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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

<蘇塗>의 정화(精華):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

비류선제(沸流仙帝)의 두 왕후(王后)가 지닌 미스테리(mystery)이 벽라후(碧蘿后)의 가계(家系)가 매우 특수한 행인국(荇人國)인 것처럼 만후(曼后)의 가계(家系)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이 두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왕후(王后)의 관계를 사서(史書)를 읽는 사람들이 선뜻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벽라후(碧蘿后)는 비류왕보다 11살의 연상(年上)이시고, 만후(曼后)는 4살 연하(年下)이십니다.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왕후(王后)이신 벽라후(碧蘿后)는 “행인국(荇人國)의 딸로써 ‘배달화백’이 어떤 예술적 연극-굿에 의해서 잘 이루어지는가?” 또 “인간이 왜 서로 고집을 피우면서 싸우고, 죽는가?” 하는 갈등을 어릴때 아버지이신 조천왕(朝天王)의 6년동안의 도망자 생활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정신적으로도 깊이가 선제(仙帝)의 후(后)에 걸맞게 깊었으며,  아주 날카로운 국제정치를 통찰하는 지혜 뿐만이 아니라,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美貌)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이분이 비류왕(沸流王)과 결혼하셔서 세평(世評)으로 절세미인의 평가를 받는 딸 셋을 낳으시고, 산동백제의 소도(蘇塗)인 미추홀(彌鄒忽) 개척에 진력(盡力)하시다가 젊은 34세에 운명하신 것으로 남당유고(南堂遺稿)의 비류왕(沸流王) 편에서는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벽라후(碧蘿后)가 돌아가시기 2년 전(前)에 비류선제(沸流仙帝)와 결혼한 만후(曼后) 이런  벽라후(碧蘿后)이셨기에,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는 무척 사랑하시어, 상처(喪妻)를 하자 재혼(再婚)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으로 비류왕(沸流王) 편에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이 벽라후(碧蘿后)말고 또다른 부인(婦人)이 바로 만(曼) 공주이신데, 이 사이에 낳은 양인(昜人)때에 이르러 엄사왕(淹氵虒王)으로써 고구리(高句麗)에서 봉왕(封王)을 받으신 것입니다.

흥미있는 것은 이 벽라후(碧蘿后)의 가계(家系)가 매우 특수한 행인국(荇人國)인 것처럼 만후(曼后)의 가계(家系)역시 그러하기 때문에,  이 두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왕후(王后)의 관계를 사서(史書)를 읽는 사람들이 선뜻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일단, 나중에 상세하게 계산하는 과정이 있습니다만,  벽라후(碧蘿后)는 비류왕보다 11살의 연상(年上)이시고, 만후(曼后)는 4살 연하(年下)이십니다. 그런데, 벽라후(碧蘿后)께서 훙(薨)하시기 -돌아가심을 뜻함- 전(前) 2년 전에 당시 17살이셨던 만후(曼后)와 비류왕(沸流王)은 결혼하셨는데, 사서(史書)에 구체적으로 적혀있지 않지만, 벽라후(碧蘿后)가 살아계실 때에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아들이신 양인(昜人)을 낳으신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칠중(七重)-구지(衢地)에 있었던 엄사국(淹氵虒國)은 3대에 걸쳐서 즉 비류왕(沸流王)-양인왕(昜人王)-호력왕(虎力王)으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는 일수도(一首都) 이왕성(二王城)의 원칙으로써 도성(都城)을 짖는 법도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미추홀(彌鄒忽)은 바로 칠중하(七重河)를 통괄해서 ‘배달화백을 하는 왕성(王城)’이 되는 것이고, 엄사왕(淹氵虒王)이 전쟁 때 ‘전투지휘권’을 지니는 또다른 왕성(王城)이 필요합니다. 그럼 그곳이 어디냐? 바로 ‘참고용 지도’에 짐관성(斟灌城) - 다시 말하면, 관미성(關彌城)이 되는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이 비류왕(沸流王)의 손자(孫子)되시는 호력왕(虎力王)때 수해가 도대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비류선제(沸流仙帝)의 또 다른 왕후(王后)를 통해서 낳은 양인왕(昜人王)을 통해서 호력왕(虎力王)때 일어난 실로 어마어마한 수해(水害)에 대한 기록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사료(史料) 다시 옮김 ***

十四年辛丑, 冬十一月, 有雷無雪. (*)是歲<淹淲>大漲,(*) <彌鄒忽(密山前坪)>盡被水害, 移其民於<西河>, (*)以 <淹淲王><虎力>爲<龍山公>(*)

"14년{단기2374년/AD41}신축, 겨울 11월, 천둥은 치는데 눈은 내리지 않았다. 이 해에 (*)<엄사(淹氵虒)>수가 크게 불어나,(*) <미추홀(彌鄒忽)(밀산전평)>이 수해로 초토화 되어, 백성들을 <서하(西河)>로 옮겨야 하겠기에, (*)<엄사왕(淹氵虒王)>인(*) <호력(虎力)>을 <용산공(龍山公)>으로 삼았다. *** 다시 옮김 마침 ***

이 대무신대제기(大武神大帝紀) 11월조 이 기사(記事)에서 “겨울에 번개와 우레는 치는데 눈(雪)이 안왔다.”는 것은 기상이변으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하늘에 먹구름이 꽉 찼고, 그 결과 번개와 우레가 치면, 비(雨)가 되고 이것이 내려오는 동안 얼어서 눈(雪)이 되는데, 그러지를 않고, 계속 차 들어가기만 했다는 것이지요.  

이는 겨울이라서 추운데다가, 한낮이라고 컴컴하게 되는 아주 기분나뿐 - 말하자면 종말적(終末的)인 분위기가 오다가, 갑자기 폭우(暴雨)가 한없이 쏟아진 경우인 것이지요.

수해(水害)기록에서 밝혀진것 - 엄사수(淹氵虒水)는 제수(濟水), 관미성(關彌城)은 전투지휘권이 있는 엄사국 (淹氵虒國)의 왕성(王城) 우리는 이제 미추홀(彌鄒忽)의 위치를 알기 때문에, 이 기상이변을 통해서 쏟아진 폭우(暴雨)가 내린 지역을 알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산동반도 동부쪽 즉 칠중하(七重河)들의 상류가 있는 곳인 것이지요.  

엄사수(淹氵虒水)는 제수(濟水)

이런 기록에 의해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관경삼국 초기에 배달화백을 할 경우, ‘아시아(Asia)의 헌법질서’를 바꾸는 경우에는 엄사수(淹氵虒水)가 바로 오늘날의 흑룡강(黑龍江)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정치-공동체’를 통합하는 배달화백을 할 때에는 제수(濟水) 전체가 바로 엄사수(淹氵虒水)가 된다는 것이지요. 이는 배달화백의 엔딩-룰(eding-rule)을 적용시키는 강(江)이 바로 제수(濟水)였음을 뜻합니다. 또 하나는 비류왕(沸流王)의 가계(家系)가 비류왕(沸流王)-양인왕(昜人王)-호력왕(虎力王)으로 엄사국(淹氵虒國) 이름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관미성(關彌城)은 전투지휘권이 있는 엄사국(淹氵虒國)의 왕성(王城)

첫째는 미추홀(彌鄒忽)은 엄사국(淹氵虒國)에서 ‘배달화백을 하는 왕성(王城)’ 즉 도성(都城)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짐관성(斟灌城) 즉 관미성(關彌城)은 엄사국(淹氵虒國)이 전쟁을 할 때, 전투지휘권을 지니는 그런 또 다른 왕성(王城)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김성호 선생이 제기한 ‘비류백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김성호 선생의 ‘비류백제’설은 남당유고(南堂遺稿)가 널리 읽혀지기 전에 확랍한 가설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엄사국(淹氵虒國)이 “도대체 전쟁을 할 경우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특수국가는 ‘배달화백의 엔딩-룰(ending-rule)만을 담당하는 국가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수(濟水)에서 이런 ‘배달화백의 엔딩-룰(ending-rule)’을 담당하는 벅수군이 있었습니다.

배달화백은 진한육부(辰韓六部)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배달화백의 신성성(神聖性)을 지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벅수군>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벅수군>인육부군(六部軍)이 맡어야하는 것이 법도(法道)에 맞습니다. 또한, 배달화백의 엔딩-룰(ending-rule)인 엄사수(淹氵虒水) 게임(game)도 육부군(六部軍)이 치루어야합니다.

‘뿔범 철가면(鐵假面)’을 관장하는 것은 습비부(習比部)인데,  이 습비부(習比部)가 육부(六部) 안에 이미 있기 때문에 이것이 정상적인 것이지요. 배달화백은 ‘큰 공동체의 통합’가 ‘작은 공동체의 통합’을 말발이 서로 넘나들면서 동시 진행시키는 이륜구동(二輪驅動) 장체로 움직이는 화백회의입니다. 따라서 이런 배달화백을 축차적(逐次的)으로 연결시키면, 지구촌의 통일도 단 3개의 배달화백을 연결시키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즉 (1)남북한의 통일 - (2)극동의 통일 - (3)아시아의 통일 - (4)지구촌의 통일로 ‘정치-공동체’의 통합크기를 상정한다고 할때,  (1)-(2), (2)-(3), (3)-(4)으로써 배달화백을 3개 연결시키면 된다는 결론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배달화백을 군사력(軍事力)으로 자유스런 진행을 막는것이 결국은 엄사국(淹氵虒國)을 공격하는 것과같은 것이지요. 왜냐하면 배달화백의 엔딩-룰(ending-rule)을 총괄하는 것이 바로 이 산동반도 칠중하(七重河)지역에 있는 엄사국 (淹氵虒國) 고유의 일인데, 군사력을 강제 엔딩(ending) 시키는 것이니깐 엄사국(淹氵虒國)에 명백한 도전이 되는것이지요. 따라서 특정 가계(家系)에 엄사국(淹氵虒國)의 명칭을 준다는 것은 그것이 육부군(六部軍)올 대체하고 있기 때문에,

양인왕(昜人王)-호력왕(虎力王)으로 내려오는 엄사국(淹氵虒國)으로써는 여간 부담이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 아시아(Asia)전역에 포진(布陳)되어 있는 최강예 벅수군 - 배달화백의 진행을 지키는 육부군(六部軍)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한낮 산동반도 동쪽의 칠중하(七重河) 주변에 있는 비류왕(沸流王)-양인왕(昜人王)-호력왕(虎力王)의 가계에 얹혀놓는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엄사국(淹氵虒國)의 명칭을 이 비류왕(沸流王)의 가계에 준다.”는 것 자체가 육부군(六部軍) 상위의 존재 로써 인정한다는 것이어서 그당시 사회로써는 매우 특이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배달화백을 하기 위해서는 위의 예(例)에 따라, 2개를 연결시키면 결국 아시아(Asia)의 통일을 하는 배달화백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는 오늘날의 ‘버마’에서 배달화백(倍達和白)이 일어나고, 그 주변을 통합하는 ‘큰 범위’라고 하더라도, 어떤 패권(覇權)주의적인 세력이 이를 공격하였다 하면, 이는 즉각 육부군(六部軍)이 동원되어야하는데, 이 육부군(六部軍) 위에 엄사국(淹氵虒國)이 있기 때문에, 모든 육부군(六部軍)의 작전이 엄사국(淹氵虒國)의 통제를 받어야한다는 이상한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엄사국(淹氵虒國) 왕(王)들은 “제발 우리를 육부군(六部軍) 위에 올려놓고, 상징적인 ‘절대권위’를 주지말라. 육부군(六部軍)은 ‘화백회의 신성성을 지키는 벅수군 답게’ 화백회의로 그 전략과 지휘관을 옹립하여야한다.”는 주장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에는 “그래도 당신들이 전권(全權)을 맡아주거나, 혹은 상징적으로라도있어야만 합니다.”고 한사코 육부군(六部軍) 위에 올려놓는 아주 이상한 현상이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우리가 칠중하(七重河)및 미추홀(彌鄒忽)에 관련된 군사 및 정치 지리를 깊게 고찰해야하는 이유인 것이지요.

수리시설(水利施設) 자체가 아시아(Asia)전역에 산중호수(山中湖水) 물로써 군선(軍船)을 보낼 수 있는 구조 따라서 우리는 오늘날의 교래하(膠萊河)와 고하(沽河) - ‘참고용 지도’에 오회수(俉淮水)로 기입된 곳이 북두칠성 (北斗七星)의 자리로써는 파군성(破軍星)의 자리이고, 그 위에 거대한 백맥(百脉)-대수고(大水庫)가 있는 이유를짐작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백맥호(百脉湖) 혹은 백맥(百脉)-대수고(大水庫)에는 ‘배달화백을 위헙’하는 군사적 위기에 동원되는 엄사국(淹氵虒國)이 신속(迅速)파견군으로써 아시아(Asia) 전역(全域)에 군대를 보낼 수 있는 군(軍)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이유 때문에, 칠중하(七重河)에 수많은 갑문(閘門)을 설치하고, 또 짐관성(斟灌城) - 다시 말하면, 관미성(關彌城)에서는 인공(人工)으로 만든 조수(潮水)가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맥호(百脉湖)에 있는 엄사국(淹氵虒國) 군선(軍船)은 그 높은 호수(湖水)로부터 인공(人工)으로 어진 밀물을 타고 한순간에 관미성(關彌城)을 벗어나, 저 ‘버마’로까지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지요.

