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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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1-57)
조선 시대 정궁인 경복궁(景福宮) 정문의 이름. 정종 원년(1399) 경복궁의 둘레에 궁성을 쌓은 뒤 동•서•남쪽에 성문을 세웠는데, 세종 8년(1426) 동문을 건춘문(建春門), 서문을 영추문(迎秋門), 남문을 광화문(光化門)이라 하였음.
집현전 수찬에게 명하여 경복궁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하니, 근정전 앞 둘째 문을 홍례, 셋째 문을 광화라 하고, 근정전 동곽 협문을 일화, 서쪽 문을 월화라 하고, 궁성은 동쪽을 건춘, 서쪽을 영추라 하고, 근정전 앞 석교를 영제라 하였다. ; 命集賢殿修撰 定景福宮各門及橋名 勤政殿前第二門曰弘禮 第三門曰光化 勤政殿東廊夾門曰日華 西曰月華 宮城東曰建春 西曰迎秋 勤政殿前石橋曰永濟 [세종실록 권제34, 4장 앞쪽, 세종 8년 10월 26일(병술)]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으로 명명되었고 오문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에 3개의 홍예문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목조건축의 양식은 다포식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 · 내삼출목, 외부는 제공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을 만들었으며, 첨차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으로 평가되었다.
광화문 3개의 궐문 중 가운데 칸이 높고 크다. 이곳은 임금이 행차하는 문이며 천정에는 주작을 그려넣었다. 정면 좌우에는 상상의 동물이자 영물인 해태상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으로는 궐외각사인 이조 ·호조 ·예조 · 병조 ·형조 · 공조 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를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일병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에 이전시켰고, 설상가상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그나마 도로확장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전통적인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2010년 8월에 완공되었다.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지번세종로 1-57지도보기
매일 09:00 - 18:00(입장마감 17:00)
화요일 휴무. 3,000원 대인(만25세~만64세)>무료/ 만24세 이하 청소년>무료/ 만65세 이상 어르신>무료
장애인, 유공자>무료, 한복을 착용한 자/ 더보기
경복궁의 정문.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고 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더보기
경복궁의 동서남북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대문 중 남쪽에 위치한 정문(正門)이다. 1865년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과 원래 축에서 틀어졌던 각도를 원래 위치로 돌려 2010년 8월 15일 광화문 복원공사를 마친 바 있다. 뒤큰건물은 예중앙청사' 일본잔제의산물이라 철거되었다.
외국어 표기 |
光化門(한자) |
건립 |
1385년(태조 4년) |
광화문과 경복궁의 전경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섬세한 건축 기법으로 지어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하여 가장 뛰어난 궐문으로 평가된다. 경복궁이 처음 지어진 태조(이성계) 때 정도전이 ‘사정문’과 ‘오문’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세종 때 집현전 학사들이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의 광화문(光化門)이란 이름을 지어 올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광화문 앞의 큰 길은 ‘6조 거리’라고 불렀으며, 이곳에는 주요 관청이 자리하고 있었다.
① 커다란 석축 위에 올린 문루.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이며, 궁궐을 드나드는 사람은 물론 적을 감시하고 지키는 병사와 관원들이 이곳에서 일을 했다.
② 사람이 드나드는 홍예문. 궁궐을 드나들 때에도 예법을 엄격히 지켜, 가운데 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드나들었다.
③ ‘해태’라고도 부르는 해치상. 선과 악을 구별하고 정의를 지키는 전설 속의 동물이다.
광화문은 돌로 만든 커다란 축대 위에 문루를 얹은 모습으로, 조선의 궐문 가운데 이렇게 만든 것은 광화문이 유일하다. 사람이 드나드는 문은 윗부분이 무지개처럼 둥글게 처리된 홍예문이다. 3개의 홍예문 중 가운데 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문으로는 왕세자를 비롯한 신하들이 드나들었다.
