 백성의 해(害)를 제거하고, 문익점은 백성의 이(利)를 일으켜 백성의 삶에 커다란 혜택을 가져다준 인물들로 숭상되었다. 그래서 태종은 1401년(태종 1) 최무선과 문익점의 아들에게 특별히 벼슬을 내렸으며, 세조는 1456년(세조 2)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두 사람의 관향에 사당을 세워 업적을 기리게 했다.
최무선은 화약 제조법 등을 기록한 《화약 수련법(火藥修鍊法)》과 《화포 법(火砲法)》을 저술해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래서 아들인 최해산(崔海山)과 손자인 최 공손(崔功孫), 증손인 최식(崔湜) 등도 그에게서 화기 제조법을 이어받아 모두 벼슬을 하며 조선 전기 군기(軍器) 개발을 주도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87년(성종 18)에 최식이 증조부인 최무선의 책과 그림인 《화포 법》과 〈용 화포 섬적도(用火砲殲賊圖)〉를 왕에게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최무선의 저술은 기록에만 남아 있고,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아버지는 고려 시대에 벼슬아치들의 녹봉을 관리하고 전국에 운반되는 곡식을 책임지는 관청인 광흥창에서 일하던 관리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밝고 총명했던 최무선은 병법에 대해 익히는 것을 좋아했는데, 왜구들이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에 침입해 곡식을 약탈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일찍이 화약 연구에 뜻을 두었다.
최무선은 벼슬길에 나선 뒤에도 화약 연구에 골몰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화약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화약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재료 중 하나인 염초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고려 시대의 최고 무역 항구인 벽란도에서 중국 상인들을 만나 화약 재료를 구하려고 애썼고, 그러다 중국의 강남 지방에서 온 이원을 만나 염초 제조법을 알아냈다. 최무선은 즉시 화약을 만들기 위한 기관을 만들자고 나라에 건의했다.
1377년에 마침내 ‘화통도감’이라는 관청이 세워졌다. 그는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화약과 화포 등 화약 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대장군, 이장군, 화포, 신포, 화통 등의 총포는 물론이고 화전, 철령 전, 피령전 등의 발사 물이 만들어졌다. 질려포와 같은 폭탄, 주화 등의 로켓 화기, 신호탄 등 독창적인 무기도 개발되었다. 이 화약 무기들은 1380년에 금강 하구에 침입한 왜구들을 격파할 때 사용되었다. 고려군은 여러 가지 화약 무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가 크게 승리했다.
일찍이 병법에 대해 익히는 것을 좋아했던 최무선은 벼슬길에 오른 뒤에도 화약 연구에 몰두했다. 중국 상인 이원에게서 염초 제조법을 알아낸 뒤에는 조정에 건의해 화통도감을 세우고 화약 무기를 개발했다. 그가 개발한 화약 무기는 왜구를 물리치는 데 큰 효과를 발휘했다. 조선 세종 때 만들어진 신기전은 최무선과 최해산으로 이어진 화약 기술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고려후기 사회는 왜구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최무선(崔茂宣,1325~1395)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고, 이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물리친 위대한 과학자이자 무인이었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을 수입하여 고작해야 불꽃놀이에만 이용하곤 했던 시기에 선구자적인 안목과 노력으로 화약을 개발하여 국산화에 성공하였다. 고려는 그가 발명한 화약과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해마다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최무선 졸기(卒記)에 따르면, 젊은 시절 그가 항상 되뇌는 말이 있었다. “왜구를 막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태조실록] 1395년 4월 19일 그가 중국에 이어 고려인으로서 최초로 화약제조를 발명한 원동력이었다. 최무선은 고려인으로 태어났지만, 정작 [고려사]에는 기록이 별로 없다.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태조실록]에 실려 있는 졸기에서 찾을 수 있다. [태조실록]에 자세한 기록이 남겨진 이유는 고려 말에 왜구의 노략질을 막는데 최무선과 이성계가 함께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고령의 최무선이 세상을 뜨자, 태조 이성계는 최무선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사실을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록들을 모아 그의 일생을 재구성해 보면, 최무선은 1328년 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당에서 광흥 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주(永州)로, 시조는 최한(崔漢)이며 아마도 증조부인 최익겸 때에 이르러 영천에서 과거를 통해 개경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부친이 재직했던 광흥창은 고려시대 관리들의 녹봉을 맡아 관리한 관청이었다. 광흥창 사는 정 5품의 관직으로, 관직 서열상 그리 낮은 관직이 아니다. 특이한 것은 7 세손이었던 최무선 때부터 영성 공파(永城公派)라는 별도의 가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조선 초기에 그의 화약 발명의 공이 크게 인정받아 ‘영성공’으로 높임을 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영천 최 씨 영성 공파가 되었다.