이 또한 매우 웃기는 일입니다.  신라의 경우도 오로군사(五路軍事)라는 ‘벅수군’의 신속파견군의 센터(centor)를 전략적 요충지에 두고 있는데,  왜 굳이 “모든 육부군(六部軍)은 이곳에서 파견된다.”는 좀합리한 개념에 계속 그당시 사람들이 얽매여 있으려 하였는가 하는 점이 문제됩니다.  

대수해(大水害)는 도대체 어떤 불길한 징조(徵兆)였던가?  

하늘이 대기상이변을 일으켜서 칠중하(七重河) 근처를 온갖 수리시설을 엉망으로 만드는 폭우(暴雨)가 쏟아졌고,  또한  그 전(前) 먹구름이 짙어서 한 낮인데도 컴컴한데 눈(雪)은 안오고, 번개와 우레만 친 후에 이런 가공할 폭우(暴雨)가 쏟아졌다면,  엄수사국(淹氵虒國)의 마지막 왕인 호력왕(虎力王)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세상이 무너지는’는 조짐(兆朕 : omen)으로써 받아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엄사국(淹氵虒國)이 어떤 잘못을 범(犯)해서, 일종의 천벌(天罰)을 받았나?!” 하는 느낌까지 오는 스산한 징조(徵兆)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대자연의 기상이변을 만난 후에,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의 대책이 매우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移其民於<西河>, (*)以<淹淲王><虎力>爲<龍山公>(*)” - 즉 엄사국(淹氵虒國) 사람들을 전부 서하(西河)로 보내고, 또한 엄사왕(淹氵虒王)을 용산공(龍山公)으로 봉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하(西河)는 오늘날 섬서성 서수(湑水)로써 바로 환웅께서 내려오신 태백산(太白山)을 남(南)쪽에서 동(東)에서 서(西)로 길게 나가다가 남류(南流)하는 곳입니다. 이곳이 바로 알천(閼川)이 있는 곳이고, 또 이것에 칠성(七星)제단(祭壇)에 ‘자두(紫桃)’인 오얏(=(李)을 심은 곳이 지요. 또 그 뒤에는 중국대륙을 사통오달(四通五達)하는 지역인 태백구지(太白衢地)가 있는 곳입니다. 결국 이는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께서 “칠중(七重)-구지(衢地)에서 수해(水害)를 입으셨다고요? 하하. 그러면 그 반대쪽의 태백(太白)-구지(衢地)에서 마음놓고 같은 일을 하시면 될 것 아닙니까?”하는 듯한 행동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용산공(龍山公)이란 칠성(七星)이 만주어(滿洲語)로 ‘나난-구리’이고 이 ‘구리’가 용(龍)이기 때문에,  “결국 같은 일을 태백구지(太白衢地)에서 하십시요”하는 안배(按配)를 하였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박(船舶)을 타고 아시아(Asia) 전역을 신속파견하는 비합리적인 의무에서 해방시켜준 것이지요. 문제는 호력(虎力)께서 왕(王)에서 공(公)으로 그 사회적 칭호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王)은 ‘세습적 우선권’이 있는 직책이고, 공(公)은 이런 ‘세습적 우선권’이 없이 임명(任命)이나, 화백회의 에 의해서 옹립(擁立)되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호력왕(虎力王)께서는 산동반도라는 중요한 해상(海上)의 요충지 즉 동양병법에서 사통오달(四通五達)의 땅 으로 지는 해상(海上)-구지(舊地)에서 수해를 만났지만, 이를 이유로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께서는 똑같이 비중이 큰 육상(陸上)-구지(舊地)인 태백산의 태백-구지로 옮겨간 것에 불과합니다.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는 소도(蘇塗)의 ‘최고 명문(名門)’에 대한 존경심으로써 태백구지를 맡기신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호력왕(虎力王)께서 “엄사국(淹氵虒國)이란 나라가 과연 필요할까? 굳이 세습왕(世襲王)을 두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는 평상시의 주장을 그당시 사람들이 극력 듣지않았지만,  “억지로 엄사국(淹氵虒國)을 육부군(六部軍)에게 올려놓은 것에 대해서 하늘이 천벌(天罰)을 내렸다.”는 것을 이유로 “국왕(國王)으로부터 해방시켜 준것”이라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 나중에 상론(詳論)되는 것처럼 만후(曼后)의 어머니이신 계후(桂后)는 아시아(Asia)최고 무가(武家)인 환나국(桓那國)의 여왕(女王)이고, 그리고 그 후손인 환나국(桓那國)의 왕실(王室)사람들은 최고급의 경호무사(警護武士)인 동시에 ‘환나(桓那) 벅수군’의 사령관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있었고, 권력욕이 없이 ‘무장의 길’을 가는 그런 왕실이었던 것입니다.

고구리(高句麗)의 3대가 모두 이 환나국(桓那國) 왕실에 대해서 절대적인 빚을 지었고, 따라서 이들 가계(家系)는 그당시로써 최고의 존경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토록 만후(曼后)의 가계(家系)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고, 또한 비류왕(沸流王)과 벽라후(碧蘿后)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대 때 사람들은 엄사국(淹氵虒國)을 ‘다스리는 세습적 우선권’을 환나국(桓那國)과 비류왕(沸流王)의 피가 섞인 후예(後裔)가 계속 이어가길 간절히 원(願)했으리라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들 가계(家系)가 계속 모든 배달화백의 최종 엔딩-룰(ending-rule)을 엄사수(淹氵虒水) 게임(game)을 제수(濟水)에서 마치 고주몽(高朱蒙)-추모(芻牟)가 엄리대수(奄利大水)를 넘는 것처럼 계속 재현(再現)해 주길 바랐고, 이들이 배달화백을 지키는 육부군(六部軍) 상위에 실질적이든 상징적이든 계속 있기를 바랬던 것이지요.

그 당시 사람들이 “아니 소도(蘇塗) 최고의 명문(名門)에서 엄사국(淹氵虒國)의 ‘세습적 우선권’까지 안맡으시면됩니까?!”하고 한사코 거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관행을 하늘이 노(怒)하사 “왕(王)없이도 되지 않지 않는가?! 그렇다면 칠중하(七重河)의 수리시설도 이제 무의미하느니 ...”하고 폭우(暴雨)가 내렸고,  이에 의해서 사람들이 “정말 저 호력왕(虎力王) 말씀대로 최소한 ‘화백회의 엔딩-룰(ending-rule)만큼은 왕(王)없이 하고, 또 육부군(六部軍)이 주최로 해야하고, 나아가 모든 배달화백에 도전하는 것을 응징하는 것도 육부군(六部軍)의 이름으로 하라!!”는 하늘의 뜻이 저 폭우(暴雨)로 나타났다.”라고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신기할 정도로 비류선제(沸流仙帝)-벽라후(碧蘿后)-만후(曼后)로 이어 지는 이 세 사람만큼 관경삼국(管境三國) 초기 시절에 권력(權力)에 대해서 완벽히 초탈(超脫)한 입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천독(天毒)들에 대한 도덕적 충성심에 봉사한 사람들은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 가계(家系)에 의해서, 그 당시 최대의 모든 난제(難題)들이 쉽게 풀려나갔기 때문에, 당시대 사람들은 이 가계(家系)를 육부군(六部軍) 위에 얹혀놓으려는 엉뚱한 공감대(共感帶)에 강하게 결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가계(家系)에 대한 아시아(Asia)인들의 존경심이  3대(代)에 걸쳐 존재한 엄사국(淹氵虒國)이란 매우 신기한 국가를 탄생시켰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호력왕(虎力王) 역시 가문(家門)의 정신으로 볼 때, 절대로 이 왕권(王權)이란 권력을 좋아했을 리 만무(萬無)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즉 대폭우(大暴雨)가 쏟아지자,  칠중(七重)-구지(衢地)를 복원할 동안 잠시 태백(太白)-구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에 “성미에 맞지 않는 왕권(王權)도 날려보내라.”는  하늘의 뜻이 있었음을 다분히 활용하시고,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께서 용산공(龍山公)으로 삼자 흐믓해서 오늘날 서수(湑水)인 서하(西河)로 들어가는 호력왕(虎力王) 의 모습이 눈(眼)에 선할 정도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왜 만후(曼后)는 왕자(王子) 생산이 인정이 되지 않는가?” 하는 이상한 문제. 그런데,  비류선제(沸流仙帝)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은 기록 - ‘정성일님’의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 을 읽어보면, 우리는 결국 “아니... 만후(曼后)께서도 벽라후(碧蘿后)께서 훙(薨)하시기 전에 분명히 결혼을 하셨고,또 아들인 양인왕(昜人王)을 낳으신 것 같은데....왜 왕자(王子) 생산이 전혀 인정이 안되는 것있까?” 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게 합니다.

바로 이런 이상한 문제가 ‘정성일님’의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과 ‘고구리 사초’에서 등장하는 엄사국(淹氵虒國) 3대(代) 이야기와 얽혀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을 통해,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의 이야기를 음미해 보기로 합시다.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 이야기 - ‘정성일님’의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께서는 소도(蘇塗)의 ‘세습적 우선권’이 자기 대(代)에 한정시키려는 아주 명쾌한 의지가 있으셨습니다. 그것이 ‘정성일 님’의 “백제왕기(뒤편 백제서기) 비류왕 해석”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七年戊申王后碧蘿薨. 王痛哀之, 群臣請納繼后, 王不忍之曰, 夫婦之道宜相從, 雖不得相從, 安忍昔未冷而忽復再娶乎. 太后聞而悲之曰吾有罪於沸流矣,

6년(B.C.13) 임신년 왕후(王后) 벽라(碧蘿)가 죽었다. 왕(王)이 원통하고 슬퍼하였다. 군신들이 (왕비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고) 왕후(王后)를 새로 모시도록 청하였다.

왕(王)이 참지 못하며 말하기를 “부부사이에는 마땅히 서로 따름이 도가 있다, 비록 따름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직 마음이 식지 않았는데 동정심도 없이 갑자기 장가들라고 하느냐?!” 라고 하였다. 태후(太后)가 듣고 슬퍼하여 말하기를 “죄(罪)는 비류(沸流)보다는 나에게 있다.”고 하였다. - 각설(却說)

비류왕(沸流王) 즉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는 왕후(王后) 벽라(碧蘿)를 지극히 사랑했고, 또 재혼(再婚)을 거부 하는 마음을 지녔던 것입니다. 이 ‘재혼(再婚)의 거부’는 엉뚱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 당시의 풍습은 소도(蘇塗)의 군왕(君王)과 영역(領域)을 관장하는 군왕이나 모두 ‘세습적 우선권’이 있고, 비록 이권분립(二權分立)이 엄격하긴 하였으나, 한쪽의 군왕(君王)의 아들은 다른 쪽의 군왕(君王)의 후보로써 역시 진출(進出)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혼을 해서 ‘아들’을 낳지 않으면, 이런 ‘세습적 우선권’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음 뒷 이야기에서 보다시피, 비류왕(沸流王)은 딸만 셋인지라,  소도(蘇塗)의 군왕(君王)으로써 ‘세습적 우선권’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일반 천독(天毒)들에게서 옹립(擁立)되어 단군이 되게 하는 결정을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는 서로 하셨던 것이지요. 이런 말을 들은 소서노(召西弩) 태후께서는 “내아들 비류(沸流)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내가 재가(再嫁)를 해서 일어난 인연의 얽힘에 대한 반항이라고 할 수 있다. 다 나의 잘못이다.”고 말할 정도로 완강 하였던것입니다.

溫祚慰之曰母之再嫁豈其罪哉, 兄之不再娶者亦何賞?善之善哉. 盖其愛嫂之情猶有未已故也. 온조(溫祚)가 어머니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어머니가 재혼한 것이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형(兄)이 재혼(再婚)을 하지 않은 것은 또한 선(善)중의 선(善)으로 숭상하고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형수(兄嫂)를 사랑하는 마음을 덮는것은  (*)오히려 이미 아님이 있는 까닭이다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 형이 하고자 하는 대로 두는 게 좋겠다).(*) - 각설(却說)

그런데, 온조(溫祚)는 형님이자 백제 소도(蘇塗)의 군왕(君王)이신 비류왕(沸流王)께서 “왜 형님이 재혼하지 않는가?!” 에 대한 의미를 아주 명확히 알고 계셨던 것이지요. 원문(原文)의 ‘猶有未已故也.’는 한국어(韓國語)로 대응시켜 ‘딱’ 뿌러지게 해석하기 힘든 구절입니다. 이(已)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흐름’을 뜻합니다.  

