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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 壬午軍亂

임오군란 , 壬午軍亂

1882년(고종 19) 6월 9일 훈국병(訓局兵)들의 군료분쟁()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 이후 실각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 1882년(고종 19) 6월 9일 구식군대 가 일으킨 병란.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 · 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 씨 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신식 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 · 장어영()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 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 달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 군졸들이 고지 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난병들은 대원군에게 진정하기 위해 운현궁()으로 몰려와 애소했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난병을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심복인 허욱을 시켜 그들을 지휘케 했다. 그리하여 군민의 불평은 대원군과 연결되어 민 씨 및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 공병소위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 순사 등 13명의 일인을 살해했다. 그러나 하나부사()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쳐서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더욱 강력해진 군민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영돈령부사 이최응() 등을 살해하고,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후 궁궐을 탈출, 충주 장호원()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고종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맡겨 반란을 수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대원군을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대원군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군란의 뒷수습에 나섰지만, 민 씨 일파의 청원을 받아들인 청나라가 재빨리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그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청나라는 이 난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해갔으며,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과 손해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맺게 했다. 군변으로 시작된 이 난은 결국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결과가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개화 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노출시켜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군란의 배경을 단지 민씨척족정권()에 대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의 정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고종을 비롯한 민 씨 척족 정권이 개화 정책을 추진해 일본과 구미 제국과의 교섭 통상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개화파 관료가 제도 개혁에 따라 대거 등장하자 수구파의 반발이 격화되었다. 5 영(營)을 폐지한 후 무위()·장어()의 2 영을 설치하고 별기군()을 창설하는 등 군제 개혁이 단행되자 구 5 영소 속 군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881년 전개된 수구파의 위정척사론과 이재선()·안기영() 등의 토왜반정음모사건()을 계기로, 민 씨 척족 정권은 대원군파와 특히 남인 계열의 수구파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함으로써 지배층의 분열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이밖에도 민 씨 척족 정권의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및 국고의 낭비,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인한 불만 등을 군란의 배경으로 들 수 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수 차에 걸친 군병들의 반항이 있었다. 1863년(철종 14)의 금위영 소속 군병의 소요, 1877년 8월의 훈국병 소요 등은 모두 군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도 군료 문제에 있었다. 군제 개혁 후 구 5영 소속 군병의 대부분은 실직하였다. 또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개편된 군병이라 할지라도 신설된 별기군에 비해 열악한 대우에 처해 있었다. 더욱이 이들 구 5 영소 속의 군병들은 13개월이나 군료를 받지 못하고 있어 불만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특히, 그들은 군료 관리인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전 당상이었던 경기관찰사 김보현()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1882년 6월초에 전라도 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하자, 6월 5일 도봉 소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구훈련도감 군병들에게 한 달분의 군표를 지급했으나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만 아니라, 그 양도 반이나 모자랐다. 이때 포수() 김춘영()·유복만() 등이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에게 항의해 시비가 격렬해졌다. 이에 다른 군병들도 합세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당시 궁중에 있던 민겸호는 이 소식을 듣고 김춘영·유복만 등 주동자를 포도청에 가두었고,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그중 2명을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 소식에 격분한 군병들은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의 주동으로 통문을 발송, 군병의 결집을 호소하였다. 6월 9일, 소요는 마침내 대규모의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우선 민겸호의 집을 습격했고, 이후 행동방침을 결정하기 위해 대원군의 지시를 받았다.

 

대원군이 군병의 대표자들에게 어떤 밀계를 지령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군병들의 이후의 행동으로 볼 때 전 해에 있었던 이재선의 토왜반정음모사건 당시의 거행 계획을 실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이 군병으로 변장하고 군란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이들 군병은 동별영()과 경기감영의 무기고를 습격하고 포도청에 난입해 동료를 구출한 뒤 척신과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날 저녁에는 일본공사관을 포위, 공격해서 하나부사() 공사는 가까스로 인천으로 탈출하였다. 군란 이틀째인 6월 10일에 사태는 더욱 확대되어 영돈녕부사 이최응()이 살해되었고, 뒤이어 궐내로 난입한 군병들에 의해 민겸호와 김보현도 살해되었다.

