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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청도.

청도군은 대부분 산으로 이뤄져 있어 명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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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는 삼국통일의 기반이 된 화랑정신과 우리나라 근대화의 디딤돌이 된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서 정신문화의 고장이다. 여기에 아름다운 자연까지 공존하는 청도는 지친 도시민의 최적의 힐링지로 손색이 없다. 청도에는 천년고찰 운문사를 비롯해 청도읍성(석빙고)·청도신화랑풍류마을·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공원·청도박물관 등 곳곳에 산재한 풍부한 볼거리 외에도 레일을 따라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는 레일바이크, 주말마+다 열리는 청도소싸움, 한바탕 웃을 수 있는 한국코미디타운, 운문삼계리 계곡, 이색적인 와인터널과 별빛축제 등 체험거리도 즐비하다. 화양읍 남산골 계곡과 운문면 운문댐 하류보, 삼계리 계곡 등은 예로부터 피서지로 유명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비옥한 황토서 자란 복숭아 ‘각광’ 4월이면 분홍빛 자태 복사꽃 넘실 사진작가 봄철 출사지로 손꼽혀 청도 5경 연꽃밭 ‘유호연지’도 주목. 청도하면 감, 청도반시를 제일 먼저 떠올리지만 요즘은 그에 못지 않게 청도복숭아의 명성도 높다. 청도의 국도변을 달리다 보면 지금은 어딜가나 잘 익은 복숭아를 만날 수 있다. 유등마을은 일명 ‘복사꽃 마을’로 불릴 정도로 복숭아나무가 많은 곳이다. 4월이면 마을 앞 노산지 주변은 물론 산등성이까지 분홍빛으로 물든 모습을 찾아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찾는 출사지로도 손꼽힌다.


이슬미로라는 제법 낭만적인 이름의 도로를 따라 뒤쪽으로는 노정산이, 앞쪽으로는 노산지를 끼고 유등마을이 펼쳐진다. 길 이름의 유래가 재미있다. 유등 2리의 옛이름은 노산리. 이슬 로(露), 뫼 산(山)이다. 우리말로 바꾸면 이슬뫼가 맞겠다. 그렇지만 경상도 사투리로 이슬미라고 부르다보니 길 이름도 이슬미로가 되었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용이 되지못한 이무기를 이슬이라고 하는데 마을 인근 한내들에 물이 깊어 이슬이 나온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이슬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니 어떤 것이 맞다 그르다 논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유등마을에서 빠트려서는 안 되는 곳이 바로 ‘유호연지’이다. 

 

유등지로 부르지만 버드나무 두른 연못에 연꽃이 핀다는 ‘유호연지(柳湖蓮池)’가 정식이름이다. 해마다 칠팔월이면 연꽃이 만발한 풍경이 아름다워 청도 팔경 중 5경으로 꼽히며 전국 명승지 100선 중의 한 곳이기도 하다. 이제염오(離諸染汚), 진흙에서 자라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는 연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연지 주변에 조성해놓은 데크를 따라 한바퀴 걸어보는 것도 좋다. 연지 안에 있는 ‘군자정’은 조선시대 시집간 딸들이 친정어머니를 만나기 위한 장소였다고 전해져온다.

우리나라 최초의 코미디 체험관인 한국코미디타운과 상징물인 물구나무 선 ‘꼭두’. <청도군 제공>

숨겨진 비경-남산 13곡

청도에서 널리 알려진 계곡은 운문삼계리다. 운문면과 울산 언양을 잇는 도로를 따라 펼쳐진 삼계리는 울창한 숲과 가지산(해발 1천240m)에서 발원한 계곡물로 어우러져 피서철엔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붐빈다. 이에 못지않게 숲과 바위 사이를 흐르는 계곡물로 한여름에 한기가 가득한 남산13곡(청도 화양읍 교촌리 일원)은 숨은 비경으로 꼽힌다. 남산은 해발 870m에 불과하지만 6개 읍·면을 한 눈에 바라보며 마치 포옹하여 감싸고 있는 듯한 명산으로 청도군의 진산으로 알려진 곳이다. 남산을 발원지로 하는 남산계곡(일명 남산골)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기암절벽, 소(沼)를 이루며 청담옥수 같은 맑은 물은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가슴속까지 시원한 냉기를 느끼게 한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초입부에 화산동문이라 새겨진 각자(刻字)를 시작으로 20여개의 각석문도 볼거리다. 남산13곡에 따라 조성된 탐방길은 시원한 계곡의 풍광과 더불어 선인들의 문화적 향기를 넉넉히 음미할 수 있게 한다.

청도군은 소싸움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소싸움은 천년의 역사를 이어 내려온 문화로 이제는 청도의 대표적인 민속행사가 됐다. 청도 1박2일 여행을 떠난다면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청도 소싸움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청도 와인터널, 프로방스, 용암온천 등 겨울 청도여행으로 들러보기 좋은 명소들이 있다.  

청도 와인터널.

청도 가볼만한 곳으로 유명한 청도 와인터널은 온도가 섭씨 13~15도 내외를 유지하고 있는 터널로 여름에는 시원하며 겨울에는 밖의 기온보다 높아 계절을 타지 않는 관광 명소다. 청도 와인터널은 대한제국 말기인 1898년 완공된 터널로 천정이 붉은 벽돌로 되어 있으며 벽면을 자연석으로 구성되어 있어 터널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답다. 수많은 와인들이 진열되어 있는 터널을 보는 것도 즐겁지만 '와인 만들기', '와인 시음', '감 따기 체험' 등 현장체험 프로그램도 있어 오감을 만족하는 청도 가볼만한 곳이다.

청도 와인터널에서 와인 시음을 할 수 있다.

용암온천.

오는 12월 13일 리모델링을 마치고 새롭게 오픈하는 청도 용암온천은 청도 군민뿐만 아니라 대구, 경산 등 주변 사람들도 즐겨 찾는 온천이다. 지하 1008m의 43.7도의 천연 광천 온천수를 직수 공급하는 온천으로 만성피로회복, 면역증강, 신경계통 질환 및 노폐물 제거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그밖에 옥으로 만든 옥대 온천장, 미국 직수입 아쿠아테라피, 각종 테마탕, 가족탕, 힐링 객실 등 겨울 청도여행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곧 리모델링을 마치고 개장하는 만큼 청도 1박2일 여행 코스로 고려해보자. 

