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음식.
원시 시대
약 60만 년 전부터 추정되는 평양의 검은모루 유적과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충북 청원군 두루봉, 강원도 명주군 심곡리 등의 전기 구석기 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어 당시의 생활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 밖에 중기, 후기 구석기 유적이 도처에서 발굴되고 있다. 구석기인은 동굴에서 살았고 돌을 두들겨 주먹도끼, 찍개, 긁개, 돌망치, 돌칼들을 만들어 사냥이나 음식을 조리하는 데 사용하였다. 당시의 인류는 불을 이용할 줄 알았고 음식을 불에 구워 먹을 줄 알았다.
구석기인이 한반도에서 사라지고 기원전 5000년경에 고(古)아시아족의 한 부류가 한반도에 빗살무늬 토기를 가지고 들어와 신석기 문화를 이루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 후기에 이르러 간석기를 갖고 농경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강원도 오산리, 함북 서포항 등의 유적지에서 괭이, 뒤지개, 돌보습, 곰배 모양의 농기구와 피, 조 등의 유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말기에는 농경이 상당히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도토리를 비롯한 나무 열매나 뿌리 등의 야생 식물을 채집하여 먹었고 개와 돼지, 물소 뼈 등도 발굴되어 목축 생활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돌도끼, 화살촉, 돌창 등을 이용하여 사냥을 하였고 낚싯바늘, 작살, 그물추 등으로 물고기나 조개 등을 어획하였다.
신석기인이 살던 움집에는 화덕 터와 저장 혈(穴)이 남아 있는데 음식을 불에 조리하였고, 불은 조리도 하지만 추위를 막고 어둠을 밝혀 주는 역할도 하였으리라 추정한다. 토기가 생겨나면서 굽는 조리법에서 삶는 조리법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고기나 조개를 삶아 연하게 해서 먹었고 국물도 맛있게 먹을 줄 알았다. 날로 먹기 어려운 것은 아린 맛이나 떫은 맛을 없애고 먹었다.
어류나 육류는 칼로 썰어 날로 먹기도 하고 불에 굽거나 연기에 그을리는 조리법도 있었다.
상고 시대
빗살무늬 토기인에 이어 청동기를 가진 북방 유목민이 이 땅에 들어와 선(先)주민들과 어울려서 우리 민족의 조상인 맥족(貊族)을 이루었고 이들이 세운 나라가 고조선이다.
이들은 청동기로 무기나 제기를 만들었고, 돌이나 나무로 농구를 만들어 농경을 크게 발달시켰으며, 민무늬 토기를 사용하였다. 철기 시대에는 철제 농기구가 널리 퍼졌고 골각제(骨角製) 농기구도 생겼다.
우리나라에서 벼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00년경부터이며 이외에 조, 기장, 보리, 콩, 수수, 팥 등의 곡물을 재배하였다. 채소로 박, 아욱, 외, 순무, 무, 토란 등과 단군 신화에 나오는 산마늘 등이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과일로는 밤, 대추, 복숭아, 오얏, 오디, 잣 등이 문헌에 나온다.
북방에서는 사냥이 활발하여 여우, 너구리, 흰곰, 담비, 멧돼지, 고라니, 사슴, 노루 등을 잡았고 부여에서는 벼슬 이름으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견사(犬使) 등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그들의 생활에서 가축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알 수 있다.
중국 진(晉)나라의 『수신기(搜神記)』에 “맥적(貊炙)이란 다른 민족의 먹이인데도 태시(太時) 이래로 중국 사람이 이것을 즐겨, 귀인이나 귀족의 잔치에 반드시 내놓으니 이것은 그들이 이 땅을 침범할 징조이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의 맥적은 고기를 미리 장(醬)과 마늘로 조미하여 직화에 굽는 맥족의 음식으로 당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우리 음식이다. 이 때 이미 육류를 능숙하게 조리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 불고기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농경은 더욱 발달하였고, 가을철에는 추수를 감사하는 뜻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영고(迎鼓), 동맹(東盟), 무천(舞天) 등의 제천 의식을 행했는데 이때는 주야음주가무(晝夜飮酒歌舞 :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춤춘다)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즈음에는 곡물을 쪄서 밥과 떡을 만들고 술 빚는 기술이 뛰어나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경남 웅천의 조개무지에서 시루가 출토되었고, 고구려 안악 고분 벽화에도 시루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곡물을 찌는 조리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은 야생의 콩을 처음으로 재배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으로 장을 담그는 법을 개발하였다.