부득이(不得已)는 이런 ‘이미 일어나고 있는 흐름을 얻지 못해서’라는 뜻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앞의 유(猶)는 ‘오히려’, ‘비록’, ‘망설이며 머뭇거리다.’는 뜻의 어조사(語助辭)입니다. 그리고 미(未)는 부정어(否定語)이긴 하나, “어떤 사태(事態)가 일어나지 않게 하고, 모자르다.”는 뜻의 부정어입니다. 따라서 <猶有未已故也>를 굳이 어색하더라도, 직역(直譯)하자면,  “비록 이미 일어나고 있는 흐름이 있다 치더라도,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 져 함이 그 이유입니다.”인 것이지요. 즉 온조왕(溫祖王)께서는 “형님이 재혼(再婚)을 안하는 이유가 형수(兄嫂)에 대한 애정(愛情) 즉 벽라후(碧蘿后)가 비류선제(沸流仙帝)와 꿈꾼 세계 - 소도(蘇塗)의 군왕(君王)인 선왕(仙王)이  천독(天毒)들로부터 옹립(擁立)되는것에 대한 애정(愛情)까지 있는 것이고,  이것은 어머니이신 소서노(召西弩) 태후께서 재혼을 하면서 꾼 꿈과 동일합니다.

그것은 ‘세습적 우선권’ 때문에 소도(蘇塗)가 질곡(桎梏)되고 척족(戚族)간에 갈등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려는 이유 때문입니다.”라고 한 것이지요.

碧蘿以荇人王女有傾國之色, 而太妊之德孝友戀愛能使沸流 (*)徠捨于心.(*) 當大難而不惑, 南來以後親執饋事以慰將士, 夙奧夜寢疲勞, 盖忍遂得疾以薨.

벽라(碧蘿)는 행인국(荇人國)의 왕녀로써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아름다움이 있고 태임지덕(太任之德)이 있으며 효도(孝道)하고 우애(友愛) 있고 연애(戀愛)에도 능(能)하여 능(能)히 비류를 부릴 수 있고, 마음을 비우는 것을 위로할 수 있었다.

큰 어려움을 당하여 미혹당하지 않았고,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 친히 밥을 먹이는 일을 처리하고, 이로 인하여 장사 (장졸)를 위로하였는데, 일찍부터 밤에 잠잘 때까지 나라 안의 일을 하여 피로(과로가 겹친 상태)하였는데, 덮고 참고 견디어 마침내 병을 얻기에 이르렀는데 이 때문에 돌아가셨다. - 각설(却說)

위 원문(原文)에서 래사우심(徠捨于心)이란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사우심(捨于心)인데, 이는 벽라후(碧蘿后)와 비류왕(沸流王) 사이에 ‘아들’이 없자, “그래 백제의 소도(蘇塗)에는 ‘세습적 우선권’이 있는 단군(檀君)보다도 천독(天毒)들께서 직접 옹립하는 단군(檀君)이 계속 되도록 하자.”하고 마음을 비우셨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비움’에 ‘아쉬움’이나 ‘슬픔’이 곁들 때에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모인데다가, 애교(愛嬌)있는 아내로써 위로하였음을 래(徠)로 표현된 것입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에 (*)닥아옴(*)을 래(來)와 길(道)을 뜻하는 두인변을 합쳐서 만든 글자가 바로 래(徠)인 것이지요. 아무튼, 벽라후(碧蘿后)는 산동백제와 하남 위례성의 소도(蘇塗) 건설을 위해서 진력(盡力)하셔서 젊은 나이에 병(病)을 얻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故群臣上下莫不痛之, 春秋三十四有三女皆絶美, 馬韓王數遣使求之而不許, 以溫祚子多婁爲子, 欲傅其國, 臨薨. 謂曰我死勿更娶, (**)以若兒輩國政可委溫祚, 而內事万委女輩王許之,(**) 時王長女葱姬年已十六, 能代后視內事故也. 三月王與葱姬北巡郡邑以慰戍卒. 命甘兒入內視事. 이런 까닭으로 (*)모든 신하(臣下)들이(*)  위아래 없이 마음아파 할 수 밖에 없었다.

춘추(나이)가 34세, 딸 셋을 낳았고, 딸 셋 모두 절세미인(絶世美人)이었다. 마한(馬韓) 왕(王)이 수차례 사신(使臣)을 보내어 딸을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온조(溫祚)의 아들 다루(多婁)를 아들로 삼아, 마한이 후견인이 되어 주기를 바라서 (다루를 보내려고 하였으나) 임하여 (벽라가) 죽었다.

(벽라가) 설명하여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더라도 다시 장가들지 말라, (**) 만약에 아이들의 ‘짝지음’을 통한 국제정치(國際政治)가 있게 되면  온조(溫祚)에게 맡기라고 하였다. 그리고 집안일(=소도(蘇塗))에 관한 모든 것은 딸과 ‘짝지은 자’에게 맡기라고 하였는데, 왕이 허락하였다 (**), 이때 왕의 장녀 총희(葱姬)가 이미 16살이 되었기 때문에, 능히 왕후(王后)를 대신하여 집안일을 볼 수 있었던 까닭이다. 3월 왕(王)과 총희(葱姬)가 더불어 북쪽의 군과 읍을 돌며 이로써 경비병들을 위무 했다. 감아(甘兒)에게 들어와서 집안일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 각설(却說)

이 기록은 백제 초기 역사를 규명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마한(馬韓)이 아주 싱거울 정도로 백제(百濟)에 흡수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명확치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워낙 벽라후(碧蘿后) 자신이 경국지색(傾國之色)인데, 그 딸 셋 모두가 절세미인(絶世美人)인지라, 삼한(三韓)에서는 소문(所聞)이 파다하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마한(馬韓)왕도 이 비류왕(沸流王)과 벽라후(碧蘿后) 사이에 난 ‘딸’과 결혼하기를 그리도 원했던 것이지요.  

마한(馬韓)은 소도(蘇塗)의 풍습을 잘알고 있었고, 비류왕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백제의 소도(蘇塗)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려는 꿈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벽라후(碧蘿后)는 자신의 딸들이 절세미인(絶世美人)인 것까지 ‘백제의 소도(蘇塗) 개척’과 관련해서 아주탁월한 견식(見識)이 계셨던 것이지요. 그것이 드러나는 것이   (**)以若兒輩國政可委溫祚, 而內事万委女輩王許之,(**)의 문장입니다. 이 문장의 해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배(輩)를 어찌 훈(訓)하는가?!”입니다. 배(輩)는 일반적으로 ‘무리(=군(群)’의 뜻이나, ‘짝’, ‘견주다’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짝지움’ 즉 결혼(結婚)의 의미로 쓴 것입니다. 따라서 아배(兒輩)는 ‘아이들을 짝지움’ 즉 ‘아이들의 결혼(結婚)’이란 뜻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의 말 국정(國政)에 대해서는 한문(漢文)이 유난스럽게 단복수(單複數)가 구분이 안되기 때문에, 이를 ‘국제정치’로 해석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  절세미인(絶世美人)들이 백제(百濟)의 소도(蘇塗)를 통해, 외국(外國)과 연결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국제정치(國際政治)가 되는 것이지요. 아무튼, 위 (**)以若兒輩國政可委溫祚, 而內事万委女輩王許之,(**)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지는 것이지요.

“만약 아이들의 짝지움에 대한 국제정치(國際政治) 문제가 생기면, 이는 온조(溫祚)에게 일체 위임(委任)함이 옳고, 집안일 즉 소도(蘇塗)에 관한 일은 여배(女輩) 즉 ‘딸들과 짝지은 사람’에게 위임함이 옳다.”고 하였더니 비류왕(沸流王)은 허락하였다.  이 이야기는 “온조(溫祚)에게 아이들 결혼을 위임해서 결정하도록 하되, 온조(溫祚)에게는 백제(百濟)의 소도(蘇塗)를 천독(天毒)들이 옹립(擁立) 과정 중에 있는 ‘소도(蘇塗)의 군왕(君王) 후보’들 가운데서 괜찮은 사람에게 ‘딸의결혼’을 위임케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독들이 옹립한 단군(檀君)과 온조왕(溫祖王)이 볼 때, ‘조카 딸’의 남편으로써 괜찮은 사람을 택해서 ‘국제정치’를 총괄토록 합시다.”하는 이야기를 한 것이지요. 결국 벽라후(碧蘿后)와 비류왕(沸流王)의 이러한 결정 때문에,  마한왕(馬韓王)도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 것이지요. 왜냐?  자기자신도 마한왕(馬韓王)의 ‘세습적 계승권’을 버리지 않으면, 벽라후(碧蘿后)의 딸인 절세미인(絶世美人) 과 결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한(馬韓)은 누가 다스리지?”하는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깊히 고민하다가 “그것이야 내 아들에게 왕위(王位)를 인계하고, 다루(多婁)를 섭정(攝政)케 하면 되는 문제이고, 대신 나는 소도(蘇塗)의 군왕(君王)으로 출마(出馬)해서... 벽라후(碧蘿后) 딸인 절세미인과 결혼하고 싶다.”라는 결정을 하고, 교섭 중에 벽라후(碧蘿后)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남당유고(南堂遺稿)는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진행과정을 잘 아는 온조왕(溫祖王)께서는 형님과 형수(兄嫂)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조왕(溫祖王)께 국제정치의 선택의 폭을 넓혀주었고, 또 이런 벽라후(碧蘿后)와 비류왕(沸流王)의 백제(百濟) 소도(蘇塗)에 대한 천년지대계(千年之大計) 때문에, 마한(馬韓)이 쉽게 백제에 흡수되는 가장 큰 이유라고 봅니다. 아무튼, 남당유고(南堂遺稿)에 의해서 발견된 것은,  백제의 비류왕(沸流王)이 영역(領域)을 관장한 ‘아우’이신 온조왕(溫祖王)과는 달리 처음부터 백제(百濟)의 소도(蘇塗)를 당당하는 선왕(仙王)이었으며,  산동백제(山東百濟) 를 백제의 중심적인 소도(蘇塗)로써 개척하시고, 배달화백을 하는 왕성(王城)으로써 미추홀(彌鄒忽) 즉 청주(靑州) 혹은 칠중성(七重城)을 개척하섰다는 것입니다.


"만후(曼后)의 관계 - 벽라후(碧蘿后)만치 특이한 만후(曼后)의 가계(家系)

'비류선제(沸流仙帝), 벽라후(碧蘿后), 만후(曼后)의 나이 계산,

비류왕(沸流王)께서는 벽라후(碧蘿后)이외에도 또 한분의 왕후(王后)가 계셨는데, 바로 만(曼) 공주이십니다. 그런데, 벽라후(碧蘿后)께서 훙(薨)하신-돌아가심을 뜻함- 기록이 비류왕(沸流王) 7년 무신(戊申) 조(條)에 ‘王后碧蘿薨’으로 기록되어 있으니깐,  벽라후의 탄생하신 것은 <6년(B.C.13)> - ‘정성일’님께서 7년과 6년을 병기하고 있어약간 혼란됨 - 34세에 훙(薨)하셨기 때문에, 결국 벽라후(碧蘿后)가 태어나신 것은 (B.C.13-34= B.C. 47)이 됩니다. 그런데, 또다른 왕후(王后)이신 만(曼) 공주는 ‘고구리 사초’ 시조(始祖) 추모대제기(芻牟大帝紀) 6년{단기2302년/ BC32}을축 정월, <계>후가 딸 <만>을 낳았다.(<桂>后生女<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분의 나이 차이는 (B.C. 47- B.C. 32=15)이 되어서 15살 차이가 납니다. 이제 우리는 만후(曼后)의 가계(家系)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후(曼后)의 가계(家系) 추적 -아시아(Asia)최고의 무문(武門)인 환나국(桓那國)

이 만(曼) 공주(公主)의 ‘아버지’는 추모대제(芻牟大帝)시고, 어머니이신 계후(桂后)께서는 ‘고구리 사초’ 추모대제기(芻牟大帝紀) 7년{단기2303년/BC31}경인 10(?)월 조(條)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十{十一?}月, <桂>皇后, 以創毒崩, 上慟哀之, 作<吾妻曲>. 后能騎射, <荇人>·<句茶>之戰, 扈駕立功, 中流矢於 <黃山>. 春秋三十二. 葬于<眞珠山(珠河)> 子<高婁>·<曼>公主, 皆賢.

10월{11월?}, <계(桂)>황후가 상처가 썩어 죽으니, 상(上)은 이를 애통해 하여, <오처곡(吾妻曲)>을 지었다.

황후(皇后)는 말 탄 채 활쏘기를 잘하여서, <행인(荇人)>및 <구다(句茶)>와 전쟁할 때 어가(御駕)를 뒤에서 호위 (護衛)하며 공(功)을 세우다가, <황산(黃山)>에서 흐르는 화살에 맞았었다. 춘추 32세였으며, <진주산(眞珠山) (주하)>에 장사하였다. 아들 <고루(高婁)>와 <만(曼)>공주 둘 다 현명했다. 문제는 이 계후(桂后)께서 돌아가시는 추모대제기(芻牟大帝紀) 7년의 일년 전(前)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六年乙丑, 正月, <桂>后生女<曼>.
6년{단기2302년/BC32}을축, 정월, <계(桂)>후가 딸 <만(曼)>을 낳았다.