 프로방스 

청도 프로방스는 연인,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 좋은 청도 가볼만한 곳이다. 1996년 오픈한 청도 테마랜드를 2012년 청도 프로방스 포토랜드로 새롭게 단장을 하여 선보이고 있는 곳으로 프랑스 마을의 아름다움을 재현하여 볼거리가 많다. 프랑스 마을 중에서 고흐, 세잔, 샤갈, 마티스 등이 생전 좋아했다던 남동부 지역으로 아름다운 청도 프로방스를 배경 삼아 인생 사진을 찍기에 좋은 명소다. 아름다운 빛 축제가 유명한 청도 프로방스는 주변으로 숙박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어 청도 1박2일의 마지막 코스로 다녀오는 것을 추천한다. 

청도 프로방스는 빛 축제가 유명하다.

 


가볼만한 곳으로

'청도 프로방스'를 꼽을 수 있다. 이곳은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이슬미로 272-23에 위치한 테마파크다. 남프랑스가 주는 멋진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청도 프로방스는 다양한 포토존과 소품이 있으며 밤이 되면 아름다운 빛의 공간을 만나볼 수 있다. 세계 최초 하트 테마 포토존인 '프로포즈 가든'에서는 해가 뜨는 낮에도, 해가 지고 난 이후에도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으로 예쁜 정원이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빛의 숲'에서는 빛으로 이루어진 동물들과 빛 포토존에서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볼 수 있다. 아름다운 빛의 축제, 일루미네이션 라이팅쇼를 볼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져 더욱 재미있는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청도 가볼만한곳 '청도 프로방스'의 '러브로드' 역시 다양한 포토존이 있으며, 큐피드 로드에서는 하트 모양으로 이루어진 빛의 길을 거닐어 볼 수 있다. 한편, 밀양 가볼만한곳 포토랜드는 가족, 친구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있다. 최근에는 연말 시즌을 맞이하여 청도 프로방스 크리스마스 산타마을 빛축제가 열리고 있기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청도가볼만한 곳 '청도 프로방스'에 방문해봐도 좋겠다.

박물관은 경북 청도군 이서면 이서로 567에 위치해 있으며 무료의 관람료로 입장이 가능하다. 청도 박물관의 '고고역사관'에서는 청도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청도지역에 처음으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 등 다양한 고고역사유물을 볼 수 있다. 청도가볼만한 곳 청도박물관의 민속관에서는 근대 이전 청도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청도 사람들이 기증하고 기탁한 유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청도가볼만한 곳 청도박물관에서는 11월 20일부터 2019년 2월 10일까지 청도박물관 특별전시 <선비의 길을 묻다 - 탁영 김일손>전을 개최한다. 탁영선생의 생애를 조명하며 그가 남긴 유물과 각종 역사적 자료를 볼 수 있다. 탁영 김일손 종택의 비공개 유물들로 진행하는 전시는 김일손 선생을 조명하는 첫 전시회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역사와 문화를 한 자리에서 경험하고 싶다면 청도 가볼만한곳 '청도박물관'

운문사,

운문사는 청도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 진흥왕 21년에 창건하고 1277년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한 유서깊은 전통 사찰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광대사가 중건한 사찰로 산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신라시대에는 대작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됐고진평왕 13년 원광이 크게 중건했다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기는 했으나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전체 17동의 전각이 있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 중 대웅보전은 보물 제835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청도군에서 운영하는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운문사는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해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신라 진평왕22년)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 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됐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10년)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인조7년) 년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뤘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물렀다. 이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집필을 착수했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최고에 이른다.

그 후 제5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고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내원암·북대암등을 중건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했고, 1842년 금당을 중건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해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약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있으며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고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처진소나무 외 30여동의 건물 과 7점의 보물, 11명의 고승대덕의 영정 및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운문사 이야기1-채헌의 ‘호거산운문사사적’
운문사의 솔바람 둘레길은 운문사를 배경으로 구성된 것으로 운문사의 탐방이 필수적이라 하겠다. 운문사는 평평하고 너른 대지 위에 수십 채 기와집이 들어앉았다. 이른바 평지가람이다. 남쪽의 운문산, 북동쪽의 호거산, 서쪽의 억산과 장군봉 그리고 이들이 이룬 높고 낮은 봉우리가 돌아가며 절을 감싸안고 있다. 운문사는 앉음새가 특이하다. 모든 건물이 돌아앉았다. 산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며 등을 내보이고 있다. 산세를 따르다 보면 모든 건물을 북향으로 앉혀야 하기 때문이다. 찾아가는 사람은 운문사의 뒷모습부터 보게 되는 셈이다. 풍수적으로 풀면 호거산을 마주할 때 생기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란다. 호거산이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운문사로 향하고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또 북향하면 골짜기의 물이 흘러나가는 것을 지켜보게 되어 재화나 부와는 인연이 멀게 된다고도 한다. 풍수에서 물은 곧 재화를 뜻하니 항상 물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인다면 낭패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남향한 집이 사람 살기에 좋은 것이다. 이러한 터전에 절이 들어선 것은 멀리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숙종 44년(1718) 채헌이라는 스님이 쓴 ‘호거산운문사사적’에 의하면, 지금의 운문사에서 5리쯤 떨어진 금수동에 들어와 3년을 수도하여 득도한 어느 도승이 고구려 평원왕 2년(560) 도우 10여 명과 함께 갑자 들어가는 다섯 개의 절 오갑사를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오갑사는 가운데 자리잡은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하여 동쪽 9000보 지점의 가슬갑사, 남쪽 7리쯤에 있던 천문갑사, 서쪽 10리에 자리한 대비갑사, 그리고 북쪽 8리에 위치한 소보갑사 등이었다. 이 가운데 대작갑사가 오늘의 운문사다. 그밖에는 대비갑사만이 대비사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을 뿐 다른 절은 모두 없어졌다.