콩의 원산지는 지금의 만주 지역, 즉 고구려의 땅이다.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
삼국 시대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하던 시대로 4세기경 국가 체제를 형성하였다.
발달한 철기 문화를 받아들여 생산 기술이 크게 발달하였고, 중국 문화와 불교 문화가 들어왔으며, 7세기경에 삼국이 통일되었다.
농경에 철제 낫을 썼고 소를 이용하여 땅을 갈았으며 수리의 정비로 농산물 생산이 늘어나면서 강력한 국가 체제가 성립되었다.
벼농사가 크게 보급되었으며 고구려는 조, 신라는 보리, 백제는 벼를 많이 생산했고 기장, 수수, 밀, 보리, 콩, 팥, 녹두 등도 재배하였다. 쌀을 비롯한 곡물로는 밥과 죽, 떡을 만들었다. 채소로는 상추가 중국에 알려졌고, 문헌에는 아욱, 순무, 배추, 무, 동아, 시금치, 쑥갓, 근대, 토란, 가지, 외, 박, 마, 버섯 등이 나온다.
과일로는 밤, 잣, 감귤, 유자, 개암, 복숭아, 오얏, 배, 살구 등이 문헌이나 유물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축으로 소, 돼지, 닭, 염소, 오리 등을 길렀고 계란을 먹었으며,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사람이 일본의 천왕에게 우유를 바친 기록이 남아 있다.
3~4세기에는 배를 만드는 기술이 향상되어 큰 배를 만들어 먼 바다까지 나아가서 고기잡이를 할 수 있게 되어 다양한 물고기와 해초류를 먹기 시작했다.
식품의 조리법과 가공법도 점차 발달하여 술, 장, 김치, 젓갈 등을 만들어 오래 저장할 수 있었으며 엿, 꿀, 기름을 써서 음식 맛을 내게 됨으로써 식생활이 다양화하였다. 살생과 육식을 금하는 불교가 들어와서 식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살생 금지령이 내렸고, 사냥과 고기잡이 도구를 불태워 없애기까지 하였다.
신라의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세속오계(世俗五戒)의 규범에서 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 하여 살생을 무조건 금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가려서 하라고 일렀다. 신라에서는 어느 정도 육식을 허용한 셈이다.
우리 조상의 식생활은 삼국 시대 무렵에 곡물로 만든 주식과 채소, 육류, 어패류로 만든 찬물을 부식으로 하는 주식과 부식의 구조가 확립되었다. 왕권 사회여서 지배 계급과 서민의 생활 정도에도 차이가 많았고 식생활에서도 빈부의 차이가 많이 났다. 지배 계급은 불교와 함께 들어온 음차(飮茶)의 풍습이 생겼고 다기(茶器)와 식기가 발달하였다. 민무늬 토기에 이어 가마에 굽는 김해식 토기와 신라 토기가 나타났다.
용도에 따라 종지, 보시기, 사발, 바리, 깊은 바리, 접시, 잔, 병 등의 원형이 나타나고 굽다리 그릇도 많이 생겨났다. 숟가락, 젓가락, 독, 항아리, 절구, 맷돌, 식칼, 국자, 솥, 시루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조리 기술이 상당히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콩으로 가공한 두장(豆醬)으로 시(豉)와 말장(末醬)을 만들었는데, ‘시’는 콩을 발효시켜 소금을 섞은 것으로 일종의 낱알 메주이고, ‘말장’은 삶은 콩을 찧어서 메주를 만든 것으로 중국과 일본에 전파되어 우리와 함께 콩으로 만든 장을 먹는 두장(豆醬) 문화권을 이루게 되었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 전반기에는 토지 제도를 재편성하고, 세를 줄이고, 제방 수리와 개간 사업, 농서 발행 등으로 농사를 권장하여 농산물 생산이 늘어났고 곡물을 비축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주식으로 쌀을 먹었지만 산촌에는 보리와 피 등을 섞은 잡곡밥이 더 일반적이었다.