출산 후(後) 10달이 되면, 만(曼)공주께서 채 한 돌이 안되셨을 때, 젖먹이고 아이를 안키우고, 직접 전쟁에 나서서 그것도 추모대제(芻牟大帝)의 어가(御駕)를 책임 호위(護衛)하시다가 화살을 맞아서 훙(薨)하신 것은 매우 놀라운 기록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계후(桂后)께서 훙(薨)하시자, 추모대제(芻牟大帝)께서 “내 아내”라는 뜻의 오처곡(吾妻曲)을 부를 정도로 애정(愛情)도 두터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신궁(神弓)으로 유명한 고주몽-추모대제(芻牟大帝)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계후(桂后)를 보호 하셨다면 몰라도, 거꾸로 계후(桂后)가 고주몽의 어가(御駕)를 지키다가 화살을 맞아서 훙(薨)하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만후(曼后)의 어머니이신 계후(桂后)의 정체가 무엇인가?”하는 궁금증을 우리는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이 ‘고구리사초’ 시조추모대제기(始祖芻牟大帝紀) 2년 2월 조(條)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二年乙酉, - 중략(中略)  二月, <桓那國(吉林)>女主<桂婁>來降, 納爲夫人.
四月, <召>后生子<沸流>, 爲人多情而懦弱.  

2년{단기2298년/BC36}을유, ---중략(中略)---
2월, <환나국(桓那國)(길림)>여왕(女王) <계루(桂樓)>가 항복하여 왔기에, 부인(夫人)으로 거두었다.  

4월, <소(召)>후가 아들 <비류(沸流)>를 낳았는데, 사람됨은 다정(多情)하나 나약(懦弱)하였다.

즉 이 기록은 소서노(召西弩)께서 비류(沸流)를 낳으시기 2개월 전(前)에 환나국(桓那國)의 여왕(女王)이 투항(投降) 해왔고 부인(夫人)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순노부(順奴部)와 동부(東部), 습비부(習比部)및 환나부(桓那部)의 관계

고구리(高句麗)의 환나부(桓那部)는 바로 ‘고구리 오부(五部)’가운데 동부(東部)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를 순노부(順奴部)라고도 흔히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하는 것이지요. ‘고구리 사초’ 시조추모대제기(始祖芻牟大帝紀)에서는 고주몽(高朱蒙)께서 고구리(高句麗)를 열기 전(前)부터 이순노부(順奴部)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즉 오늘날 흑룡강(黑龍江)인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건너신 직후(直後)의 기록이 시조추모대제기(始祖芻牟大帝紀) 의 첫 기록으로 나옵니다.

辛巳, 夏, 與四豪(烏伊,摩離,陜父,芬奴)南來, 乘玄武(方丈大龜){渡盖斯水,一作淹水,一作奄利水}, 而至<普述(穆陵河口)>.  (*)與三賢(再思,武骨,黙居), 逐虎攘<鞨>以開<順奴(□西汗□)>(*)  是年, <禮>后生<光明>.  

신사{단기2294년/BC40}, 여름, 네 명의 호걸(오이,마리,협보,분노)과 함께 남쪽으로 와서 현무(방장대구)를 타고 <보술수(목릉하구)>에 이르렀다. 세 명의 현자(재사,무골,묵거)와 함께 호랑이{虎族?}와 <갈鞨>족을 쫓아내고 <순노(□서한□)>를 열었다. 이 해에 <예>후가 <광명>을 낳았다. 그런데,  그 다음에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壬午, 春, 與<樂浪>·<卒本>, 定界.  秋, 納<召西奴>, 爲妃.

임오{단기2295년/BC39}, 봄, <낙랑(樂浪)>·<졸본(卒本)>과 경계를 정하고, 가을엔 <소서노(召西奴)>를 거두어 비(妃)로 삼았다.

"<東明>元年甲申(二二九七), 二月, <卒本>王<延陀勃>薨, <召西奴>以國獻<順奴>.  <卒本>之民推上爲皇帝, 卽位於

<沸流谷><西城山(勃利縣二龍山)>.  國號<高句麗>, 建元曰<東明>.  

<동명(東明)>원년{단기2297년/BC37}갑신, 2월, <졸본(卒本)>왕 <연타발(延陀勃)>이 죽었다. <소서노(召西奴)>

나라를 <순노(順奴)>에 바쳤고, <졸본(卒本)>사람들이 상을 받들어 황제로 모시니, <비류곡(沸流谷)><서성산

(西城山)(발이현이룡산)>에서 즉위(卽位)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리(高句麗)>로 하고, 연호를 세워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이 기록은 고구리(高句麗)를 건설하기 전(前)에 순노부(順奴部)를 여셨는데,  이때 세 현인(賢人)이신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黙居)의 협력을 얻어 적극적으로 호(虎)와 갈(鞨)을 쫓고, 또 이 순노부(順奴部)에 졸본국(卒本國) 을 소서노(召西奴)가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졸본국(卒本國)의 위치를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 근처임에 비해서
순노부(順奴部)가 있었던 곳은 제제합이(齊齊哈爾: 치치하얼)쪽에 있었다고 추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구리(高句麗)의 오부(五部)는 ‘진한육부(辰韓六部)’와 채널링(channeling)되어 있다.

고구리(高句麗)의 오부(五部)는 결코 이것이 ‘괄할 지역’의 개념이 아니고, 오히려 ‘관할 통로(通路)’ 즉 채널(channel)과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관할 통로’는 진한육부(辰韓六部)와 관련되어서 배달화백과의 관련성에서 주로 그 기능(機能)이 ‘자리매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노부(順奴部)는 어떤 진한육부(辰韓六部)와 관련성이 있을까?”
바로 습비부(習比部)와 사량부(沙梁部)입니다. 그런데, 습비부(習比部)는 화백(和白)과 신시(神市)를 주축으로 하는 순방체제(淳庬體制)에 동원되는 ‘7개의 신시(神市)의 화폐를 구성(構成)해 주는 역할’을 하는 부서(部署)인 것이지요.

당시대 때 동북아 최대의 재력(財力)을 지녔던 소서노(召西奴)께서 졸본국(卒本國)의 모든 재력(財力)을 ‘신시(神市)의 화폐’로 전환하여 고주몽-추모대제(芻牟大帝)에게 맡기는 일을 하였고,  따라서 “이런 일을 하는 습비부(習比部)와 통로(通路)가 있는 동부(東部)인 순노부(順奴部)에 졸본국(卒本國)을 맡겠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습비부(習比部)와의 통로(通路)’를 지니고 있는 오늘날 제제합이(齊齊哈爾: 치치하얼) 쪽의 지역에 있는 순노부(順奴部)를 열 때,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들인 호(虎)와 갈(鞨)에 대해서 현인(賢人)이었던 세 사람 즉

- 재사(再思), 무골(武骨), 묵거(黙居)가 관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순노부(順奴部)와 동일시되는 환나국(桓那國)의 여왕(女王)이 바로 계후(桂后)라는 점이 우리를 몹시도 “도대체 계후(桂后)의 정체가 무엇인가?” 함에 궁금께 합니다.

“여왕(女王)이 나라를 바치고, 신기하게도 사랑하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은 후 이를 안전하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신궁(神弓)으로 유명한 남편의 어가(御駕)를 전쟁때 마다 지키다가 전사(戰死)하다니 ??!!” 하는 역사의 기록 자체가 매우 특이한 것입니다.

아시아(Asia)최고 무가(武家) 환나국(桓那國)의 깊은 영향

환나국(桓那國)이란 어떤 나라인가? 이 환나국(桓那國)은 바로 오늘날 흑룡강(黑龍江)과 목단강(牧丹江)근처에 있었던 습비부(習比部)의 다양한 기능 가운데서 한 부분을 맡는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나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엄사수(淹氵虒水)게임(game)을 할 때,  ‘뿔 범’ 철가면(鐵假面)을 한 기사단(騎士團)을 운영해서 배달화백의 신성성을 보장하는 ‘역할’인 것이지요. 또한 이 배달화백을 하는 동안의 여러 물류(物流)의 운송(運送), 또 신시(神市)의 화폐를 책임 운송하는 등의 역할도 바로 환나국(桓那國)에서 했으리라고 추측되는 것입니다.

환나국(桓那國)의 환(桓)은 물류(物流)거래시 역참(驛站)에 걸어둔 물표(物標)를 고대에서는 환(桓)이라고 했으니깐 말입니다. 말하자면, 환나국(桓那國)은 일종의 중요한 화물(貨物)과 인물의 이동에 이를 호송(護送)하는 일 - 소위 표국(驃局을 국가적으로 하는 그런 신기한 나라였던 것이지요. 물론 습비부(習比部) 자체의 기능(機能)이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환나국(桓那國)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환시장에서 쓰이는 돈(money)을 신시의 화폐로 바꾸었을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경제적인 문제를 검토하는 그런 기능도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습비부(習比部)와 채널링(channelling)되어 있는 순노부(順奴部)를 개척할 때에는 재사(再思), 무골(武骨)및 묵거(黙居)등의 현인(賢人)이 필요했으리라고 보는것입니다. 아무튼, 고주몽(高朱蒙) 동명성왕(東明聖王)이 엄리대수(奄利大水: 흑룡강(黑龍江)으로 추정)하여 “아시아(Asia)의 세계질서를 이런식으로 바꾼다.”는 것이 엔딩-룰(ending-rule)을 적용시킬 때,  

‘뿔범’ 철가면(鐵假面)을 기사단(騎士團)을 총괄 운영했던 여왕(女王)이 바로 계후(桂后)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환나국(桓那國)은 ‘표국(驃局)들이 연합 성장하여’ 국가로 되어 있는 국가였던 것이지요. 어떤 화물(貨物)과 인물(人物)의 이동을 호송(護送)무사(武士)를 지니면서, 끝까지 책임지는 일을 하는 것을 표국(驃局)이라고 합니다. 이 표(驃)는 “말(馬)로 물표(物標)를 나른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만주(滿洲)일대에는 관경삼국이 일어날 시절에 전설적인 무역국(貿易國)이 두 개나 있었습니다. 하나는 갈사국(曷思國)으로써 오늘날 요동반도에 자리잡으면서, ‘씰크-로드(silk-load)’ 교역을 좌지우지한 나라였고, 이곳에서 거만(巨萬)의 부(富)를 축적한 분이 연타발(延陀勃)인데, 그 따님이 소서노 어하라(於瑕羅)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구다국(句茶國)으로써 그 국명에 들어나듯이 차(茶)와 말(馬)을 국제적으로 교역하는 무역국(貿易國)인데,  아마도 오늘날 제제합이(齊齊哈爾: 치치하얼)에서 합이빈(哈爾濱: 하얼빈)에 자리잡은 듯 합니다. 그런데 이런 무역국가를 끼고 있는 환나국(桓那國)은 저절로 표국(驃局)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겠지요.  

진한육부(辰韓六部) 중에 하나인 습비부(習比部)가 오늘날 흑룡강(黑龍江)과 목단강(牧丹江)에 자리잡게 되자, 이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이 책임지는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엄사수(淹氵虒水) 게임(game)을 할 때, 사표(虒驃) -이는 ‘뿔범’철가면(鐵假面)을 쓴 표국(驃局)의 기사단(騎士團)을 환나국(桓那國)의 왕실(王室)이 직접 제공하는 일을 하기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즉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이 바로 습비부(習比部)의 사표(虒驃) 기사단(騎士團)을 독점 공급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워낙 습비부(習比部)에서 신시(神市)의 화폐로써 ‘나라’를 형성해서 이 화폐와 함께 ‘흐르는 나라’를 호송(護送) 하는 일을 맡게 되다보니깐,  대부분의 백성(百姓)이 표국(驃局)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나라로써는 자연스럽게 자국의 백성을 ‘벅수군’에 가입시키고, 이 ‘신시(神市)의 7가지 화폐’와 더불어 ‘흐르는 나라’의 호송(護送)을 책임지는 ‘특수 벅수군’의 운영하게 된 것입니다.

이 ‘벅수군’을 편의상 환나(桓那)-‘벅수군’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어릴때부터’ 최고급의 사표(虒驃)-무사(武士)로써 훈련을 맡는 동시에 환나(桓那)-‘벅수군’의 장군(將軍)으로 수련(修練) 받으면서 자라나는 사림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환나국(桓那國) 왕실 사람들은 ‘최고급의 경호무사(警護武士: body guard)’인 동시에 ‘환나(桓那) 벅수군’의 장군(將軍)으로써 훈련받으면서 키워지는 것이지요.  

환나국(桓那國)과 고주몽-추모대제의 관계,

그리고,  이런 환나국(桓那國) 입장에서보면,  고주몽(高朱蒙)-추모(芻牟)는 환나국(桓那國)의 모든 사표(虒驃) 무사단(武士團)을 총동원해서라도 지켜야하는 가장 중요한 화물(貨物(?)인 것이지요. 그가 아시아(Asia)의 뭇 천독들이 새로운 이시대의 대안(對案)을 제시한 사람으로써 인정한 인물이니깐 말입니다.

환나국(桓那國)의 사표(虒驃) 무사(武士) 입장에서는 “나는 바로 추모(芻牟)의 경호(警護)를 맡았던 사람이다.” 라는것 하나로만도 삶의 의미를 느낄수 있었을 겁니다. 당연히 목숨을 걸고 보호해야할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사실은 고주몽(高朱蒙) 추모대제께서 엄리대수를 건너는 엄사수(淹氵虒水) 게임을 할때부터 고주몽(高朱蒙)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신변(身邊)을 책임지는 모든 책임을 계후(桂后)가 질 수밖에 없었음을 뜻합니다.