최무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태조실록]에 천성이 밝고 방략(方略: 일을 꾀하고 해 나가는 방법과 계략)이 많으며 병법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출생년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시기는 고려왕조의 운명이 마치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때였다. 지배층은 권력을 잡기 위해 정쟁만 일삼았고 백성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게다가 왜구가 빈번히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지방에 출몰하여 많은 피해를 주고 있었다.
최무선은 어렸을 적부터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자랐다. 아버지가 광흥창사였던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부친의 직업으로 보아 개성 혹은 예성강 하구의 바닷가에 살면서 고려 사회의 위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광흥창 사는 예성강 하구를 통해 개성을 비롯한 전국으로 운반되는 곡식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당시 왜구는 예성강으로 통하는 서해안 여러 항구의 쌀과 곡식을 노리고 있었다.
최무선이 언제 어떻게 관리가 되었는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고려시대에도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나가긴 했지만, 조상의 음덕, 즉 음직(蔭職)을 통해 관직을 얻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떤 경로를 통해 관직에 나갔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병법에 관심이 많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군기시(軍器寺) 소속의 하급 관리부터 출발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훗날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만든 것으로 보아 병기 제작 관련 업무를 맡아왔을 가능성이 있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든 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집념의 결과였다. 당시 고려에는 화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는 항상 중국 강남에서 오는 상인이 있으면 곧장 달려가 만나보고 화약 만드는 법을 물었다고 한다. 정이오(鄭以吾)의 [화약고기(火藥庫記)]에 따르면, 최무선은 중국말을 잘했다고 하고 [세조실록]에는 그가 원나라에 가서 화포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고 전한다.
최무선이 화약을 만드는 일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중국에서 수입해 쓰면 되는 것이어서 귀찮게 국산으로 생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화약은 불꽃놀이와 같은 장난감에나 쓰는 것이지, 무기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무선은 달랐다. 그는 일찍이 화약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화약을 국산화하고, 화약을 이용한 무기도 개발하여 왜구 소탕에 사용하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최무선의 오랜 꿈이 이루어진 것은 1377년(우왕 3) 10월의 일이었다. 최무선의 건의로 화약 및 화기(火器)의 제조를 담당하는 화통도감(火筒都監)이 설치된 것이다. 화통도감의 설치는 그가 화약 만드는 기술을 완전히 습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무선은 원나라 출신의 염초장(焰硝匠) 이원(李元)에게서 화약 제조 비법을 배웠다.
[고려사]에 따르면 최무선은 이원과 같은 동네에 살아 친하게 지내며 은근히 화약 만드는 기술을 물어보고 자기 집 하인 몇 명을 시켜 화약제조법을 완전히 익힌 다음, 고려 정부에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화약 제조뿐만 아니라 화통도감의 설치 또한 그의 오랜 노력의 결과였다. 화약 제조 기술을 습득한 뒤에 최무선은 도당(都堂)에 건의하여 시험해 보려 했으나, 관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속이려 하는 인물로 비난할 뿐이었다.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여러 해 동안 지속적으로 화약 제조를 건의했고, 그의 정성에 감동한 왕이 화약국(火藥局)을 설치하게 하여 마침내 화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화통도감을 맡은 최무선은 곧장 화포 제작에 착수했다. 그는 곧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 군포(二將軍砲)·삼장 군포(三將軍砲)·육화 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화전(火箭)·철령 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蒺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 오룡 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 천화(觸天火) 등 다양한 화포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화약 무기 제조의 결과는 엄청났다. 1380년(우왕 8) 가을에 왜선(倭船)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는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하여 그를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였다. 최무선은 도원수 심덕부(沈德符)·상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화포를 배에 싣고 왜구가 들끓고 있는 진포로 갔다.
고려군에게 화약이 있는지 모르고 있던 왜구들이 배를 한 곳에 집결시키자 최무선은 그곳을 향해 화포를 발사하여 배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 잔당들이 육지로 올라오자 이번에는 병마 도원수였던 이성계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모두 섬멸시켰다. 진포 전투 이후로 왜구의 침략은 점차 사라졌고 백성들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화약 무기를 본 고려 사람들은 깜짝 놀랐어요. 그 화약 무기는 중국 원나라에서 들어온 무기로, 총통으로 발사되는 화살이었어요. 불화살은 빠르고 멀리 날아가 터졌어요. 고려 사람들은 화약을 만들어 강력한 국가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건 쉽지 않았다.