찹쌀로 만든 약밥에 대한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 『목은집(牧隱集)』에 나오고, 팥죽과 두부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국수와 떡, 약과, 다식 등 다양한 음식이 생겼고 간장(진간장), 된장, 술, 김치 등의 저장 음식도 더욱 늘어났으며 두부와 콩나물 등 식품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때로 재앙이 들 경우 도토리 등 각종 야생 식물을 찾아 먹은 기록도 있다.
신라 시대에 이어서 관설 시장이 생기고 화폐가 통용되어 식품 매매가 이루어졌다.
개성에는 주점(酒店)이 생기고,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객관(客館)도 생겨났다.
절에서 술, 차, 국수 등을 만들고 소금, 기름, 꿀 등도 판매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병폐도 심하였다.
고려 시대의 축산물로는 쇠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닭고기, 개고기 등이 있고 때로 말고기를 먹은 기록도 있다.
수산물로는 미꾸라지, 전복, 방합, 진주조개, 왕새우, 문합, 게, 굴, 소라들과 거북, 각종 해초를 먹었다.
불교가 더욱 융성해지면서 육식 습관이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
송나라의 사신이 고려를 다녀가서 쓴 『고려도경(高麗圖經)』(1123년)에는 “고려에서는 중국 사신을 대접하기 위하여 양과 돼지를 도살하는데 네 다리를 묶고 내던진다.
살아나면 몽둥이로 때려죽이니 뱃속의 창자가 다 흘러나오고, 이것으로 만든 고기 음식은 고약한 냄새가 나서 도저히 먹을 수 없다”고 씌어 있다.
이처럼 도살이 서투르니 육류 조리법도 변변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육류의 조리법은 쇠퇴한 반면 식물성 식품 조리법은 더욱 발달하였다.
기름과 향신료를 많이 이용하였고 사찰 음식도 더욱 발달하였다.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헌다(獻茶)의 예와 음차 습관이 널리 성행하게 되었고 다기(茶器)도 매우 발달하여 세계에 자랑하는 고려 청자도 만들어 냈다.
고려 시대 중기 이후에는 승려보다 무관의 세력이 강해져 다시 육식을 즐기게 되었다.
몽골족이 침입하고 원나라와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설탕, 후추, 포도주 등이 교역품으로 들어왔다.
후기에는 몽골의 지배를 받아서 동물의 도살법과 여러 가지 육식의 조리법도 배우게 되니 식생활도 많이 바뀌었다.
원나라 초기에 나온 『거가필용(居家必用)』에는 고기의 조리법이 많이 나오는데 조선 시대의 『산림경제(山林經濟)』(1715년)에 나오는 육류 음식의 대부분이 이 책을 참조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육류 조리법이 원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고기를 물에 넣어 끓이는 곰탕이나 편육, 순대 등이 중국 책에는 양고기로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쇠고기로 바뀌었을 뿐 조리법은 거의 같다. 지금의 곰탕이나 설렁탕의 원조인 공탕(空湯)과 찐빵의 일종인 상화(霜花)와 소주도 이 때 들어왔다. 당시 몽골군이 주둔한 개성, 안동, 제주 등이 지금까지도 소주의 명산지로 꼽힌다.
고려 시대의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은 경제·문화의 중심지이고 특히 왕조의 영향으로 화려하고 정성이 많이 가는 음식이 많아 지금도 음식 솜씨가 빼어난 곳으로 꼽힌다.
고려 시대의 문헌에는 두부, 김치, 장아찌, 술, 차, 유밀과, 다식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상류 계층의 식생활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는 식품과 조미료가 다양해져서 ‘한국 음식 조리의 완성기’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 초기에는 곡물 생산, 사대주의, 숭유배불(崇儒背佛)을 삼대 국시(國是)로 삼았다.
권농정책으로 토지 제도를 정비하고 개간 사업 장려, 영농 기술의 개발, 농서 발간에 힘썼다. 모내기 법이 보급되고 보리와 벼를 이모작하였으며, 원예 작물의 재배에도 힘썼다.