계후(桂后)의 계(桂)는 ‘계수(桂樹)나무’를 뜻하는데,  이는 달(月)에 있는 나무인 것이지요. 그런데 달(月)은 ‘땅의 달’인 바이칼과 관련되어 ‘벅수군의 상징’으로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계후(桂后)란 말 자체가 ‘벅수군의 생명나무’라는 매우 비중이 높은 이름을 지녔음을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계후(桂后)는 결국 ‘뿔범’-철가면(鐵假面) 경호무사(警護武士)들의 수장(首長)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환나국(桓那國)은 신시(神市)의 일곱가지 화폐로써 ‘나라들이 흐르는 것’을 지켜주는 가장 격조(格調) 높은 ‘환나(桓那) 벅수군’을 지휘하는 무장(武將) 가문(家門)이기도 하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 환나국(桓那國)은 <아시아(Asia) 최고의 무문(武門)>이었던 것이지요.  

계후(桂后)께서는 이런 ‘사표(虒驃) 무사단(武士團)’의 단장(團長)인 동시에 ‘환나(桓那)-벅수군’을 지휘하는 사령관(司令官)이자 여왕(女王)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계후(桂后)가 환나국(桓那國)의 여왕이었기 때문에, 그 후손(後孫)들은 기본적으로  어릴 때부터 ‘뿔범 무사단’을 지휘할 수 있는 무술 훈련은 물론 ‘최강의 환나(桓那)-벅수군’을 지휘하는 훈련을 철저히 한 무장 (武將)으로써 키워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복잡하게 꺼내는가?”  
계후(桂后) -만후(曼后)-양인왕(昜人王)-호력왕(虎力王) 그리고 호력왕(虎力王)의 후손들은 상황이 어찌 변하든 사표(虒驃)-기사단(騎士團)과  ‘환나(桓那)-벅수군’을 지휘하는 수련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것이고, 또 이에 따른 ‘세습적(世襲的)인 우선권(優先權)’이 있는 환나국(桓那國)의 왕손(王孫)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환나국(桓那國) 여왕(女王) 계후(桂后)가 이루어낸 일

<행동(荇東)과 구다국(句茶國)의 연합>에 의한 반란의 평정, 다시 시조추모대제기(始祖芻牟大帝紀) 상에 들어나 있는 계후(桂后)와 관련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시다.

계후(桂后)는 아무튼 고주몽(高朱蒙)-추모(芻牟)께서 엄리대수(奄利大水)를 넘을 때부터 - 이 아시아(Asia)의 새로운 시대의 대안(代案)을 지키기 위해서 신변보호를 해야 할 책임이 있었던 것이지요.  

환나국(桓那國) 여왕(女王)이 왜 추모대제(芻牟大帝)의 소후(小后)가 되었나?

신변보호를 하는 여무장(女武將)이 계속 고주몽(高朱蒙) 추모대제를 밤이나 낮이나 지키고 있으면, 가장 묘(妙)한 입장에 서는 것이 추모대제(芻牟大帝)의 왕후(王后)들이 됩니다. 왜냐면 자신이 남편과 성(性)을 즐기는 동안, 같은 여자인 사람이 ‘늘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지키고 있으면, 같은 여자로써 “저 여자는 나보다 내남편을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데, 왜 내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지?!” 하는 이상한 혼란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서노(召西奴) 황후(皇后)께서는 “당신이 직접 후(后)가 되라.” 그러면 더욱 밀착(密着) 경호(警護)도 되고, 내남편을 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여자가 내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는 부담감이 없어지게 도와달라."를권유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계후(桂后)는 원래 환나국(桓那國)이 소속되어 있던 순노부(順奴部)에 나라를 바치고, 이는 환나국(桓那國)의 역할이 순노부(順奴部)의 기능에 종속된다는 의미임. 당연히 계속 ‘뿔범 무사단’의 지휘권은 계후(桂后)에게 있음 -  고주몽(高朱蒙)-추모대제(芻牟大帝)와 결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시조추모대제기(始祖芻牟大帝紀) 3년{단기2299년/BC35}병술 10월 조(條)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三年丙戌, ---중략(中略)----
十月, 祀隧, 群鳩播麥于神田.  <桂婁>生子<高婁>, 爲人尙義忠孝, 陛爲小后.  十二月, <宝得(黃龍主)>女<禾>爲妃. 召<祖天>于<河>濱(哈爾濱), 不來.

"3년{단기2299년/BC35}병술, ---중략(中略)----
10월, 동굴무덤에 제사하였더니, 비둘기 떼가 신전{神田; 제물로 바쳐질 곡식을 가꾸는 들판}에 파종하였다.  

<계루(桂樓)>부인이 아들 <고루(高婁)>를 낳았는데, 사람됨이 의·충·효를 귀하게 여기기에, 소후(小后)로 올려 주었다. ‘뿔범 무사단’을 이끄는 환나국(桓那國)의 책임의식은 아주 투철(透徹)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자랄 때부터 무술 수련과 더불어 의(義)와 충(忠)과 효(孝)를 위해 늘 죽어가야함을 정신교육을 받으면서 자랐기에, 뛰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소후(小后)로 격(格)이 높아지는 이유를 이처럼 “의(義)와 충(忠)과 효(孝)가 높아서...”로 기재하는 것은 ‘뿔범 무사단’을 지휘해서 고주몽(高朱蒙)-추모대제(芻牟大帝)를 지키는 여무장(女武將)임을 이해할 때만이 이런 기록이 있는지?”가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후(桂后)가 전쟁에서도 고주몽(高朱蒙)의 어가(御駕)를 지키시다가 돌아가신 사건이 묘하게도, 바로 행인국(荇人國)과의 전쟁과 관련된다는 면에서 우리는 유의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추모대제(芻牟大帝)도 ‘공격 불가능한  행동(荇東)’의 반란.

‘고구리 사초’ 추모대제기(芻牟大帝紀) 7년{단기2303년/BC31}경인 10(?)월 조(條)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十{十一?}月, <桂>皇后, 以創毒崩, 上慟哀之, 作<吾妻曲>. 后能騎射, <荇人>·<句茶>之戰, 扈駕立功, 中流矢於<黃山>. 春秋三十二. 葬于<眞珠山(珠河)> 子<高婁>·<曼>公主, 皆賢.

10월{11월?}, <계(桂)>황후가 상처가 썩어 죽으니, 상(上)은 이를 애통해 하여, <오처곡(吾妻曲)>을 지었다. 황후(皇后)는 말 탄 채 활쏘기를 잘하여서, <행인(荇人)>및 <구다(句茶)>와 전쟁할 때 어가(御駕)를 뒤에서 호위(護衛)하며 공(功)을 세우다가, <황산(黃山)>에서 흐르는 화살에 맞았었다. 춘추 32세였으며, <진주산(眞珠山)(주하)>에 장사하였다. 아들 <고루(高婁)>와 <만(曼)>공주 둘 다 현명했다.

문제는 계후(桂后)께서 상대한 나라가 바로 비류선제(沸流仙帝)의 선제후(仙帝后)이신 벽라후(碧蘿后)의 모국 (母國)인 행인국(荇人國)과 구다국(句茶國)이 연합한 전쟁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고구리(高句麗)의 3대 즉 동명성왕(東明聖王)-유리명왕(琉璃明王)-대무신왕(大武神王)에 걸쳐서 가장 곤란했던 전쟁 - 동부여와의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 비중(比重)이 높은 것입니다.

"서로 대치(對峙)된 두 무역국(貿易國) - 갈사국(曷思國)과 구다국(句茶國)

오늘날 만주지방의 무역국(貿易國) 중에 하나인 갈사국(曷思國)의 연타발(延陀勃)과 소서노(召西奴)는 고주몽(高朱蒙) 추모가 내거는 봉건주의에 지배를 받는 중국대륙 ‘안’에 신시(神市)와 화백을 중추로 하는 순방체제를 ‘평화공존’하면서 운영할 수 있다는 매스터-플랜(master-plan)에 찬성하여서 적극적으로 돕는 측으로 나섰던 것이지요.

구다국(句茶國)은 계속 “더러운 봉건주의에 물들은 중국대륙을 왕따시키면서 씰크-로드(silk-load)의 교역의 이익을 우리 순방체제(淳庬體制)를 믿는 사이(四夷)들이 가지는 것이 옳다.”고 반기(反旗)를 든 것입니다.

배달화백에 의해서 천독(天毒)들의 뜻을 모음에 있어서, ‘연극-굿’을 통해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행인국 (荇人國) 가운데 행동(荇東) 사람들이 이러한 구다국(句茶國)의 주장에 동조(同調)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추모대제(芻牟大帝)때 벽라후(碧蘿后)의 부친(父親)이신 조천(朝天)께서 “추모(芻牟)의 혁명은 옳지않아...”하고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행동(荇東) 쪽으로 피신한 것을 통해서 이 행동(荇東)지역의 행인(荇人)들의 정서를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동부여는 이런 만주-한반도 일대의 ‘반(反)-고주몽 정서’와 궤도를 같이해서 그 흐름이 무려 3대까지 유지시킨 나라였던 것이지요. 그 최초 발단이 이 <구다국(句茶國)과 행동(荇東)의 연합>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반기(叛旗)에 대해서 추모대제(芻牟大帝)께서 전략적으로 대응하기 무척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구다국(句茶國)이야 추모대제(芻牟大帝)의 친위군(親衛軍)을 끌고가서 격파해버리면 그만인데, “행동(荇東)은 절대 그렇지 못하다.”는데 있습니다.

추모대제(芻牟大帝)의 디렘마(dilemma) - “행인국(荇人國)을 공격하는 것은 곧 최강의 ‘벅수군’ 육부군(六部軍) 을 상대로 하는 것이고, 또한 정당성이 없다.” 이들은 ‘배달화백을 할때 연극-굿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공격하는 것은 곧 배달화백을 파괴하는 반체제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벅수군’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 바로 배달화백을 하는 진한육부(辰韓六部)의 육부군(六部軍)입니다. 배달화백의 신성성과 안전성을 일체 모든 왕권(王權)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군대이기 때문에,  전쟁을 해서 이길수도 없거니와, “추모가 육부군(六部軍)과 싸웠다.”고 하면 추모(芻牟)로써의 합법적 권위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荇東) 지역의 행인국(荇人國)사람들은 아주 마음놓고, 추모대제의 뜻에 반항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즉 만주(滿洲) 주변의 호수(湖水) - 예를 들면 경박호(鏡泊湖), 흥개호(興凱湖), 천지(天池) 등등에서 배달화백이 열릴 때,  추모대제(芻牟大帝)의 뜻에 반대되는 의견이 지불권과 간섭권을 얻어서 ‘연극-굿’의 공연을 요청하면, 아주 감동적(感動的)인 내용으로 하고,  반대로 추모대제의 뜻과 같은 의견이 지불권과 간섭권을 얻어서 ‘연극-굿’ 의 공연을 요청하면,  “마지못해서 무미건조하게 공연(共演)하는 식으로 반항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행동(荇東) 사람들의 편파적(偏頗的)인 ‘공연(共演) 방식’에 대해 ‘군사적’으로 응징할 수 있는 방법이 추모 대제(芻牟大帝)는 지니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행동(荇東) 사람들 뒤에는 배달화백의 신성성을 지키는 ‘최강예 벅수군’인 육부군(六部軍)이 버티고 있기때문에,  추모대제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행동(荇東)을 유일하게 제압할 수 있는 환나국(桓那國)의 여왕(女王)

이 행동(荇東)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군대가 바로 <환나(桓那)-벅수군>인 것이지요.<환나(桓那)-벅수군>은 신시(神市)의 화폐를 운송(運送)하는 것을 지키는 벅수군이고, 이 행동(荇東)사람과 다른 지역의 행인(荇人)들 즉 행서(荇西)사람들과 행남(荇南) 사람들의 ‘연극-굿’에 대한 다른 의견을 화폐형태로 운송(運送)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벅수군>과 <벅수군>이 부닥칠 때에는 서로가 총동원(總動員)해서 전투하기를 즉각 중단하고,  ‘당사자(當事者)들 끼리의 직접해결’할 때까지 관망상태로 대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환나(桓那)-벅수군>을 이끌고 행동(荇東)지역에 닥아서서, “행인(荇人) 사람들이여.. 왜 편파적으로 연극-굿을 하는가?” 함을 행서(荇西)및 행남(荇南) 사람들의 의견을 행동(荇東)사람들 앞에서 화백회의로써 과감하게 말할 수 있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때 추모대제(芻牟大帝)는 참고인(參考人)으로써 나와서 행동(荇東)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뜻을 직접 말함 으로써 오해(誤解)를 풀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와중(渦中)에서 행동(荇東) 사람들이 불법적으로 기습(奇襲)을 해왔고, 계후(桂后)는 환나국(桓那國)의 여왕 신분도 있기 때문에,  행서(荇西)및 행남(荇南) 사람들을 대동(帶同)하고온 <환나(桓那)-벅수군>에게 공격 권 조서(詔書)를 내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행동(荇東) 사람들은 “환나(桓那) 벅수군이 행동(荇東)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따라서 이 기회에 숫제 추모대제(芻牟大帝)를 없애자”고 추모대제(芻牟大帝)의 어가(御駕)를 집중공격하게 된 것 이지요. 그런데 계후(桂后)는 사표(虒驃)-경호무사(警護武士)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 추모대제(芻牟大帝)의 집중적인 공격을 막다가 그만 화살에 맞아서 죽게 된 것입니다.