운문사사적’은 운문사의 첫번째 중창자로 원광 법사를 들고 있다. 가슬갑사에서 두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유명한 ‘세속오계’를 내려준 바로 그 스님이다. 그 내용은 591년 중국에서 귀국한 원광법사가 처음 3년 동안 대작갑사에 머물다 가슬갑사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이후 운문사의 사정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후삼국의 어지러운 전란 속에서 다시 역사 위로 떠오른다. ‘운문사사적’에서 두번째 중창자, ‘삼국유사’에서 개산조로 꼽는 보양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삼국유사’는 그 전설적인 얘기를 이렇게 전한다. 그가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로 서해를 건너자니 용왕이 그를 용궁으로 청하여 금빛 비단 가사한 벌을 주면서 그의 아들 이목(璃目)을 데리고 가 작갑에 절을 지으라고 당부했다. 보양스님이 절을 세우려고 북쪽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니 산 아래 5층 황탑이 보였다. 그래서 내려와 찾아보았는데 아무 흔적도 없어 다시 산으로 올라가 탑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니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었다. 그러자 용왕이 ‘작갑’, 곧 ‘까치곶’이라 한 말이 떠올랐다. 다시 내려와 그곳을 파 보니 무수한 벽돌이 묻혀 있었고, 마침내 그 벽돌로 탑을 쌓으니 한 장도 남은 게 없었다.
그리하여 여기에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작갑사라 했다. 이보다 앞서 보양스님이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추화의 봉성사에 머물고 있을 무렵의 일이다.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청도의 경계까지 쳐들어갔는데 산적의 무리들이 견성에 웅거하여 거만을 부리는 통에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왕건이 산 아래로 내려와 보양스님에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묘책을 물으니 스님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무릇 개라는 짐승은 밤에만 지키지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을 지키지 뒤를 지키지는 않습니다.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쳐야 합니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뒤, 보양스님이 이곳에 작갑사를 세웠다는 말을 전해듣고 오갑의 땅 500결을 절에서 부치도록 했으며, 태조 20년(937)에는 운문선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운문사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다. 고려왕조의 창업에 군사적으로 한몫을 거들어 사세를 키운 운문사는 이윽고 원응국사 때에 전성기를 맞는다. 인종이 즉위하던 1122년 왕사의 자리에 오른 스님은 인종 7년(1129) 운문사로 들어왔다. 이때 나라에서는 신수와 신원 등의 토지 200결과 국노비 500명을 운문사에 귀속시켜 만세토록 향화를 받들게 했으며, 스님이 운문사를 중창하자 ‘운문선원상사’라는 사액이 내려지고 절은 나라의 500선찰 가운데 제2선찰이 됐다.

운문사 이야기2- 일연의 ‘삼국유사’
몽골의 간섭기가 시작되는 1277년 운문사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스님을 맞이하게 된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이다 이미 72세의 노경에 든 스님은 1282년 충렬왕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떠날 때까지 운문사에 머물며 민족의 문화유산 ‘삼국유사’의 집필에 힘을 쏟았다. 4비 가운데 행적비가 바로 일연스님의 행적비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불행스럽게 이 또한 전해지지 않으니 운문사에서 스님의 자취가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저 ‘삼국유사’가 전해지는 것만도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이후 운문사의 내력은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조선조를 넘기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거개의 사찰들이 그러하듯 임진왜란의 병화를 면하지 못한 듯하고, 그뒤 몇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20세기를 맞고 일제강점기를 넘겼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불교정화운동이 한창이던 1958년 운문사에는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으며, 차츰 많은 스님들이 모여들어 오늘날은 언제나 200명 이상의 학인들이 공부하고 수도하는 비구니들의 요람으로 자리잡았다.
 
**운문사는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다. 절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담장의 중간쯤, 범종이 걸린 이층누각의 아래가 정문이며 첫문이자 마지막문이 된다. 이만한 규모의 절에 문이 하나뿐이라는 것도 이상하고 그것조차 앞도 뒤도 아닌 허리쯤에 위치한 점도 의아스럽다. 문을 들어서면 곧게 뻗은 길이 절의 서쪽을 감돌아 흐르는 계곡, 약야계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이 길의 오른편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비로전, 만세루, 그밖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 왼편으로는 2기의 석탑과 오백전, 작압전, 관음전, 기타 몇 채의 전각이 나란하다. 운문사의 예배공간이자 신앙공간이다. 그 나머지 건물군은 일상생활과 수행이 이루어지는 생활공간·수행공간이다.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것은 예배공간까지이다. 운문사에는 당시 사찰의 중창과 내력을 기록한 원응국사비가 남아있다. 그리고 1277년에는 일연선사가 운문사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시대 들어서 불교가 쇠퇴하고 임진왜란 때는 사찰의 건물들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현재 대웅보전(보물 835)·작압전·미륵전·오백나한전·금법당·만세루·관음전·요사채 등이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193호인 금당 앞 석등, 보물 제208호인 동호, 보물 제316호인 원응국사비, 보물 제317호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8호인 사천왕석주, 보물 제678호인 삼층석탑,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가 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발전하였으며 1997년 승가대학원이 개설됐다. 운문사 반경 6km이내는 가볼만한 곳이 청도신화랑 풍류마을, 운문댐 하류보 유원지,청도베이스볼파크, 운문산자연휴양림,공암둘레길이 있다. 출처 : 경상북도.

1500년 역사 담은 '운문사지'

운문사는 약 1,500년의 역사를 지닌 유구한 고찰입니다. 현재는 비구니 교육도량으로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데요, 호거산과 운문산 등 영남알프스 자락에 위치하고 있고 생태보존지역으로도 지정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도량이 아름답다고 알려져서 많은 참배객들이 찾는 곳입니다. 유명한 기도처인 사리암도 있구요. 역사적으로 보면, 원광국사의 화랑오계가 설해진 곳이며 고려시대 원응국사는 가지산 선문의 중흥조로 운문사를 전국 제2의 선찰로 만들어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충렬왕 때 일연스님께서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고, 조선시대 설송 연초대사는 운문사를 선교양종의 통합 도량으로 융성시켰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운악 두안스님 때는 만일 염불 결사가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운문사가 15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문사지가 제대로 된 사지가 없었습니다.