광화문은 경복궁과 더불어 여러 번 시련을 겪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던 것을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다시 중건했고, 일제가 조선 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안에 지으면서 철거하려다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동쪽에 있는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
광화문 광장
"서울특별시 종로구 광화문에서 세종로사거리로 이어지는 세종로에 조성된 광장'
6 · 25 전쟁 때에는 폭격을 당해 모두 불타고 석축만 남았으나 1968년에 원래 자리에 옮겨 지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문루를 콘크리트로 복원한 데다 옛 조선 총독부 건물에 맞춰 놓아 중심축이 맞지 않았다. 그러다 2006년부터 문화재청 주도로 고종 중건기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시작했고, 2010년 8월 15일에 공개해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광화문 양 옆에는 흔히 ‘해태’라고 불리는 해치상이 있다.
1910년대의 서울 광화문 전경1910년대 촬영된 광화문의 모습이다.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 전경1926년 이전 촬영된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의 모습이다.
원래 위치는 광화문에서 40~50미터 떨어진 곳으로 현재 놓인 곳보다 더 멀리 떨어진 사헌부 앞이었다.
서울 경복궁 중 광화문 후측면서울에 위치한 경복궁 중 광화문 후측면이다. 일제강점기 촬영.
광화문 앞의 큰 길을 조선 시대에는 ‘6조 거리’라고 불렀으며 그곳에는 이조, 호조, 예조 등 정부의 6개 주요 관청을 비롯해 지금의 서울 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 사헌부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중 사헌부 앞, 지금의 정부 청사 앞길 양쪽에 해태가 앉아 있었다. 해태는 법과 정의를 지키는 동물로 여겨져 정치의 잘못을 가리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사헌부와 잘 어울렸다.
소설광화문'
<광화문>은 급변하는 역사와 당대 정치의 격랑을 불화살처럼 뚫고 나간 지도자 흥선대원군의 일생과, 구한말 개혁과 보수의 첨예한 대립을, 당대의 정사를 철저히 고증하여 새롭게 복원한 대하역사소설이다.
한말의 위기 상황 속에서 흥선대원군이란 강력한 개성의 정치가를 중심으로 사태 전개를 다면적으로 펼쳐 보이는 우람한 역사소설이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면서 이를 해석, 비판하고 있는 이 작품은 오늘의 우리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아주 풍부한 경국과 제민에 관한 책이다.
옛스러운 문체와 풍부한 옛말 속에서도 깨우치는 바가 많지만 뜨거운 정치의 계절에 정치인에게도 유권자에게도 정치 교육이 될 것이 틀림없는 진지한 소설이다. <광화문>이라는 제목으로 대원군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써낼 가장 합당한 작가로 서기원말고 또 누가 있을까. 작가는 특히 당시의 왕권과 사대부 계층과의 권력투쟁에 초점을 맟줘 일종의 대중정치를 지향했던 대원군의 자취를 사실에 어긋나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또 19세기 중엽의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우리 정치의 상황을 오늘과 오버랩시키면서 지금의 메시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중진 작가 서기원 선생이 조선일보에 장기 연재한 <광화문>은 역사소설이면서 미래소설이다. 조선왕조 말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초기를 다룬 <광화문>은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과거 역사 속에서 미래로 가는 길을 밝혀주고 있다.
이 소설은 지난 세기말에 주체적 근대화와 산업화에 실패했던 선조들의 역사를 냉철하게 탐구함으로써 21세기를 눈앞에 둔 한국인들의 의식에 미래지향적 교훈을 새겨둔다.
그런 의미에서 <광화문>이란 제목은 역사의 상징이면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의식의 문이기도 하다. 왕권 회복을 내건 대원군의 정치 개혁과 그 좌절의 드라마를 객관적 시점에서 조명한 이 소설에는 1백 년 전 엘리트들의 사상과 삶이 눅눅하게 배어 있다. <광화문>은 흥선대원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지배층과 민중과의 관계를 선명하게 분석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오늘날의 상황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인공 흥선대원군의 생애는 다음과 같다.
흥선대원군은(순조20년(1820) ∼ 광무2년(1898)) 조선왕족이고 정치가였다. 자는 시백, 호는 석파, 이름은 하응이다. 영조의 현손. 남연군 구의 아들이고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8년(헌종9) 흥선군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도총관 등 한직을 역임하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이 동안 보신책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로서 궁도령이라는 비칭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면서도 철종의 후사가 없음을 기회로 조성하를 포섭하여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에 접근, 둘째 아들 명복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내락(內諾)받았다.