영농 기술 보급을 위하여 『농사직설(農事直說)』이 나오고 『금양잡록(衿陽雜錄)』, 『사시찬요(四時簒要)』, 『농사집성(農事集成)』 등의 농서를 펴냈다.
조선 시대 전반기의 식생활은 고려 시대와 큰 차이가 없었으나 16세기 이후에는 숭유주의의 사림파가 양반 문벌 사회를 형성하여 식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조선 시대는 철저한 계급 사회여서 빈부의 차이가 격심하여 식생활에도 심한 차이가 생겨났다.
농민은 흉년에는 굶기가 예사였고, 인위적인 수탈도 심하여 만성적인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니 산야의 풀이나 열매, 나무 껍질 등 구황 식물을 찾아내기에 이르렀고, 『구황촬요(救荒撮要)』, 『신간 구황촬요』 등의 책도 나왔다.
유교가 조선 시대 이후 우리의 식생활에 끼친 영향은 아주 크다.
첫째는 차를 마시는 습관이 쇠퇴하였다.
불교에서는 헌다(獻茶)를 하고 차를 즐겨 마시지만 유교에서는 일부러 차밭을 방치하여 차의 생산이 거의 중단될 지경이었다.
일부 남도 지방의 스님이나 학자가 음차의 풍류를 꾸준히 즐기면서 차 생산을 면면히 이어왔고, 특히 다도의 전통은 초의선사나 정약용의 역할이 아주 크다.
서민의 음차 습관은 쇠퇴하였고 반면에 화채와 한약재를 달인 탕차류 그리고 주류 등이 기호 음료를 대신하게 되었다.
둘째로 노인 영양학이 발전하였다.
유교에서는 효행(孝行)을 인간의 근본 도덕이라 하였으므로 노인 영양학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의서나 가정백과 전서에도 ‘양로문(養老門)’을 따로 다루게 되었다.
셋째는 수저 문화의 전통을 남겼다.
동양의 삼국 중에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는 전통이 내려오고 있는데 이는 숭유주의자들이 공자 시대에 숟가락을 사용하였음을 끝까지 고집하여 숟가락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넷째로 개고기와 육회를 먹는 풍습이다. 중국에도 한나라 때에는 개 도살 전문직이 있을 정도로 개고기를 많이 먹었지만 명나라·청나라 이후로는 거의 먹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이후 조선 시대에도 계속 개고기로 만든 음식이 책에 많이 나오며 생선이나 고기를 가리지 않고 날것으로 먹는다. 이외에 철저한 가부장제 사회를 이루어 외상 차림으로 대접하는 법을 고수하였고, 상물림의 풍습이 생겼다. 의례를 중요시하여 주자(朱子)가 가르친 가례(家禮)를 모범으로 삼아 혼례, 상례, 제례의 규범을 엄격하게 지켰다.
조선 시대 중기 이후에 들어와서 식생활에 큰 변화가 왔다. 남방에서 고추, 감자, 고구마, 호박, 옥수수, 땅콩 등이 들어온 것이다. 이들 식품의 원산지는 거의가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그중 고추의 전래는 우리 음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지봉유설(芝峯類說)』(1613년)에 “고추는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니 왜개자(倭芥子)라 하는데 요즘 간혹 재배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고추가 우리 음식에 널리 쓰인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고추는 여러 음식에 양념으로 쓰여 매운맛을 내게 되었고, 고추장과 김치에도 쓰이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한국 음식의 특징으로 꼽히는 매운맛과 붉은 빛깔을 내는 역할을 하였다.
채소의 발효 식품인 김치에 들어가고 또한 어패류의 젓갈도 한데 넣는 지혜 덕분에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자랑하는, 영양적으로 훌륭하면서 독특한 맛을 내는 발효 식품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는 전국에서 진상하는 다양하고 진귀한 재료로 고도의 조리 기술을 지닌 주방 상궁과 숙수(熟手)들의 솜씨로 한국 음식의 정수를 이루어 냈다.