둘째는 근현대의 비구니 승가교육의 역사와 1958년 비구니 강원 개설 이후 주석했던 비구니 스님들과 명성 회주스님의 운문사 중창의 역사를 포함하여 운문사 관련 모든 자료들을 모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무형의 것들은 무너지고 잊혀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중한 승가역사를 일으켜 세우는 기록의 불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력을 가지고 시작하게 됐습니다.

1500년 운문사 역사를 담은 '운문사지'
원래 한 권 분량으로 계획했었는데 하다보니 원고 분량과 자료가 늘어나 두 권으로 간행하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본문인 운문사지와 그에 따른 자료편을 따로 엮었습니다. 운문사지에는 창건부터 근현대 운문사의 역사와 인물, 가람의 변화와 문화재, 승가대학의 역사와 활동들 그리고 운문사와 관련한 시문들까지 총망라해서 수록했고요,

자료편에서는 운문사의 역사적 사적 자료들을 원문과 현대 번역을 함께 실었고, 흩어져있던 운문사 관련 자료들- 비문들, 기문이나 화기, 옛 문서들 시편 등을 모두 집대성하여 엮었습니다. 이번 운문사지 간행을 통해 주지인 저도 운문사의 역사를 자세하고 새롭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요. 이 자료를 보고 많은 분들이 운문사의 가치를 더욱 알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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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지』라는 제목으로 1980년 한국사지총서의 하나로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기존의 자료들을 한문원전 그대로 필사본 그대로 엮어 놓은 것이라 일반인들이 해독해서 읽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번 운문사지에서는 이것을 모두 현대어로 번역하여 읽기 쉽게 하여 대중적인 사료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운문사 사적 자료가 1718년 「호거산 운문사 사적」과 1914년 「청도군 운문사 사적」정도가 있었는데.. 이것도 한문으로 되어 있고요, 조선시대 이후의 운문사 역사 기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간행된 운문사지는 조선시대 이후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던 운문사의 근현대 역사를 기록하여 집대성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운문사가 비구니 교육도량이 된 1958년 이후의 역사를 기록해  한국불교사의 한 페이지인 비구니 역사를 좀 더 풍부하게 하는데 일조하였으면 하는 바램도 있어서 현대 부분 자료들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소욕지족의 삶. 욕심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아는 삶.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작은 일에도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모든 생명은 존재하는 자체로 존귀하고 가치있는 존재입니다. 존재하는 자체가 기적입니다. 먹을 수 있어 감사하고 볼 수 있어 감사하고, 걸어다닐 수 있어 감사합니다.  

둘째는 모든 일에 감동하는 것입니다. 작은 꽃을 보고도 감동하고 아기의 웃음소리에도 감동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고 감동하는 일입니다. 요즈음 너무 삭막한 것 같아요. 많이 감동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는 감탄입니다.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주 찬탄하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정말 좋구나. 잘 했어...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소욕지족의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많이 감사하고 감동하고 감탄하는 부처님 오신 날 맞으시길 바랍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그리스와 인도문화가 혼합된 파키스탄 페샤와르와 탁실라 일대의 간다라(Gandhara) 지역을 거쳐 중국의 후한(25~220) 명제(재위 57~75)때 중국에 왔다. 명제가 머리에서 광채가 나는 금빛 사람을 꿈에 보고, 채음과 진경을 보내서 불법을 천축에서 구해오게 했다. 이후 인도에서 온 불승 섭마등과 축법란을 위해서 67년에 창건한 중국 최초의 사찰이 허난성 뤄양(낙양)의 백마사(白馬寺)다. 백마사는 보경사의 연기설화와 연결된다. 창건주 지명법사의 전생이 백마와 백마사 주지 일조였으며, 서역에서 가져온 8면 보경을 봉안한 후 603년 대가람이 완성되니 그 절이 바로 원진국사(1171~ 1221)와 오암선사(1710~1792) 등을 배출한 포항의 내연산 보경사다.

중국불교는 위진남북조시대(220~589)에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5호16국의 전진의 왕 부견이 372년에 순도를 고구려 소수림왕에 보내어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다. 백제불교는 침류왕 때인 384년 동진(東晉·317∼419)의 인도승 마라난타가 전래했다. 현재 전남 영광군 법성포에는 간다라양식의 마라난타사라는 사찰을 지어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있다. 현존 한국 최고의 최대 석탑은 20년 만에 복원된 백제 무왕(재위 600∼641) 때 창건한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이다.

경북 최초의 사찰은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 2년(417)에 구미시 해평면에 지은 도리사(桃李寺)이다. 도리사의 세존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동육각사리함은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후 아도화상이 김천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쪽에 큰 절이 설 자리”라 하여 직지사를 418년에 창건했다. 6세기 초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 이후 불교가 국교화되어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한 곳이 경북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아난존자로 전한 교학 불교는 삼국시대에 5교로 발전했다. 자장, 보덕, 원효, 의상, 진표가 대표승려이다. 의상대사의 화엄종은 부석사·봉정사·고운사·축서사·대전사·불영사등이 품고 있다. 영주 부석사는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비롯한 국보 5점과 삼층석탑 등 보물 6점이 안동의 봉정사는 극락전과 대웅전이 국보로 모두 세계 문화유산이다.

의성 고운사는 유·불·선 3교에 통달한 최치원의 호를 딴 사찰이며, 풍수지리의 비조 도선국사가 크게 중창한 사찰로 입구에 화엄일승법계도를 법계도림으로 조성한 매우 고즈넉한 사찰이다. 봉화 문수산 축서사는 태백준령을 품고 있는 산수화 같은 풍광을 자랑한다. 주왕산 입구의 청송 대전사는 보광전(보물 제1570호)이 볼만하다. 울진 불영사는 명승인 불영계곡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이다. 의상암이 있는 포항의 오어사는 7세기 신라 고승들의 이름을 빌린 자장암, 혜공암. 원효암이 있는 둘레길이 아름다운 사찰이다.