중국에서 화약 제조 방법을 극비로 했기 때문이다. 1373년 고려 정부는 중국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제발 화약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지금 우리 고려는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화약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명나라의 왕은 화약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염초 50근과 유황 10만 근을 줄 테니 이만 고려로 돌아가시오.” 고려 사신들은 화약 만드는 방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약간의 화약을 얻을 수는 있었어요. 사신들은 화약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더욱 절실히 화약의 필요성을 느꼈다. 당시 최무선은 화약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다. 영천 관흥 창사 동순의 아들이었던 최무선은 오직 화약만이 나라를 강력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손으로 직접 화약을 만들어 보겠어!” 최무선은 이렇게 결심하고 화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갖가지 재료를 모아 말리고 갈아서 불에 태워 보았다. 하지만 불꽃은 잘 붙지도 않을 뿐더러 화약처럼 펑 터지지도 않았다. 최무선은 배가 오가는 항구를 자주 드나들며 중국인들과 만났다. 그러다 최무선은 중국인 이원을 만나 화약을 만드는 방법을 들을 수 있었다. 최무선은 화약을 만드는 방법을 책으로 썼다. 그는 《화포법》과 《화약 수련법》을 써서 아들 최해산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는 최무선의 화약 제조술을 알 수는 없다. 이 책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1635년에 쓴 《신전 자취 염초 방》이라는 책은 남아 있는데, 이 책에 염초를 만드는 제조법이 실려 있어 최무선이 어떻게 화약을 만들었는지 엿볼 수 있답니다.
화약 무기를 만든 최무선은 화통도감을 설치하자고 조정에 건의하였고,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1377년부터는 화통도감에서 화약 무기를 제조했다. 이때 만든 화기는 대장군, 이장군, 화포, 화통, 화전, 철탄자, 유화, 촉 천화 등 총 18가지다. 최무선은 1380년 왜구가 쳐들어오자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나가 왜구를 격파했어요. 화약을 만들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구했던 최무선은 조선 건국 초기인 1395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최무선는 자신의 집 안쪽에 실험실을 만들었었다. 그러고는 염초를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연구하고 실험했다. 그러나 염초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최무선은 20년 동안 수없는 실패 끝에 결국 염초를 만들어 냈다.
최무선이 그리도 열심히 만들어 낸 화통도감은 고려 창왕 때(재위 기간 1388-1389) 없어지고, 그 기구는 군기 시(軍器寺)에 흡수되었다. 화통도감이 사라진 이유는 불분명하다. 왜구를 성공적으로 소탕한 뒤 더 이상 필요 없어져 버린 것인지, 아니면 고령이 되어 더 이상 공직 생활을 할 수 없던 최무선을 계승할 후계자가 없어서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최무선은 1395년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아들 하나만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 1380-1443)은 바로 아버지가 진포 싸움에서 왜구를 물리친 그 해, 세상에 태어났다. 최무선이 죽었을 때 최해산의 나이는 불과 15세였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최무선은 아내 이 씨에게 ‘아들이 장성하면 이 책을 주라’면서 화약제조의 비법이 적힌 책을 남겼다고 한다.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최해산은 화약 제조법을 습득했고, 이후 1401년(태종 1) 군기 시에 특채되어 화포 개발 실험에 주동적 역할을 했다. 야사에 따르면 최해산은 장남이 아니고 차남인데, 장남은 화약 실험 중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설도 전한다.
우리나라 무기의 역사를 바꿔 놓은 최무선이었지만, 아쉽게도 [고려사] ‘열전(列傳)’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와 함께 진포전투에 참여한 나세 장군만 [고려사] 열전에 이름이 올랐다. 나 세는 원나라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해 홍건적과 왜적을 물리친 공을 남긴 장군이다. 최무선은 [고려사] 나 세전에 살짝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1380년에 금강 하구(지금의 전라북도 옥구군)에서 벌어진 진포 대첩은 최무선이 만든 첨단 화약 무기가 빛을 발한 전투였다. 최무선은 자신이 만든 화약 무기를 실은 전함을 이끌고 직접 전투에 나갔는데, 그는 파괴력이 뛰어난 화포 등을 이용해 왜구가 이끌고 온 군함을 모두 격침시켰다. 살아남은 왜구들은 육지로 도망갔는데,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이들까지 모두 섬멸해 버렸다.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과 무기는 다행히 사라지지 않고 그의 아들 최해산을 통해 조선왕조의 중요한 국방기술로 전수되었다. 세종대에 보다 향상된 화약제조법이 나오게 된 것 또한 최무선 부자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진왜란 때 육지에서는 조총을 앞세운 왜군이 조선군을 압도했지만, 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보다 화포 기술에서 앞서 있었던 것도 최무선의 화약제조 덕분이었다. 그의 화약 기술은 아들인 최해산으로 이어졌고, 최해산의 화약 기술은 다시 조선 화약 연구로 이어졌다.
참조항목최무선 [崔茂宣] (두산백과) 최무선 - 고려 말기의 장수이자 화약 무기를 발명한 과학자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2015. ) 최무선 [崔茂宣] - 신무기로 왜구를 섬멸한 화약의 아버지 (인물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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