조선 시대 말기는 한국 음식의 절정기로 한국 음식이 가장 발달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후기에는 미대륙 원산의 식품이 전래되어 음식이 더욱 다양해지고 조리법도 발달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한문 음식책 『수운잡방(需雲雜方)』(1550년대)과 가장 오래된 한글 음식책인 『음식디미방』(1670년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의 다양한 조리법을 잘 알 수 있다.
주식과 부식을 분리하고 신분이나 형편에 따라 3첩에서 12첩의 반상차림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일상식으로 반상, 죽상, 면상, 주안상, 다과상을 나누어 차리는 형식과 사람이 일생 겪는 통과 의례 때의 상차림으로 삼신상부터 돌, 혼례, 상례, 제례 때의 의례적인 상차림 형식도 갖추게 되었다.
명절이나 계절에 따라 시식(時食)이나 절식(節食)을 즐기는 풍류도 있었으며, 지방에 따라 독특한 산물을 바탕으로 향토 음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한양에는 식품을 거래하는 시장과 육의전이 생겨났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곳곳에 난전이 생겼는데 식품과 그릇을 전문화하여 싸전, 잡곡전, 생선전, 유기전, 염전, 시저(匙著)전, 과일전, 닭전, 육전, 좌반전, 젓갈전, 꿩전 등으로 아주 다채롭다.
개화기
조선 시대 말기(1900년대)에 이르러 중국, 일본, 서양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때를 개화기라고 한다.
외국 문물이 들어오면서 식생활에도 영향을 끼쳐 우리나라 음식 문화의 고유성을 차츰 잃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는 곡물이 일본에 유출되면서 우리의 식생활 수준이 아주 나빠졌다.
조선 왕조가 망하면서부터는 궁중 음식을 만들던 이들이 고급 요정을 차리면서 일반인도 궁중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서양 음식은 우리나라에 찾아온 서양 사람들이 소개하였고, 특히 궁중에는 러시아의 공사 부인과 손탁이 고종에게 만들어 올리면서 전파되었다.
1920년에 조선호텔이 생겼고, 시중에 서양 요리집이 생겨났으며 ‘양탕국’이라 하여 커피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철도 식당도 생겨났다.
중국 음식은 임오군란 이후에 들어온 중국 군인과 민간인이 들여왔는데 이들은 대부분 호떡집을 하거나 채소 재배를 하여 생활을 영위하였다.
호떡, 만두, 교자 등을 파는 중국집이 1900년대 초기에 서울 태평로, 명동, 소공동 등에 많았고, 중국 국수와 고급 요리를 파는 중국집도 생겨났다.
일본 음식은 식민지 시대에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우동, 단팥죽, 어묵, 단무지, 초밥, 청주 등과 일본 요리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국 고유의 전통적 요리로 한식(韓食)이라고도 한다.
한자어 ‘요리’는 ‘저울로 달다’ ‘가사(家事)를 정리하다’ ‘일을 알맞게 처리하다’라는 뜻이며, 한국에서 음식 또는 음식을 만드는 일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된 것은 1870년 무렵부터이다.
한국어에서는 예전부터 ‘음식’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여 왔다.
고조선 이후 대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농작물 개발로 식품 종류가 많아지자 조리법이 다양해졌다.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서는 일상 식생활에서 주식과 부식을 명확하게 구분하였다.
한 나라의 식생활과 요리는 풍토와 역사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전한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는 동해에서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여 어장(漁場)이 발달하였고, 섬이 많고 수심이 낮은 남해 · 서해에서 해산물이 많이 난다.
반도의 북부는 한란차가 큰 대륙성아한대기후이나, 남부는 장마가 있고 벼농사에 적합한 온대기후이므로 양질의 쌀이 생산된다.
곡물 · 수산물요리와 함께 육류요리가 풍부한 것은 대륙의 식생활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육식은 삼국시대 이전에도 있었지만,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전래 · 보급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중기에 걸쳐 정진식(精進食)이 권장되어 식생활에서 육류조리법이 쇠퇴하였다.
그 뒤 고려시대에 북방의 육식민족인 거란의 침입과 100년이 넘는 원(元)의 지배 아래 육식이 널리 보급되어 오늘날의 육류요리로 발전되었다.