달마대사가 6세기 인도에서 중국 양나라로 건너와 전파한 불교가 선종(禪宗)이다. 이후 선종은 5조 홍인(601~674)이후 북종선의 신수와 남종선의 6조 혜능으로 분파되어 9세기 이후 한반도로 유입되어 구산선문을 형성했다. 대체로 한국불교의 법통은 육조 혜능의 남종선이 계승되었다. 예외적으로 문경 봉암사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파의 종찰로 879년에 북종선을 계승한 지증대사 도헌이 창건했다. 현재 경북은 도리사(구미), 보경사(포항), 불국사·골굴사·기림사(경주), 직지사(김천), 봉정사(안동), 은해사(영천), 고운사(의성), 장육사(영덕), 자비선사·심원사(성주), 용문사(예천), 축서사(봉화) 등에서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템플스테이 체험은 속세의 심란함을 부처님의 자비의 품속으로 들어가서 마음을 정화시키는 힐링 체험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청도 운문구곡,

박하담의 ‘운문구곡가’ 서시다.
‘하늘이 운문을 열고 땅이 신령을 기르니/ 그 가운데 산수가 자연스레 맑아라/ 지팡이 짚고 나막신으로 소요하며 진경을 찾으니/ 무이(武夷)의 굽이굽이에 노래하여 화답하네’.

박하담은 서시에서 신령한 운문의 산수를 찬미하고, 운문구곡을 거슬러 소요하며 주자의 ‘무이도가’에 화답하는 구곡가를 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운문구곡가를 따라가 본다.

박하담, 1곡 지점 언급하지 않아 선암서원 앞 하천변 바위로 추정,

운문사·사리암 중간쯤 6곡 석만 온통 돌로 이루어져 이름붙인듯,

8곡 도인봉 봉우리 부분 큰 바위 도인이 앉아 수련하는 모습 연상,


박하담의 운문구곡가

‘일곡이라 맑은 물에 일엽선 띄우니(一曲淸流一葉船)/ 원두에 약야천이 있는 줄을 알겠네(源頭知有若耶川)/ 옛 나루 거슬러 올라서 망연히 서니(遡古渡茫然立)/ 바위는 구름 끝에 솟고 새는 안개 속에 우네(巖出雲端鳥叫烟)’.

1곡 시다. 박하담은 1곡의 지점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선암(仙巖)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암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선암서원 앞 하천변에 서 있는 바위다.

후학들이 박하담을 기려 건립한 선암서원은 박하담과 삼족당(三足堂) 김대유(1479~1551)를 기리고 있다. 약야천은 운문사 옆을 흐르는 하천이다. 운문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약야천으로 모여 흐르고 이 물은 다시 선암 앞으로 흘러간다. 원두는 하천의 근원으로, 도의 근원을 의미한다.

박하담은 구곡을 거슬러 올라가며 도의 경지에 나아가고자 한다.

‘이곡이라 가운데 석고봉을 여니(二曲中開石鼓峯)/ 완연히 사랑하고 즐기는 모습이네(宛如雲樂舞昭容)/ 이곳에 이르러 기생 생각 없으니(吾人到此心無妓)/ 꿈밖의 양대로 가는 길 몇 겹인가(夢外陽臺路幾重)’.

2곡은 석고봉이다. 1곡과 2곡 사이가 많이 떨어져 있다. 운문댐 입구 대천삼거리에서 운문사 가는 길을 따라 1.5㎞ 정도 가서 운문호를 바라보면 호수 가운데 우뚝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이것이 석고봉이다. 석고봉 주위의 물길 모습은 수몰되어 버렸다.

석고봉에서 당시에는 남녀가 사랑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양대(陽臺)는 고사에서 유래된 용어로, 남녀가 정을 나누는 장소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2곡에서 여색의 유혹을 극복하고 구곡을 향해 나아감을 노래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박하담은 ‘운문부(雲門賦)’에서 유람하는 사람들이 운문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 얼굴을 한 옥녀산을 만나면 더 이상 유람하지 않고 머물며 마음을 그르친다고 지적하며 경계하고 있다.

‘삼곡이라 빗긴 언덕 우선 모양이고(三曲橫坡等藕船)/ 신선이 속세 밖에 노니니 하루가 일년이네(仙遊物外晝如年)/ 간장 창자 사이 다섯 근심 지금 다 씻으니(腸間五累今消盡)/ 밝고 밝은 마음 내 가장 사랑하네(寶鑑明明我最憐)’.

3곡 횡파는 석고봉 맞은편에서 6㎞ 정도 위에 위치한다. 박하담의 표현대로 우선(藕船), 즉 연 모양의 배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연 모양의 배가 운문천을 따라 내려가는 듯한 이 언덕에서 박하담은 신선처럼 물외(物外)에 노닐었다. 여기서 근심을 다 씻고 밝은 마음을 회복해 그 마음으로 살고자 했다.

‘사곡이라 시내를 둘러서 사면이 바위이니(四曲環溪四面巖)/ 아름다운 꽃과 기이한 풀 드리웠네(瑤花異草影)/ 천문동 골짜기에 기절처가 많이 있어(天門洞壑多奇絶)/ 돌기운 구름에 닿고 달은 못에 비치네(石氣摩雲月印潭)’.

4곡 천문동을 읊고 있다. 천문동은 횡파 입구에서 운문사 방향으로 3㎞ 정도 올라가면 신원교가 나오는데, 신원교 근처의 물굽이가 이곳이다. 4곡 아래에서 이 운문천과 신원천이 만나 운문댐으로 흘러든다.

내원암 입구에 5곡

‘오곡이라 산이 높고 땅은 더욱 깊으니(五曲山高地愈深)/ 연하가 곳곳에 평평한 숲을 덮고 있네(煙霞多處靄平林)/ 분향하고 묵묵히 앉아서 주역 읽으니(焚香默坐看周易)/ 내원암이 맑고 서늘해 심성을 기르네(內院淸凉養性心)’.

5곡 내원암 입구다. 사곡에서 운문사 쪽으로 2.5㎞ 올라가면 운문사 가는 길과 내원암 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을 만난다. 이곳에서 운문천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한 굽이가 나온다. 이 굽이가 5곡이다. 고요하고 청정한 곳에서 주역을 읽으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심성을 기른다는 것이다.