1863년에 철종이 죽고 신정왕후 조씨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진봉, 이어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선포되자 안동 김씨의 반발을 억누르고 그는 정책적 정권을 받아 섭정을 맡았다. 당시 외척 세도의 아성인 안동 김씨의 주류를 숙청하는 한편 당색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 부패 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키고, 47개 서원(書院)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을 철폐하여 국가 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六典條禮) 대전회통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의 확립을 기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했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고, 관복의 제정과 서민들의 주속광복의 착용을 금하여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귀족·상인에 차별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근절하기 위해 사창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삭감하여 다소 국민의 생활이 안정되고 국고도 충실해졌다.
그러나 왕실의 위엄을 상징하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키 위해 원납전을 강징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1866년(고종 3)대동강에서 제너럴·셔어먼호 소각사건, 이해 강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과의 마찰로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1871년 강화에서의 미군과의 전투로 신미양요가 일어났으며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는 등 세계정세에 어두운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 문명의 흡수가 뒤늦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한편 그의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고종비 민비가 그의 독재에 불만을 품은 반대파를 포섭하고 어린 왕 고종도 성장하여 친정을 계획하게 되자 이 기회를 틈탄 민비의 조종으로 1873년 그의 실정의 조목을 든 동부승지 최익현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11월 3일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고 그의 정치 간여를 금하자 운현궁을 떠나 양주 직곡에 은퇴했다. 이때부터 민비와의 정치적 숙원이 깊어져 재집권을 노리던 중 1882년(고종19) 임오군란으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쓰며 재빨리 행방불명이 된 민비의 죽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충주에 피난해 있던 민비의 책동으로 청나라의 군사가 출동하고 마건창에 의해 납치되어 청나라에 건너가 천진의 보정부(保定府)에 4년간 유폐되었다가, 1885년(고종 32) 귀국, 운현궁에 칩거하며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1885년 원세개와 협력하여 고종의 폐위와 함께 장남 재황을 웅립하려다 실패했다.
1895년(고종 32) 재집권을 위해 일본 공사 미우라와 결탁, 을미사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으나 일본의 괴뢰 역활에 불과했다. 민비 시해사건으로 미우라 공사가 본국에 소환되자 정권을 내놓고 은퇴, 아들 고종이 그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부자관계가 악화된 채 죽었다<광화문>이, 당시의 시대상을 오늘날의 상황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작가의 말>을 통해서 좀더 확실히 나타난다. <작가의 말>에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작가 서기원의 평가도 담겨있다.
수백년을 통틀어 대원군은 리더십을 발휘한 몇 안되는 통치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 시대의 변화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권력을 유지하고 경륜을 펴자니,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개혁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주변 정세에 대응하려 했지만 왕비 민씨를 비롯한 척신 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심신을 소모하여 결국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개혁 정치에는 일종의 미학이 있었다. 이것은 방법론의 문제라기보다 결코 빙공영사하지 않은 그의 인간성에서 우러난 것이다.
흔히들 당시의 내외 정세와 오늘의 그것이 닮았다고 한다. 닮았다면 북한이 남한보다 더 닮았다.남한은 어떤가? 주변 강대국간의 역학 속에서 시달림과 압력을 받고 있는 구도는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국력이 조금 나아졌다고 우리가 무슨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호언 장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힘이 있을수록 겸손해야 하고 이웃 나라들과 잘 사귀어야 한다. 조선왕조가 망한 것은 명분과 실질의 괴리, 형식과 내용의 상반 등의 현상에서 빚어진 것이다. 이 두 대목이 지나치게 엇갈리면 허위와 위선이 만연하고 사회적 통합이 무너진다.
대원군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고, 과함한 개혁으로 이같은 모순을 고치려고 했다. 그러나 시대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가 실각한 뒤 국정을 개혁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고 권력의 비리와 부패는 더욱 심화되었다. 거개가 자신의 생존과 가족의 보전만을 생각하였다. 이 점만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는 외적을 물리칠 수 없다.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역사관이 많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가치체계가 조선 왕조를 통해 형성되었음도 인정해야 한다. 역사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고, 부채도 유산에 속한다. 대원군은 소설가의 흥미와 호기심을 끄는 인물이다.
참조항목
역참조항목
세종로, 태조 때의 경복궁, 창건 이후 경복궁, 한국의 문, 광화문시민열린마당, 내자동길, 48번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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