밥을 주식으로, 여러 가지 반찬을 부식으로 하는 일상의 식사형태는 고려시대 말기에서 조선시대 초기에 걸쳐 확립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한국요리는 조선시대 왕가나 양반의 식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궁중요리와 각 지방 특산물을 재료로 그 지방에 전하는 고유 조리법으로 만든 향토요리가 어우러져 성립되었다. 이는 조선시대 중기부터 과학 · 문화가 급속히 발전하고, 이것이 음식 재료의 품종개량 및 조리법 발전으로 이어져 식생활문화를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조선중기에는 숭유배불(崇儒排佛)정책이 더욱 강화되어 고려시대에 불교와 함께 융성하였던 다도(茶道)가 쇠퇴하였다.
한국 음식은 크게 주식(主食)과 찬품(饌品), 후식(後食)으로 나눌 수 있다.
주식에는 밥, 죽, 국수 등이 있고, 찬품에는 국, 찌개, 전골, 볶음, 찜, 선, 생채, 나물, 조림, 초, 전유어, 구이, 적, 회, 쌈, 편육, 족편, 튀각, 부각, 포, 장아찌, 김치, 젓갈 등이 있다. 후식은 크게 떡, 과자, 생과의 병과류와 차, 음료 등의 음청류로 나뉜다. 여기에서는 주식류와 찬품류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다.
뉴욕의 어떤 음식평론가는 한식을 두고 “이렇게 훌륭한 음식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불가사의하다.”고 했습니다.
한식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발전해왔기 때문에 그 문화적 총량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 음식은 시대를 달리하면서 계속해서 변화해 왔습니다.
전통 한식으로 생각되는 음식들 가운데에는 근세에 만들어진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한식의 대표 주자처럼 되어 있는 요즘 먹는 배추김치는 만들어진 지 100여 년밖에 되지 않은 새로운 음식입니다.
불고기나 삼겹살은 1960년대 이후에 생겼으니 역사가 더 짧습니다.
한식은 많은 특징들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된장이나 김치와 같은 발효음식이 특히 발전해 있는 것은 우선적으로 꼽히는 특징입니다.
발효음식은 영양이나 건강 면에서 매우 뛰어난 효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더 각광받을 음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한식은 음식을 섞어서 비비고 삶고 하는 것이 유달리 많은 음식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국제적인 음식에는 비빔밥이 있고, 서민적인 음식으로는 설렁탕이나 각종 매운탕들이 있습니다.
아울러 육식보다는 채식을 선호하는 것도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 고추를 사용해 매운맛을 즐기는 것도 그 특징에서 제외할 수 없습니다.
고추는 잘 알려진 것처럼 임란 이후에 일본에서 수입되었고, 그 이후 한국 음식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국음식의 대가였던 강인희 교수 같은 분은 이 이후에 한국 음식이 완성되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매일 먹는 식탁을 보십시오.
고추가 들어간 반찬이 항상 반 이상은 될 겁니다.
우리 음식의 특징을 보려면 이와 같이 한이 없습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니 더 복잡합니다.
여간 해서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음식의 가장 큰 특징은 밥을 먹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을 했나요? 그러나 한식은 모든 것이 밥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비유를 든다면 밥은 왕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국은 왕비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장류나 김치는 영의정 같은 조정 대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반찬들은 그 밑에 있는 관리의 역할을 한다고 해야겠죠.
한식은 여기에 가장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한식의 상차림은 보통 ‘공간전개형’이라고 합니다.
한 상에 다 차려놓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서양식이나 중국식은 ‘시간전개형’입니다.
이 두 가지 형식이 어떻게 다른지 금세 아시겠죠? 양식은 각각의 음식이 시간을 두고 한 접시씩 나오지만 한식은 한꺼번에 차려놓고 먹는다는 것이지요.
한식에서 모든 반찬이 다 나열되는 것은 밥과 같이 먹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한 상을 차려놓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수저로 음식을 먹습니다.
여기에 한식의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즉 겸상을 하는 것입니다.