‘육곡이라 숲의 문이 돌 물굽이 마주하니(六曲林對石灣)/ 잔나비 울고 꽃 피어도 상관하지 않네(猿啼花笑不相關)/ 생생하는 사물 이치 천지에 보노라니(生生物理觀天地)/ 유인으로 하여금 노에 의지해 한가롭게 만드네(能使遊人倚櫂閑)’.

6곡 석만이다. 석만은 운문사와 사리암 중간쯤 되는 지점이다. 시내가 온통 돌로 이루어져 있어 그렇게 명명한 모양이다. 여기서 그는 잔나비가 울고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며, 한가로운 마음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칠곡이라 백탄으로 내려가니(七曲登臨下白灘)/ 우뚝 솟은 사찰 수풀 건너에 보이네(嶢梵宇隔林間)/ 구름 헤친 큰 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披雲巨手今安在)/ 가을 달의 맑은 정신 수면 위에 차갑네(秋月精神水面寒)’.

7곡은 백탄이다. 6곡 석만에서 길을 따라 1㎞ 정도 올라가면 사리암 입구에 도착한다. 이곳 근처의 시내가 백탄이다. 이곳의 운문천은 하얀 모래와 돌이 바닥에 깔려 백탄, 즉 흰 여울을 이루고 있다. 7곡에서 산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가면 사리암이 나온다.

7곡에서는 가을 달과 같은 맑은 정신을 노래하고 있다.

‘팔곡이라 운림이 합했다 다시 열리니(八曲雲林合復開)/ 도인봉 아래 작은 시내 돌아 흐르네(道人峯下小溪)/ 이 한가한 가경 아는 사람 드물어(此閑佳境人知少)/ ○○○늙은이 읊조리며 돌아오네(○○○翁伴詠來)’.

8곡 도인봉은 7곡에서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다. 봉우리 부분에 큰 바위가 비스듬히 드리워 있는데, 멀리서 보면 도인이 앉아 수련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신라 때 한 스님이 이곳에서 수련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박하담은 8곡에서 절경을 찾는 일반인은 모르나 자신은 이곳에서 한가한 가경, 즉 도의 극처에 가까움을 알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마지막 구절의 세 글자가 누락돼 있다.

‘구곡이라 산이 다하고 물 맑아서(九曲山窮水瑩然)/ 물고기 발발하게 평천에서 뛰노네(遊鱗潑潑躍平川)/ 고깃배는 이날도 도원을 찾지만(漁舟此日桃源覓)/ 달리 운문에 한 동천 있다네(別有雲門一洞天)’.

9곡은 평천이다. 8곡에서 산길 따라 1.5㎞ 정도 가면 운문산이 끝자락에 이른다. 이 굽이에 이르면 계곡이 환하게 열리면서 확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멀리 가지산이 보이고 가까이는 운문산 끝자락이 보인다. 주자의 무이구곡의 9곡을 떠올리게 한다.

박하담은 별천지인 무릉도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바로 별천지라고 이야기한다.

청도 박곡리사지.

‘세속오계’ 산실 가슬갑사 비롯한 다섯 개 갑사 중 한 곳 추정.

오갑사, 대작갑사 중심으로 동서남북 4곳에 사찰 건립,

오갑사 관련 중요 인물로는 세속오계 제정한 원광 스님,

청도군, 가슬갑사를 비롯해 오갑사 찾으려 꾸준히 노력,

운문사의 전신 대작갑사와 천문갑사 외에 위치 못찾아,

청도 박곡리사지 특히 주목 여래좌상 등 신라불상 남아,

소작갑사지의 후보지 추정 고려후기까지 운영된 듯.

청도 박곡리사지 전경.
1718년에 간행된 ‘청도군 호거산 운문사사적(淸道郡虎踞山雲門寺事蹟)’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의 작은 암자에서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오갑사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오갑사는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총칭하는 것이다.

오갑사와 관련해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원광법사이다. 원광 스님의 속성은 설씨 혹은 박씨라고 하며, 신라 왕경인이다.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삼국유사’나 ‘해동고승전’ 등에서 “성품이 허무와 정적을 좋아하고 말 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으며 얼굴에 성내는 기색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은 25세에 중국 진나라 수도 금릉(지금의 남경)으로 유학을 떠났었는데, 어느 날 장엄사 승민 스님의 제자에게서 법문을 듣고 감화되어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승려가 되기를 청하였다. 일반 유학생에서 유학승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불상 .
원광 스님이 신라로 돌아온 것은 신라 진평왕 22년(600)이었다. 이때 삼국은 항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때였다. 그는 귀국 직후 왕경에 머물지 않고 왕경과 떨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청도의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제정하였다. 전자는 일반 백성을 위한 것이고, 후자는 신라 청년들에게 내려준 계율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속오계는 신라 화랑도정신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슬갑사는 화랑도 이념의 산실이 된 것이다. 운문사 사적비에 의하면 오갑사의 제1중창주는 원광법사라고 되어있다.

삼국통일의 정신적 근원지인 가슬갑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후삼국 때 이미 폐사되었으며 사찰에 있었던 기둥들이 모두 대작갑사로 옮겨졌다고 한다. 통일신라 이후 어떠한 기록에도 보이지 않아 가슬갑사는 폐사 이후 중창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일연 스님도 그 터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대략적인 위치만 기술하고 있다.

그동안 청도군은 가슬갑사를 포함한 오갑사를 찾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1970년도에 이미 ‘운문산사적개발위원회’를 만들어 가슬갑사지를 찾고자 하였으며, 그 후 청도군의 주도아래 가슬갑사지를 찾기 위한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시작되었다. 사적개발위원회가 발행한 보고서에 의하면 1973년도에 2차례 조사했으며, 그 결과 건물 초석으로 사용되었을법한 석재들이나 장대석들이 상당수 남아있는 ‘안삼계리 초석군’을 가슬갑사지로 비정하였다. 이어서 1993년 경북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실시한 2차 조사에서는 바깥삼계리 유적을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이어 3차로 가슬갑사지를 조사한 곳은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이다. 불교사학연구소는 기존 경북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제기한 바깥삼계리 유적이 가슬갑사지라는 주장을 지지하였다. 이후 1998년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학연구소와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함께 바깥삼계리유적을 발굴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가슬갑사지의 흔적을 찾지는 못하였다.