계후(桂后)의 죽음은 그녀가 원래 흑룡강, 목단강 등 만주일대와 한반도 북부의 일체의 표국(驃局)을 관장 하는 환나국(桓那國)의 여왕이고, 또 존경을 받았던 분인지라,  반(反)-고주몽(高朱蒙) 기치가 숙으러들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여간 계후(桂后)가 아니었으면, 배달화백(倍達和白)때 반(反)-고주몽 연극-굿을 하는 행동(荇東) 사람들을 평정 하는 것은 불가능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고주몽-추모대제께서는 이런 계후의 죽음 때문에 오처곡(吾妻曲)을 지으시어... 또한번 만주와 한반도 북부 사람 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 고주몽-추모대제께서는 행동(荇東)을 계후(桂后)께서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써 진압하자,

구다국(句茶國)을 자신의 친위병으로 마음놓고 공격케 된 것입니다. 이 ‘행동(荇東)-구다국(句茶國)의 반란’ 사건이 엉뚱한 결과를 가지고 옵니다.

계후(桂后)의 죽음이 가져온 벽라후(碧蘿后)와 만후(曼后)의 독특한 관계

계후(桂后)의 딸인 만후(曼后)가 출생한 1년 후에 어머니가 전사(戰死)하셨기 때문에, 모정(母情)을 느껴본 적이 없으신 것입니다. 만후(曼后)는 환나국(桓那國) 왕실 사람답게 어렸을 때부터 최그급의 경호무사 훈련을 받으시고, 또 나가가 <환나(桓那)-벅수군>을 지휘하는 여무장(女武將)으로써의 모든 경륜을 익히셨던 것입니다.  

1) 비성(泌城)의 <내궁(內宮=내액(內掖)>과 외궁(外宮)=j외액(外掖)의 개척을 하면서 내액(內掖)을 환나국(桓那國)의 조차지(租借地)로 한 까닭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께서 미추홀(彌鄒忽)과 칠중(七重)구지(衢地)를 개척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지역이 배달화백을 하는 곳이고, 그러자면 자연히 신시의 화폐를 운송해오는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참고용지도’에 안구(安丘)라고 되어 있는 지역을 환나국(桓那國)에 조차지(租借地)로써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조차지(租借地)라는 것은 영토(領土)를 빌려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환나국(桓那國) 왕실 사람들 만이 ‘신시(神市)의 화폐’를 배달화백의 ‘말발’ 형태로 사신(使臣)과 또 귀빈(貴賓) 이 들어왔을 때, 이들을 비성(泌城)-외액(外掖)에 모시고, 경호를 하면서도 또한 해상(海上)에서 오는 선박들을 군선(軍船)으로써 호위하면서 조수(潮水)-에스칼레이터(escalator)를 타고 대야택(大野澤)까지 육군(陸軍)이든 해군(海軍)이든지 간에 <환나(桓那)-벅수군>을 지휘할수 있는 축적된 노우-하우(know-how)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깔대기 구조’의 칠중하(七重河)로부터 조수(潮水)-에스칼레이터(escalator)를 타고 가다보면, 배달화백을 할수 있는 호수(湖水)가 다음과 같이 등장합니다.

칠중하(七重河)-(1)대명호(大明湖)-(2)양산박(梁山泊)-(3)대야택(大野澤)-제수(濟水)-황하(黃河)-(4)궁남지(宮南池) 즉 배달화백을 할 수 있는 호수(湖水)가 넷이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후(曼后)께서는 이런 경호및 선박(船舶) 호송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시 “배달화백 의장(議長)인 비류선제 (沸流仙帝)이고, 또 지불권(支拂權)과 간섭권을 행할 때, 연극-굿을 요청할 때, 이를 펼칠수 있는 노우-하우(know-how)를 지니시고, 소서노(召西奴) 어라하와 마찬가지로 ‘배달어미’ 역할을 하는 벽라후(碧蘿后)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침식(寢食)을 같이하면서 밀착(密着) 경호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반적인 상황전체를 지휘하는 그런 입장에 만후(曼后)는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상한 지휘체계는 결국 두 가지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호송(護送) 선박(船舶)>별 로 나뉘어져 있는 상황실 및 - 이것이 있는 곳이 바로 비성(泌城)-내궁(內宮)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를 지휘하는 사람은 오히려 핵심 경호 대상인 브이.아이.피(V.I.P)에 밀착되어 있는 사람인 것이지요 따라서 환나(桓那)-벅수군은 경호(警護) 선박(船舶)이나 마차(馬車)별로 ‘상황실’과 ‘작전실’이 꾸며지되,  최종적인 결정권은 경호해야할 대상에 밀착되어 있는 담당 경호무사장(警護武士長)에게 긴급히 상황을 보고와 참모제안을 하고, 즉각적으로 작전지시를 받는 그러한 체제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런 체계에서는 환나(桓那) 벅수군 혹은 경호무사들이 출입구에 그 주력(主力)을 지니거나 혹은 가장 빨리 신속 파견할수 있는 곳에 주력(主力)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비성(泌城) 내성(內城)은 환나국(桓那國) ‘벅수군’의 조차지(租借地)가 될 수밖에 없었고, 또 저 협산(峽山)및 백맥(百脉) 대수고에는 ‘환나국(桓那國)의 군선(軍船)’들이 신속파견되기 위해서 산정호수(山頂湖水)에 늘 진(陣)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호무사(警護武士)를 이끌고, 밀착 경호를 하는 경호무사장(警護武士長)은 경호대상 과 더불어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지요. 이런 이유에 의해서 만후(曼后)는 자신의 어머니인 계후(桂后)가 소서노(召西奴)어하라에 의해서 소후(小后)로 천거받듣이, 똑같은 이유로 벽라후(碧蘿后)에 의해서 소후로 되고, 그결과 양인왕(昜人王)을 낳게 된 것입니다.

환나국(桓那國)-왕실(王室) 사람들은 어릴때부터 ‘자기가 경호하는 대상을 위해서는 늘 자신의 생명을 거는 것’을 친척(親戚)들의 협조에 의해서 늘 교육받고 크기 때문에, 신기하게도 공주(公主) 출신의 경우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을 경우, 즉각 그 자식을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사람으로 생각하지 결코 그 남편의 ‘핏줄’이라고 생각을 안하는 이상한 전통을 낳았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계후(桂后)가 낳은 고루(高婁)의 경우, 고주몽(高朱蒙)의 후손이기 때문에,성씨(姓氏)도 고(高)를 지니지만, 당시대 때 사람들은 “고주몽을 밀착경호한 계후(桂后)의 아들”이라는 인상이 더 강했고, 또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즉 이들 환나국(桓那國) 왕실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과 세계가 자신의 생명이 꺼지는 것보다 먼저 없어지는 것을 도저히 용서치 못하는” 정신적인 자세와 온갖 노우-하우(know-how)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지라,  계후(桂后)의 딸로써 만후(曼后)를 기억하고, 고주몽은 단지 계후(桂后)가 목숨바쳐서 사랑한 남자나 경호한 남자로 인식하고, 또 양인왕(昜人王)은 만후(曼后)의 아들로 인식하고, 비류왕(沸流王)은 단지 만후(曼后)가 사랑하고, 경호한 남자로 인식하는 그런 정신적인 법맥(法脈)을 이끌어나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중요한 것은 그당시 사람들은 양인왕(昜人王)자신도 자신의 ‘아버지’가 비류왕(沸流王)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어머니인 만후(曼后)가 목숨을 걸고 사랑한 ‘위대한 남자’라고만 생각을 하지 “내가 저사람의 아들 이니깐 백제의 소도(蘇塗)를 계승함이 당연하다.”라는 생각이 전혀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사람들의 특이한 사고방식 때문에,  백제의 소도(蘇塗)에는 마음놓고, 배달화백의 ‘말발’을 선박에 싣고들어올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즉 환나국(桓那國) 왕실 사람들이 아니면,  소도(蘇塗)가 활성화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점차 싸이자,  고구리 황실이 그 대표적이고, 또 백제의 왕가(王家)도 마찬가지로... “저 환나국(桓那國) 이 곧 ‘배달화백’ 그 자체이다.” “따라서 육부군(六部軍) 위에 엄사국(淹氵虒國)을 올려놓는 것이 합당하다.”는 괴상한 그리움이 생겼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시아(Asia)최대의 무가(武家)가 만들어낸 이상한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구리(高句麗) 왕실(王室)이 이 환나국(桓那國) 왕실에 빚을 졌는지를 그러면 살펴보도록 합시다.


고구리(高句麗) 삼대(三代)가 모두 빚을 진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의 가계(家系)

"광명대제(光明大帝)가 비류선제(沸流仙帝)의 두 왕후(王后)에 대해 고마움을 지닌 까닭 고구리의 2대인 광명대제는 비류선제(沸流仙帝)와 벽라후(碧蘿后)에 대해서 깊은 고마움을 지니고 있음은 틀림없습니다.

온조(溫祚)와 비류(沸流)가 ‘고구리(高句麗)의 왕권(王權)’을 자신에게 선선히 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광명대제(光明大帝)께서는 만후(曼后)에 대해서도 깊은 고마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지요.

유리명왕(琉璃明王)의 기반(基盤)은 결국 전통적인 부여의 기반인 오늘날 청해(靑海)및 감숙성 일대인데,  만후(曼后)의 어머니이신 계후(桂后)께서 왕따 당하던 행서(荇西) 사람들의 정서를 배달화백에서 활성화되도록 <행동(荇東)및 구다국(句茶國)의 반란>때 살신성인(殺身成仁)함으로써 소통시켜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광명대제(光明大帝)께서 배달화백의 과정을 통해 합법적으로 고주몽-추모대제(芻牟大帝)의 왕권(王權)을 쉽게 이어받있기 때문에, 계후(桂后)의 후손에 대해서 깊은 고마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계후(桂后)의 아들 고루(高婁)가 고구리(高句麗)의 단군이 되어 비상계엄(非常戒嚴)을 동부여에 걸것을 기다린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 계후(桂后)의 아들이신 고루(高婁)는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 - 다시 말하면,  독특한 사표(虒驃) 경호무사 훈련과정과 또 환나(桓那) ‘벅수군’의 무장(武將)답게 고구리 ‘안’에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궁궐(宮闕)의 안위(安危)를 맡기는 일부터 맡았음이 광명대제기(光明大帝紀)에 드러납니다.

二年癸卯, 正月, 改元<琉璃光明>.  <再思>太輔, <陜父>左輔主民大加, <芬奴>右輔主兵大加, (*)<高婁>主宮大加,(*)---후략(後略)----

"2년{단기2316년/BC18}계묘, 정월, 년호를 <유리명왕(琉璃明王)>으로 고쳤다. <재사(再思)>를 태보(太輔)로, <협보>를 좌보로서 주민담당 대가로, <분노>를 우보로서 군사담당 대가로, <고루(高婁)>를 궁궐담당 대가로 삼고---후략(後略)----이러면서 고루(高婁)는 점차 고구리 사회에서 소도(蘇塗)와 가까운 일을 맡기 시작합니다.

"五年丙午, 正月, 以<香>公主妻<高婁>="5년{단기2319년/BC15}병오, 정월, <향>공주를 <고루>의 처로 삼았다.

"四十四年乙酉, 二月, <高婁>太輔, --후략(後略)= "44년{단기2358년/AD25}을유, 2월, <고루(高婁)>를 태보(太輔)로 삼았다.

태보(太輔)란 직위는 화백회의와 왕(王)의 <어전(御前)회의(會議)>를 조정하는 직책입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태자(太子)가 - 이는 고구리(高句麗)에서 소도(蘇塗)의 선왕(仙王)을 칭하는 용어임 - 되었음이 대무신대제기(大武神大帝紀)에 등장하지만,  환나국(桓那國) 왕실 사람답게 계속 ‘가장 믿을수 있는 무장(武將)’의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납니다.

*이하 대무신대제기(大武神大帝紀) 임 *

"四年辛卯, 十二月, 以右輔<乙豆智>爲行軍大注簿, 親征<東扶餘>, 至<利勿林({舂}得利界)>(*)宿夜, 聞金聲, 使人尋之, 得金璽宝劒等兵物. <高婁>曰: “天賜也.”, 上拜受之.(*)翌日, 得<北溟>人<怪由>爲先鋒, <赤谷>人<麻盧>爲遊擊, 進援括街({拕}遠)<松江(通江)>.  是年, 上納<芻殼素>妻, 爲<大室>夫人.

"4년(단기2364년/AD31)신묘, 12월, 우보 <을두지>를 행군대주부로 삼고, 친히 <동부여>를 정벌하려 <이물림({용}득리계)>에 이르러

*밤을 지내는데, 쇠붙이 소리가 들리기에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하였더니, 금새{금도장}와 보검 등 병물을 얻었다. <고루(高婁)>가; “하늘이 내려 준 것입니다.”라 하니, 상은 엎드려 받았다.*

다음날, <북명>사람 <괴유>를 얻어 선봉으로 삼고, <적곡>사람 <마로>를 얻어 유격으로 삼아 <송강(통강)>으로 나아가는 길을 도맡아 돕게 하였다.  이 해에 상은 <추각소>의 처를 거두어서 <대실>부인으로 삼았다.- 각설(却說) 위 기록에서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는 고루(高婁)가 환나국(桓那國) 즉 아시아(Asia)최고의 무문(武門)인 동시에 전 백성이 표국(驃局)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신병(神兵)이기(利器)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신뢰하였음이 드러납니다.