상 하나를 두고 여러 사람이 반찬을 이런 식으로 공유하는 것은 다른 나라 음식 전통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물론 한국에도 외상 혹은 독상의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식류
밥
주식은 주로 쌀로 지은 흰밥이고 보리, 조, 수수, 콩, 팥 등을 섞어 지은 잡곡밥이 있다. 나물과 고기를 얹어 비벼 먹는 비빔밥 등이 있다.
밥은, 곡물과 물을 함께 넣고 끓여서 수분을 흡수시켜 익힌 후에 충분히 뜸을 들여서 완전히 호화시킨 것이다.
별식으로 채소류, 어패류, 육류 등을 넣어 짓기도 하며, 비빔밥은 밥 위에 나물과 고기를 얹어서 비벼 먹는 밥이다.
죽, 미음, 응이
죽, 미음, 응이는 모두 곡물로 만드는 유동식 음식으로 곡물 외에 채소류, 육류, 어패류 등을 넣어 끓이기도 한다.
죽은 곡물을 알곡으로 또는 갈아서 물을 넣고 끓여 완전히 호화시킨 것이고, 미음은 죽과는 달리 곡물을 알곡째 푹 고아서 체에 거른 것이다.
응이는 곡물의 전분을 물에 풀어서 끓인 것으로 훌훌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묽다.
죽에다 곡물 이외에 채소류, 육류, 어패류 등을 넣고 끓이기도 한다.
곡물에 열매를 넣은 죽으로 잣죽, 깨죽, 호두죽, 녹두죽, 콩죽 등이 있고, 채소를 넣은 죽으로는 늙은호박죽, 애호박죽, 표고죽, 아욱죽 등이 있고, 어패류죽으로는 전복죽, 어죽, 조개죽, 피문어죽 등이 있으며, 육류죽으로는 장국죽, 쇠고기죽, 닭고기죽 등이 있다.
국수
국수는 조석의 식사 때보다는 잔치나 손님 접대할 때 주식으로 차리고, 평상시에는 간단한 점심 식사용으로 많이 먹는다.
국수에는 곡물이나 전분의 재료에 따라 밀국수, 메밀국수, 녹말국수, 강량국수, 칡국수 등이 있다.
따뜻한 국물에 먹는 온면과 찬 육수나 동치미 국물에 먹는 냉면, 장국에 말지 않는 비빔국수로 나눌 수 있다.
온면의 하나인 국수장국은 예전에는 꿩고기를 쓰기도 하였으나 대개는 쇠고기 양지머리나 사골 등을 삶아 쓰고, 칼국수에는 닭 삶은 국물을 쓴다.
냉면은 메밀가루에 밀가루나 전분을 섞어 반죽하여 국수틀에 넣어 눌러 빼고, 칼국수는 밀가루나 메밀가루를 반죽하여 얇게 밀어 칼로 썬다.
여름철에는 콩국에 밀국수를 말아먹는 콩국수도 즐겨 먹는다.
국수; 조석(朝夕)의 식사 때보다는 잔치나 손님 접대할 때 주식으로 차리고, 평상시에는 간단한 점심 식사용으로 많이 먹는다.
만두는 껍질의 재료와 넣는 소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대개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밀어서 껍질을 만드는데, 메밀가루로 빚는 메밀만두도 있다.
궁중의 만두에는 소를 넣어 주름을 잡지 않고 반달형으로 빚은 병시와 해삼 모양으로 빚은 규아상이 있다.
편수는 네모진 껍질에 호박, 숙주, 쇠고기 등으로 만든 소를 넣고 네모지게 빚는다.
평안도를 비롯한 북쪽 지방에서는 배추김치, 돼지고기, 두부 등으로 소를 만들어 넣고, 둥근 껍질에 소를 넣어 주름을 잡거나 둥근 모양으로 크게 빚어서 육수에 넣어 끓인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가정에서나 정월 초하루에는 떡국을 마련하여 조상께 차례를 지내고, 새해 아침의 첫 식사로 삼아 왔다.
떡국은 멥쌀로 흰 가래떡을 만들어 어슷한 타원형으로 얇게 썰어 육수에 넣어 끓인다.
북쪽 지방에서는 만두를 즐기고, 남쪽에서는 떡국을 즐겨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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