불상 광배.
오갑사 중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곳은 현재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와 운문면 신원리에 있는 천문갑사 뿐이고, 다른 갑사들은 앞의 가슬갑사처럼 위치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에 있는 절터에 통일신라 때 조성되었다고 생각되는 불상과 대좌, 그리고 광배까지 남아 있어서 운문사 사적에는 대비갑사라고 되어있지만 ‘삼국유사’의 내용대로 하면 원래 ‘소작갑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이 아닐까 주목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소작갑사’의 위치 또한 박곡리의 이 절터를 비롯해 총 세 곳이 가능성 있는 곳으로 언급되어 왔다.

먼저 1993년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펴낸 ‘가슬갑사지 지표조사 보고서’에서는 ‘운문사사적’에 언급된 ‘대비갑사’의 위치를 토대로 이 절터, 이 절터에서 1㎞ 떨어진 ‘베틀바위 부근 사지’, 이 절터에서 1.5㎞ 떨어진 ‘오봉리사지’를 ‘소작갑사지’일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추정하였다. ‘베틀바위 부근 사지’는 박곡리 산81번지 일원인데, 우리 연구소에서 2012년 펴낸 ‘한국의 사지’에 ‘소작갑사지’로 보고된 바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불상대좌의 지대석과 하대석, 석불좌상의 하반신이 남아 있고 선문 와편 등이 산재되어 있다. ‘오봉리사지’는 오봉리 1114-1번지 일원이다. ‘한국의 사지’ 보고서에 의하면 과수원 내에 석탑재 1매가 있고 당초문, 연화문 와편 및 선문 와편 등의 유물이 산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소작갑사지일 가능성이 있는 세 곳의 절터 모두에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고 보이는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고, 또한 석탑, 불상 등의 소재문화재도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등 유적의 성격이 거의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현재로서 지표조사 결과만을 토대로 소작갑사의 위치를 명확하게 비정하기는 어렵다.


경북 청도 박곡리 석조석가여래좌상. 1918년 촬영.
이 절터의 불상과 탑에 대해서는 1918년에 조사가 이루어진 바 있다. ‘대정칠년도고적조사보고(大正七年度古蹟調査報告)’에는 ‘금천면 박곡동 석불병석탑(錦川面 珀谷洞 石佛竝石塔)’에 대한 간략한 조사 내용과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사진자료에 의하면 불상은 보호각 내에 봉안되어 있었고, 대좌와 광배, 불신 모두 온전한 모습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박곡리사지의 영역은 운문산 북쪽 계곡부에 있는 미륵댕이마을 일원이다. 미륵댕이마을은 동쪽 운문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펼쳐진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 계곡 상류에는 대비저수지가 있으며, 대비저수지의 남쪽 끝에 현 대비사가 있다. 또한 이 절터에서 동쪽 능선 너머에 있는 천문지골의 하류에는 운문사가 있다. 앞서 언급한 ‘베틀바위 부근 사지’는 이 절터 북쪽 계곡 중턱에 있으며, 약 900m 가량의 거리를 두고 있다.

사역의 중심은 현재 불상이 봉안되어 있는 박곡리 651번지이다. 현재 불상 보호각은 ‘미륵당’으로 불리고 있으며, 담장 내에 보호각 1동과 석탑이 있다. 마을 주민(80세, 마을 거주 70년 이상)의 전언에 따르면 사찰은 오래 전에 폐사되었고, 마을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불상은 일제강점기 후반 무렵 화재로 인하여 인접 민가가 불에 타면서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청도 박곡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03호)은 보호각 내에 봉안되어 있으며, 전체 높이는 289.5㎝이다. 불상은 화재로 인하여 두부의 윤곽만 남아 있고, 대좌 상대석도 크게 파손된 상태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불상은 1918년도에 조사되었는데, 당시 촬영한 사진을 보면 불상은 보호각 내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두부에는 이목구비의 윤곽과 나발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고 대좌 상대석은 중앙에 원형화문이 장식된 단판 연화문을 이중으로 두른 형태였다. 또한 배후에는 화문과 화염문으로 장식된 주형광배가 세워져 있었다. 이 주형광배는 현재 망실되었고, 보호각 바깥에는 이 광배와는 다른 광배가 있어서 이 절터에 불상이 한 구 더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북 청도 박곡리 석조석가여래좌상 대좌. 1918년 촬영.
불상은 일제강점기 사진자료를 참고하면, 얼굴은 방형에 가까운 형태이고, 좁은 이마의 중앙에 백호공이 있었으며 눈썹은 호형의 곡선을 이루며 길게 새겨져 있고, 가늘게 뜨고 있는 눈 밑에는 호형의 눈밑 주름이 표현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이 사진을 촬영했던 당시 이미 코와 입은 마모된 상태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왼손을 복부 위에 둔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다리는 결가부좌하여 양 발을 노출시키고 있다. 대의는 오른쪽 어깨를 노출시켜 편단우견으로 입었다. 양 다리 사이에는 부채꼴형 옷주름이 표현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이 부분은 파손된 상태였다.

대좌는 상·중·하대가 모두 남아 있지만 온전하지 않다. 현재 하대석은 하부 팔각의 단 위에 복련의 연화좌만 드러나 있는 모습이며, 그 이하는 바닥면 아래에 매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조사자료에도 하부는 조사되지 않아 지대석 등의 유무는 알 수 없다. 중대석의 상부를 비롯한 여러 부분에는 화재로 인한 균열이 있고,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 엽상박리가 진행되고 있다. 상대석은 원래 원형의 앙련좌였으나, 현재 외연의 대부분이 파손되었다.

이 불상은 현재 화재로 인한 심한 손상을 입은 상태이지만, 원래 불상의 모습은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666호), 경주 안계리 석조석가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2호),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65호) 등과 유사한 양식을 갖추고 있고 규모 또한 안계리상과 유사하다. 이로 보아 불상의 제작시기는 8세기 후반 이후일 것으로 추정되며, 8세기 경주 중심의 불상양식에서 9세기 경북지역 불상양식으로 지방화되는 과도기의 양식적 특징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석탑은 상층기단과 별석괴임, 1층 탑신부, 2층 옥개석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 3층의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탑은 1993년에 수리되었는데, 부재를 모두 해체하여 지대석의 형태를 바로잡고 지표에서 약 15㎝ 가량 들어올려 복원하였다고 한다.