고루(高婁)가 “이것은 하늘이 준 것입니다.” 하면 하등의 의심없이 업드려 받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처럼 깊이 환나국(桓那國) 왕실 후손을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가 극히 아끼는 이유는 물론 순수한 존경심이 그 이유겠지만, 또 간절히 품고 있던 소망도 있었던 것입니다.

五年壬辰, 二月, 進軍於<柵城>之南, 營于高丘, 四面泥濘, 人馬俱沒于泥中. <高婁>太子軍, 與<帶弗>, 戰于泥中, 太子立於軍前, 督軍, 中流矢而落馬, 兵不能, 故不能救之. 上召<怪由>命救之,

<怪由>拔劒號吼越泥擊之, 一軍賴鎰力, 直衝本陣, 執<帶弗>斬頭而出, 餘衆驚潰.(**)
<帶万>軍亦披靡而退己, 而知其兄死, 號哭誓死而進諸軍, 圍高丘數匝.

"5년{단기2365년/AD32}임진, 2월, <책성>의 남쪽까지 진군하여 높은 언덕에 진영을 차렸는데, 사면이 진창이어 인마가 모두 진창에 갇히게 되었다. <고루(高婁)>태자의 군대가 진창 속에서 <대불(帶弗)>과 맞붙어 싸웠는데, 태자(太子)가 군대의 앞에 서서 싸움을 독려하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으나, 병사들이 어찌할 도리가 없어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上)이 <괴유(怪由)>를 불러 태자(太子)를 구하라 명하니, <괴유(怪由)>가 칼을 빼어들고 크게 고함지르며 진탕을 넘어 들어가 <대불(帶弗)>의 군사를 무찌르자, 한 무리의 군사들이 이에 힘입어 적(敵)의 본진(本陣)을 곧바로 들을쳐서 <대불(帶弗)>을 잡아 목을 치고 내달으니, {<대불(帶弗)>의} 나머지 군사들은 놀라서 무너졌다. <대만>의 군대도 아수라장에서 물러나더니만, 자기의 형이 죽은 것을 알고는, 호곡하면서 죽기를 맹세하고 모든 군사를 진격시켜, 그 높은 언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 각설(却說)

이때 “고루(高婁)가 고구리의 태자(太子) 즉 선왕(仙王)과 단군(檀君)으로써 전역(戰役)에 나섰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권분립(二權分立)이 철저한 사회에서 단군(檀君)은 ‘국가의 영역’을 넘어서서 비상계엄(非常戒嚴)을 걸수가 있기 때문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동부여(東夫餘)와의 전쟁에서 과연 고구리(高句麗)의 단군(檀君)이 비상계엄을 걸 사연이 있었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광명대제기(光明大帝紀) 33년(단기2347년/AD14)갑술 10월(月) 기사에 다음과 같이 등장합니다.

"三十三年甲戌,正月,以<無恤>爲東宮,敎以弓馬用其之術. 七月,以<豆>公主妻<高婁>. 八月,<烏伊>領兵二萬伐<涉臣>拔<勾麗城(林西)>,虜<涉臣>而□, <紫蒙>十二國悉平. 十月<摩離>亦引兵二萬拔<貊窟><貝沙(海拉南屯)>而還. <帶弗>殺<帶素>而自立(<弗><帶伯>之子,一作<金蛙>子).

"33년(단기2347년/AD14)갑술, 정월, <무휼>을 동궁으로 삼고, 군마를 사용하는 전술을 가르쳤다. 7월, <두>공주를 <고루>의 처로 삼았다. 8월 <오이>가 군사 이만을 이끌어 <섭신>을 치고, <구려성>을 뿌리뽑고, <섭신>을 사로잡으니 귀복하였다. <자몽> 열 두 나라(마을)을 모두 평정하였다. 10월, <마리>도 군사 이만을 이끌고 나아가 <맥굴><패사(海拉南屯)>를 정벌하고 돌아왔다.

<대불>이 <대소>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불><대백>지자,일작<금와>자). 즉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는 오늘날 만주(滿洲)일대와 한반도 북부에 평판(評判)이 높은 환나국(桓那國) 왕실 사람인 고루(高婁)가 ‘고구리’의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선왕(仙王) 즉 태자(太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고루(高婁)라면 ‘자식이 애비를 죽이는 동부여(東夫餘)의 패륜(悖倫)에 대해서’ 비상계엄을 걸것이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동부여의 일반 천독(天毒)들은 모두 ‘벅수군’이 지키는 안전한 성(城)에 들어가고,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의 친위군이 직격(直擊)할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런데 그 기다린 날이 왔었던 것이다.

‘고구리 사초’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고루(高婁) 태자는 대소(帶素)를 죽인 대불(帶弗)의 처사에 대해서 ‘소도(蘇塗)의 단군’으로써 비상계엄(非常戒嚴)을 걸었고, 그 결과 친위병을 이끌고 공격을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와중(渦中)에서 고루(高婁)태자는 ‘어머니’이신 계후(桂后)와 똑같이 화살을 맞았던 것입니다. 이때에 대불(帶弗)은 고구리(高句麗) 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고구리(高句麗) 3대에 있어서, 군사적으로나 정당성의 문제에서나 발목을 잡았던 ‘동부여’의 문제가 시원스럽게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도조(都助)의 죽음과 만후(曼后)의 에피소드(episode)

우리가 환나국(桓那國)의 왕실(王室) 사람들에 대해서 그 가계(家系) 추적을 꼼꼼하게 하는 이유는 “환나국(桓那國) 여왕(女王) 계후(桂后)의 딸인 만후(曼后)가 비류선제(沸流仙帝)와 결혼한 사건이 어떤 영향이 있는가?” 를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 훙(薨)시자, 만후(曼后)께서는 고구리(高句麗)로 돌아와 곧 재혼(再婚)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역시 비류선제(沸流仙帝)의 뜻으로 보입니다. 즉 비류선제(沸流仙帝)께서는 소도(蘇塗)의 건강함을 위해서 노력하여야만, “사람들이 ‘권력(權力)에 대한 집착’과 이로 인한 전쟁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덜수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만후(曼后) 역시 남편의 뜻을 그대로 존중 하였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고구리 사초’에는 만후(曼后)께서 비류선제(沸流仙帝)가 훙(薨)하신 뒤, 재혼(再婚)한 도조(都助)하고 관련 해서 매우 신기한 에피소드(episode)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광명대제기(光明大帝紀) 27년{단기2341년/AD8}무진, 3월 조(條)의 다음과 갈은 기사입니다.

"二十七年戊辰, 三月, 賜<解明>死. 是年二十一.  <黃龍>王<烏伊>以宝弓授<解明>, <解明>折之曰: “非我有力也, 弓自不勁.” <烏伊>大慙.  皇后奏曰: “<解明>不愛其妻, 而侮辱國老. 陛下, 何不責之.” 上乃召<解明>, 責之曰: “不愛 <珍>女, 違父母也. 侮辱國老, 輕社稷也. 交通後宮, 淫亂之兆也. 寧其生不若死.” <解明>悲憤, 立槍於<礪津(八虎力 河支流)>而死. 國人愛其好勇而死.  

"27년{단기2341년/AD8}무진, 3월, <해명(解明)>에게 자진하라 했다. 이때 나이는 스물 하나였다. <황룡(黃龍)>왕 <오이(烏伊)>가 보궁(宝弓)을 <해명(解明)>에게 건넸었는데, <해명(解明)>이 이를 부러뜨리고 나서, “내가 힘이 세어서가 아니고, 활이 튼튼하지 못하였다.”라고 말을 하니, <오이(烏伊)>는 엄청 참담하였었다. 황후(皇后)가, “<해명(解明)>은 자기 처(妻)도 아끼지 않고, 나라의 노신(老臣)을 모욕하였습니다. 폐하(陛下)께서는 어찌 <해명(解明)>을 나무라지 않으십니까?”라고 아뢰니, 상은 <해명(解明)>을 불러 책망하길, “<진(珍)>녀를 아끼지 않음은 부모를 거역하는 것이고, 나라의 노신(老臣)을 모욕함은 사직(社稷)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며, 후궁(後宮)과 서로 오감은 음란(淫亂)할 징조이다. 사람들을 편안케 하려면 죽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다.  

<해명(解明)>은 비참하고 억울하여 창을 <려진>{땅}에 세워놓고는 {창 위로 몸을 던져} 자진하였다. 나라 안의 사람들은 용감하게 자진하였음을 좋게 여겼다. -각설(却說)

“왜 해명(解明)을 나무라지 않습니까?”란 말을 한 황후(皇后)는 소서노(召西奴) 황후(皇后)인 소후(召后)이고, 그리고, 이 해명(解明)과 나중에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되는 무휼(無恤)의 어머니는 송후(宋后)인 것이지요. 해명(解明)의 처(妻)인 진(珍)공주는 바로 소서노(召西奴)의 딸인 것이지요. 아무튼 결말은 해명(解明) 태자의 자살(自殺)이라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관련 사료*

관련 사료로써는 광명대제기(光明大帝紀) 23년{단기2337년/AD4}갑자, 2월 조(條)에 다음과 같이 등장합니다.

"二十三年甲子, 二月, 以<解明>爲東宮. 宝算十七. 母, <松>后, 夢鸞乘日而出. 性英明好勇, 形皃亦多肖上, 故以皇后女<珍>公主妻之, 大赦國中.  <松>后生<無恤>于<銀川>新宮, 朱光炤室, 故名宮曰<朱留>, 白鶴盤回岺上, 故名岺曰<鶴岺>.  <鵲>太子浮海入<新羅>.

"23년{단기2337년/AD4}갑자, 2월, <해명(解明)>이 동궁이 되었다. 보령 열일곱이었다. 모친 <송(宋)>후가 란새가 해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르는 꿈을 꾸고 나서 출생하였다. 성품은 영명하고 씩씩함을 좋아하고, 얼굴도 상을 닮은데가 많았다. 그리하여 황후의 딸인 <진>공주를 {해명의} 처로 삼아주고, 나라 안의 죄수들을 크게 풀어주었다.  

<송>후가 <은천> 새 궁전에서 <무휼>을 낳았다. ‘붉은 빛이 실내를 밝혀주었다’ 하여 궁의 이름을 <주유>라 불렀고, 흰 학이 고개 위를 선회하였다 하여, 고개 이름을 <학령>이라 불렀다. <작>태자가 물{바다·하천·호수}을 건너 <신라>로 들어갔다. 그런데, 소서노(召西奴)의 딸, 진(珍)공주는 해명(解明)태자가 죽은 뒤에,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의 왕후(王后)가 됩니다. 그런데, 미모(美貌)가 출중함은 소서노(召西奴)-어라하를 닮았는데, 기품(氣稟)보다는 애교(愛嬌)에만 치중한 것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고구리사초’ 대무신대제기(大武神大帝紀) 5년(단기2365년/AD32)임진, 2월 조(條) 마지막 문단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葬<高婁>太子于<桂>后陵. 上謂<珍>皇后曰: "<桂>后母子爲國而死. 生子當如<桂>后." <珍>后曰: "爲人妻子皆欲爲夫而死. 陛下棄妾而遠征, 妾焉得死乎. 上笑曰:"汝乃再生之人,不亦可愛乎." <珍>以<召>后之出, 容 絶美, 性媚 要寵, 而己初爲<解明>妻, 而不死不勤守寡. 上,十歲以嚴命娶之生子女,雖有外華,皆近不肖,故上言如是.

<고루(高婁)>태자를 <계(桂)>후릉 안에 장사했다. 상(上)이 <진(珍)>황후에게 이르길: "<계(桂)>후 모자(母子)는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살아있는 이들은 마땅히 <계(桂)>후에게 가봐야 한다." 하니, <진(珍)>후 왈: "사람이라면 처자(妻子)들은 모두 지아비를 위해 죽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저를 그냥 놔두고 원정(遠征)에 나서셨습니다, 제가 죽기를 바라십니까?"라 하였고, 상(上)은 웃으며 말하길: "그대는 다시 사는 사람이니, 다시 사랑받을 만하지 아니하오?" <진(珍)>후는 <소(召)>후의 소생인데, 그 용모가 출중하고 성품도 애교가 있어 총애(寵愛)를 탐하였다.

처음엔 <해명(解明)>의 처가 되었다가, 따라 죽거나 과부(寡婦)로 수절(守節)하지도 아니하였다. 상(上)이 십년간(?) 엄명으로 그녀를 취하여 자녀(子女)를 낳게 하니, 오히려 겉모양은 화려해졌고, 가까운 모든이에게 볼성사납게 처신하여, 상이 이렇게 이른 것이다. **관련 사료 1.2 마침* - 각설(却說)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 사람들에 대한 ‘고구리 왕가(王家)’의 존경심은 대단하였고, 또 아시아(Asia)최고의 무문(武門)으로써의 기품(氣稟)들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해명(解明)태자가 돌아가신 기록 그 다음의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재혼(再婚)한 만후(曼后)의 남편이 바로 도조(都助) 태후로 나오는데,  참으로 놀라운 에피소드(episode)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新羅>, 以女妻<鵲>太子.  <溫祚>遷都<漢山(安國{固})>. <신라>는 <작(鵲)>태자에게 왕녀(王女)를 처(妻)로 삼아주었다.  <온조(溫祚)>가 <한산(漢山)(안국)>으로 천도하였다. 七月, <都助>太子薨, 年二十四, <解明>之胞兄也, 性肖其外祖<松讓>, 妄自誇張累被叱責, 見<解明>之死, 慾爲東宮, 使其妻<曼>公主, 請于上. <曼>曰: “在自修, 而不在請.” 煩悶自焦, 觸暑而吐歐, 不起. 時, 人曰: “勇亦死, 懦亦死.”

7월, <도조(都助)>태자가 죽었다. <해명(解明)>의 동복형이었는데, 성품은 외할아버지 <송양(宋讓)>을 닮았다.

{<도조(都助)>는} 자신을 과장하여 여러 차례 질책을 받았었는데, <해명(解明)>이 죽는 것을 보고나서, 동궁(東宮) 이 되고 싶어, 자기의 처(妻)인 <만(曼)>공주를 시켜서 상(上)께 청(請)하라 하니,

**<만(曼)>공주가 말하기를  “스스로 수양(修養)하는 것에서 찾으세요. 청(請)하는 것에서 찾지 말고!”라 하였다. (이에 도조(都助)는) 번민하며 스스로 달아올라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토악질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시절, 사람들은 말하길; “용감해도 죽고, 나약해도 죽음뿐이었다.”고 하였다. - 각설(却說)

우리가 유의할 것은 만후(曼后)께서 재혼(再婚)하신 분이 도조(都助)인데 “태자(太子)로 그 신분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고구리(高句麗)에서 소도(蘇塗)를 관장하는 선왕(仙王)에 대한 칭호(稱號)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태자(太子)들 가운데서 동궁(東宮)이 지정되고, 동궁(東宮)이 나중에 고구리 황제(皇帝)가 되는 것이다.  

송후(宋后)와 동복형(同腹兄)이라고 한 것을 보아서, 도조(都助)의 ‘아버지’는 광명대제(光明大帝)가 아님은 분명 합니다. 그러나, 고구리 국내성(國內城)이 있었던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북경(北京)에서 소도(蘇塗)를 운영하려면, 오히려 이질적인 토후(土侯)를 끌어않을 수 있는 도조(都助)와 같은 사람들이 선왕(仙王)으로써 더욱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권분립(二權分立)의 세계에서 선왕(仙王) 즉 단군(檀君)으로써 소도(蘇塗)을 경영하는 것은 천독(天毒) 들로부터 ‘세계경영’의 지혜를 끌어내는 ‘시회적 명상’을 유도할수 있는 수양과 천독(天毒)들의 권리에 대해서 종교적인 심성을 지니지 않는 사람들, 즉 권력(權力)의 매력(魅力) 이란 관점에서 보면,  고구리의 왕(王) 혹은 황제(皇帝)가 되는 것보다 훨씬 재미가 없는 직책인 것입니다.

이런 도조(都助)에 환나국(桓那國) 공주이신 만후(曼后)께서 결혼한 것은 <환나(桓那)-벅수군>과 사표(虒驃)-기사단을 이끌고,  고구리의 ‘배달화백’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경호(警護)하기 위해서였던 것이지요. 환나국(桓那國) 후손에 대해서 고구리 왕가(王家)가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있음을 그 당시 사람들은 다알고 있었고, 특히 도조(都助) 태자는 이를 아주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빈 동궁(東宮)의 자리를 광명대제(光明大帝)에게 만후(曼后)가 “우리 남편인 도조(都助)에게 ...”라는 청(請) 을 해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만후(曼后)께서는 이런 남편의 태도가 역겹기 짝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환나국(桓那國)의 왕실(王室) 후예답게 - 다시 말하면, ‘뿔범 기사단’의 단장(團長)이자, 환나(桓那)-벅수군의 사령관(司令官)의 입장에서 한마디 한 것입니다.

“(동궁(東宮)이 되려면) 스스로 수양(修養)하는 것에서 찾으세요. 청(請)하는 것에서 찾지 말고!” 바로 이점입니다.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은 아시아(Asia)최고 무문(武門)의 자존심의 의무감(義務感)이 투철한 것이지요. “왜 수련해서 찾지 않는가?! 왜 치사하게 청(請)을 넣어 찾는가?!” 하고 여무장(女武將)으로써 따끔하게 훈계(訓戒)한 것입니다.

원문(原文)의 “在自修, 而不在請.”에서 재(在)의 뜻은 “있다. 존재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뜻이나, “찾다. 새기다.”는 엉뚱한 뜻이 있습니다. (좌계가 사천(史穿) 김성겸 선생의 ‘고구리 사초’의 교필(校筆)을 보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잘못 교필(校筆)본곳이 이 “在自修, 而不在請.”의 해석입니다. 해석은 처음에는 그 행간(行間)의 미묘한 뜻을 모르다가, 나중에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에 관경삼국(管境三國)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점 잘못된 교필(校筆)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이때의 모습이 워낙 여무장(女武將)답게 되었기 때문에,  그만 문득 부끄러움과 자기자신에 대한 황당함이 순간적으로 끓어올라서 결국 죽고말았다는 것입니다. 소위 언살(言殺) 시킨 것이지요. 무장(武將)의 위엄있는 말 한마디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죽는 경우도 있는데, “바로 그 경우가 일어났다.”라는 말을 ‘고구리 사초’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구리 사초’에 이런 언살(言殺)의 이야기가 적혀있는 것은 그만큼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역시 환나국(桓那國) 왕실 후손이야...” 함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이였기 때문입니다. 걸국  <時, 人曰: “勇亦死, 懦亦死.”> - "그 시절, 사람들은 말하길; “용감해도 죽고, 나약해도 죽음뿐이었다. ”하였다."라는 말을 가장 쉽게 세속적(世俗的)으로 말하자면, “마누라 한마디에 즉살(卽殺)한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환나국(桓那國) 공주들의 여무장(女武將)으로써의 위엄(威嚴)이 이렇듯 고강(高强)했다.”고 하기 에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로써 환나국(桓那國) 공주에 대한 모욕을 할 수는 없지 않나..”하는 것도 작용 하였리라 봅니다.

<엄사태창(淹氵虒太漲)> 사건에서 들어나는 것들,

- 엄사왕(淹氵虒王)의 세습(世襲)은 천독(天毒)들의 억지 우상(偶像)
- 만주(滿洲)에 있는 ‘백제(百濟)의 땅’에 대한 유래(由來)를 중심으로.

"엄사왕(淹氵虒王)의 세습(世襲)은 천독(天毒)들의 억지 우상(偶像)

대무신대제기(大武神大帝紀) 14년{단기2374년/AD41}신축, 겨울 11월의 기사(記事)에 의해서 비록 복잡하게 우회(迂廻)하긴 하였지만, 고대사(古代史)의 미스테리(mystery)를 풀수있는 아주 이상한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원문(原文)과 해석 옮김 **

"十四年辛丑, 冬十一月, 有雷無雪. (*)是歲<淹淲>大漲,(*) <彌鄒忽(密山前坪)>盡被水害, 移其民於<西河>, (*)以<淹淲王><虎力>爲<龍山公>(*)

"14년{단기2374년/AD41}신축, 겨울 11월, 천둥은 치는데 눈은 내리지 않았다. 이 해에 (*)<엄사(淹氵虒)>수가 크게 불어나,(*) <미추홀(彌鄒忽)(밀산전평)>이 수해로 초토화 되어, 백성들을 <서하(西河)>로 옮겨야 하겠기에, <엄사왕(淹氵虒王)>인(*) <호력(虎力)>을 <용산공(龍山公)>으로 삼았다. **원문(原文)과 해석 다시 옮김 마침 **

위 기록에서 ‘엄사태창(淹氵虒太漲)’이란 기상 대이변 -즉 겨울에 시커면 먹구름이 가득차고 번개와 우레는 치는데 눈(雪)은 안내리다가, 엄사수(淹氵虒水) 즉 칠중하 (七重河)가 크게 범람(氾濫)한 사건은 무언가 종말론적(終末論的)인 분위기가 납니다.

중요한 것은 “굳이 배달화백의 엔딩-룰(ending-rule)을 관장하고, 또 일체의 배달화백(倍達和白)의 신성성(神聖性)에 대해서 위해(危害)를 가하는 것을 퇴치(退治)하는 벅수군은 그당시에 육부군(六部軍)이라는 가장 강력한 ‘벅수군’ 이 있었고, 사실은 배달화백의 엔딩-룰(ending-rule) 뿐만 아니라,  진행중인 배달화백의 신성성(神聖性)을 파괴 하는 것을 ‘벅수군’을 신속파견해야하는 것은 육부군(六部軍)이 되어야 옳은 것입니다.

진한육부(辰韓六部)가 배달화백을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고, 따라서 육부군(六部軍)은 ‘배달화백의 신성성(神聖性)’ 을 지키는 벅수군의 공식적인 명칭이었던 것이지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당시 사람들은 환나국(桓那國) 왕실(王室) 사람들이 아시아(Asia) 무가(武家)의 조종(祖宗) 으로써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환나국(桓那國)의 따님이신 만후(曼后)가 비류선제(沸流仙帝)와 결혼해서 양인왕(昜人王)을 낳자,  “와.... 비류선제(沸流仙帝)와 환나국(桓那國) 계후(桂后)의 피가 동시에 흐르는 양인왕 (昜人王)이 태어나셨다.  이 가계(家系)는 영원히 계속되어야하고,  이 가계가 배달화백의 엔딩-룰(ending-rule)을 맡는 벅수군을 산동반도에서 맡어야한다.”는 억지논리를 폈던 것입니다.

그 시대의 천독(天毒)들이 가장 존경할 만한 가문(家門)이 실재함을 느끼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이런 천독(天毒)들의 마음과 후원에 의해서 말하자면 칠중하(七重河)의 조수(潮水) 에스컬레이터(escalator)로 대야택(大野澤)까지 인위적으로 만드는 어마어마한 토목공사(土木工事)가 힘을 받으면서 진척이 되었겠지요. 정작 양인왕(昜人王)고 호력왕(虎力王)은 “이것은 순 억지다.”  천독(天毒)들이 진한육부(辰韓六部)에 다가입이 되어있고, 이 육부군(六部軍)에 의해서 배달화백의 신성성(神聖性)은 지켜져야하며, 제수(濟水)인 엄사수 (淹氵虒水)강에서 포전(布錢)에 의한 릴레이(relay)게임을 주관하는 것도 육부군(六部軍)의 감시에 의해서 하는것이 옳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그래도 가장 신성한 당신들이...계속 이를 맡어주어야.....“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사표(虒驃) -경호무사(警護武士)와 환나(桓那)-벅수군> 훈련을 어렸을 때부터 받을 수밖에 없는 환나국(桓那國)왕실(王室)의 후예들은 늘 생각하는 것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죽는가?!” 하는 가치의식(價値意識)에 투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민중들의 기대 때문에,  자신의 책임의식을 다하지 않고, 계속 민중의 우상(偶像)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여간 고역(苦役)이 아닌 것이지요.

호력왕(虎力王)은 당신들이 계속 우리를 민중의 우상(偶像)으로 삼는다면, 언젠가 하늘이 노(怒)해서 ‘저칠중하(七重河) 주변의 모든 수리시설(水利施設)을 파괴할 것이다.“고 저주할 지경에 왔다고 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 사태가 나자,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께 가서 “좀 우리를 민중의 우상에서 해방시켜주십시오” 하는 부탁을 했고,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께서도 자신이 가장 숭배하는 가문(家門)의 부탁을 들어주시고... “그런 고충이 있으셨군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세습적 계승권’이 없이 그냥 태백구지(太白衢地)의 벅수군을 운영하심이 어떠 하십니까?!” 하였던 것입니다.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께서는 호력왕(虎力王)의 간청(懇請)이 있는 14년 11월의 무려 9년전인 5년 2월에 호력왕(虎力王)의 ‘할아버지’ 뻘 되는 고루(高婁) 태자께서 당당히 ‘고구리 소도(蘇塗)의 단군(檀君)으로써’ 동부여(東夫餘) 이 비상계엄을 걸고, 자신이 직접 출병하여 동부여의 대불(帶弗)을 죽여 평정을 하게 한 깊은 신세짐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아마 대무신대제(大武神大帝)께서도 “비류선제(沸流仙帝)와 환나국(桓那國) 계후(桂后)의 피가 동시에 흐르는 엄사왕(淹氵虒王)이 계속 산동반도의 해상벅수군을 지휘하는 것이 비록 억지라도 좋은 일이 아님감?!” 하는 희망은 있었을 겁니다. 그 정도로  ‘비류선제(沸流仙帝)-벽라후(碧蘿后)-만후(曼后)’가 산동반도의 칠중하(七重河) 주변에서 만들어낸 일은 감동적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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