박곡리사지는 현재까지 그 위치가 명확히 비정되지 않은 ‘소작갑사지’의 후보지 중 한 곳으로, 산포유물과 소재문화재 등의 양상으로 보아 통일신라 8세기 이후에서 고려후기까지 사찰이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가슬갑사지를 비롯한 오갑사의 위치를 찾고자 여러 차례의 지표조사와 학술조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발굴조사 등의 정밀조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여서 아직까지 명확한 위치 비정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향후 이 절터를 포함한 운문산 일대 불적의 정밀학술조사가 다시 진행된다면, 중요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우수농특산물 직거래. 농산물직거래 청도장터 개장식.

경북 청도군(군수 이승율)은 6일 각북면 꿈그린농원에서 우수농특산물을 직거래하는 청도장터 개장식을 가졌다. 청도장터는 매주 토·일요일 문을 열어 연말까지 운영된다.

경북 청도의 은행나무 후손이자 북미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

북미대륙 최고령의 은행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안내소를 나서자 넓은 공지에 자라는 은행나무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루터기에서 나온 다수의 줄기 대신 단 하나의 줄기로 자라는 북미대륙 최고령 은행나무는 당당하고 매끈했다. 먼저 거대한 줄기를 두 팔로 안아보았다. 230여 년의 세월을 증명하듯 줄기는 굵었다. 수고(樹高) 33m, 가슴 높이 직경 1m 이상으로 자란 이 은행나무의 머나먼 행로를 헤아려보았다. 조선의 청도에서 유럽대륙(네덜란드와 벨기에 등)으로 건너간 은행나무의 후손이 열매를 맺어 영국 땅에서 싹을 틔워 자라다가, 묘목의 신분으로 다시 대서양을 건너 북미대륙의 동쪽 구석에 마침내 자리 잡은 긴 여정,

바트램 식물원 미국 최고령 은행나무(왼쪽). 경북도 기념물 109호 은행나무. [Bartram’s Garden 제공, 청도군 제공]

은행나무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은행나무는 우리 주변에서 가로수나 정원수로 쉽게 볼 수 있고, 식물이나 자연에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보면 쉽게 마음을 빼앗길 만큼 아름답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우리나라에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용문사 은행나무), 세계에서 가장 굵은 은행나무(반계리 은행나무), 세계에서 옮겨 심은 가장 큰 나무(용계리 은행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은행나무는 2억 년 전에도 공룡과 함께 북반구와 남반구에 펴져 있던 신비의 생명체다. 수천만 년 동안 가까운 친척이라곤 전혀 없이 유아독존의 형태로 존재한 기이한 수목이다. 고사리류와 침엽수의 중간 식물 형태를 아직도 간직하기 때문에 ‘화석식물’이라고도 일컫는다. 은행나무는 마지막 빙하기 동안 지구상의 대부분 지역에서 멸종했고, 오직 중국 땅 중남부의 손바닥만 한 산지에서 겨우겨우 목숨을 연명했다. 천수백 년 전 인간의 도움으로 겨우 멸종 위기에서 벗어나 중국 중남부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로 건너가 마침내 유럽대륙과 북미대륙에 재상륙한 나무가 은행나무다. 

북미대륙 최초의 은행나무를 찾아 나선 계기는 중국과 독일 학자들이 2010년 발표한 논문에서 비롯했다. 분류학회지 ‘탁손’에 발표한 ‘중국 밖으로의 은행나무 전파 역사’란 제목의 논문은 중국(92개체), 한국(11개체), 일본(18개체), 유럽(14개체), 미국(10개체)에서 선정한 145개체의 노거수 은행나무를 대상으로 분자유전학적 분석을 통해 은행나무가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간 경로를 밝힌다. 

이 연구 결과 중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연구 대상에 포함된 한국의 6번 조사목이다. DNA 유전분석 결과, 이 조사목은 유럽 대륙에 최초로 도입된 네덜란드(1730년)의 은행나무를 비롯해 이탈리아(1750년), 프랑스(1750년), 오스트리아(1770년), 미국(1784년), 독일(1826년)의 은행나무와 유전적 유사성이 매우 크지만, 일본의 18개 조사목과는 유사성이 작다고 나타났다. 

지금껏 세계 식물학계는 유럽대륙에 최초로 소개된 은행나무는 일본에서 들여온 것으로 믿었다. 그와 같은 믿음은 은행나무를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사람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직원으로 일본에 2년 동안 파견된 엥겔베르트 캠퍼(Engelbert Kaempfer·1651~1716)였고, 오래전부터 그가 은행 종자를 유럽에 가져왔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즈음도 많은 식물학자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대학교 식물원(Utrecht University Botanic Gardens)에서 자라는 은행나무는 캠퍼가 귀국하면서 가져온 은행 종자를 1730년에 심은 것이라고 믿는다. 캠퍼 당시에 은행나무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만 알려진 나무였다. 

일본 근무를 마친 캠퍼는 1695년 암스테르담으로 귀국해 은행나무와 일본의 식물상 등을 담은 박물지 ‘회국기관(Amoenitatum Exoticarum·廻國奇觀)’을 1712년 출판했다. 은행나무와 관련한 그의 다양한 활동은 유럽의 은행나무가 일본에서 유래됐다는 믿음을 자연스럽게 심어줬다. 

분류학회지 ‘탁손’에 발표된 은행나무 논문은 1730년 이후 유럽 각 지역에 식재된 은행나무의 산지가 일본이라는 학계의 기존 추정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다. 오히려 유럽에 전파된 은행나무의 조상은 일본 은행나무가 아니라 한국의 6번 은행나무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한다. 

6번 조사목은 경북 청도군 매전면 하평리 1323번지에서 자라며, 1995년 6월 30일 경북도 기념물 109호로 지정된 나무다. 조선 시대에 낙안당 김세중(金世中· 1484∼1553)이 1509년에 심었다고 전해지며, 수령은 약 500년, 수고 27m, 둘레 7.6m에 이르는 거대한 암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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