 

민씨척족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명성황후()를 제거하려고 찾았으나, 명성황후는 여흥부대부인() 민씨와 무예별감() 홍재희()의 도움으로 탈출해 윤태준(駿)의 집에 은신했다가 광주()·여주를 거쳐 장호원(長湖院)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군병이 궁궐에 침입하자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맡겼고, 이 과정에서 대원군은 재차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대원군은 먼저 군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5 영의 복설, 통리기무아문()의 혁파, 삼군부()의 복설을 명하였다. 제2단계의 개혁으로 척족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였다. 맏아들인 이재면()을 훈련대장 겸 호조판서·선혜청당상에 임명하여 병재() 양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영의정 홍순목()을 유임시키고 인망 있는 신응조()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그 밖에 신정희()를 어영대장으로, 조희순()을 금위대장으로, 임상준()을 총융사로, 조병호()를 도승지로 임명하였다. 이어서 중앙의 각 부서 및 지방관에도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였다. 대원군이 등용한 인물들은 대부분 남인 계열에 속하는 노 정치가 들이었다. 그러나 인재의 부족을 통감한 대원군은 투옥 또는 유배 중인 죄수들을 석방시켜 등용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제3단계로서 서정개혁을 단행하였다. 각 지방의 미납 세미의 상송을 명해 군병의 군료와 도민()의 식량에 충당하였다. 이어서 민폐의 근원이 된 신감채()와 해홍채()의 징수 금지, 주전() 금지, 도가()의 민폐 금지 및 무명잡세()의 징수 금지 등을 명하였다.

 

대원군 정권은 불과 33일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원인으로는, 첫째 명성황후의 국장 절차를 강행하는 동안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했다는 것, 둘째 고종 친정 10년간 대원군 파는 철저히 탄압되어 신정권에 참여할 수 있는 인재가 부족했다는 것, 셋째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군란 처리를 위해 청일 양국이 재빨리 출병한 데다가 특히 청나라가 대군을 출동시켜 7월 13일 대원군을 납치한 것을 들 수 있다. 하나부사 공사 일행은 6월 12일 영국 측량선 플라잉피시호(The Flying Fish)에 구조되어 15일 나가사키()에 도착, 군란 사실을 외무성에 타전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무력을 배경으로 한 대조선 기본 방침으로 세웠으나, 방법에 있어서는 강경·온건의 두 파로 나뉘었다. 이때 각의()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육군경() 야마가타()는 조정론을 제시하여 강경론에 찬성하면서 출병 시기는 온건파가 주장하는 담판 교섭 결과를 참작한다는 것으로 방침을 굳혔다.

 

이에 따라 교섭 문제는 이노우에() 외무경에게 위임되었다. 이노우에는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하나부사 공사에게 기밀 훈령과 훈조()를 전달한 다음, 그에게 육군을 인솔, 조선 정부와 교섭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전달한 기밀 훈령은 조선 정부에 요구할 사항으로, 9개 조항으로 되어 있었다. 사죄(), 폭도의 징판(懲辦), 피해자에 대한 보상, 출병 비의 배상, 일본 공사관의 병력 보호, 안변()의 개항, 거제() 또는 송도()의 양여, 조선 관원 중 폭도 옹호자의 제거, 강상( : 기타 배상) 처분 문제 등이었다. 그 뒤 청 측의 문제가 대두되자 일본 정부의 태도는 한층 강경해져, ① 함흥·원산·양화진의 개시, ② 공사·영사관원의 내륙 여행권 획득, ③ 원산·안변에 있어서의 일본인에 대한 폭행사건 해결, ④ 통상조약에 관한 유리한 양보의 획득 등 추가 요구조건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요구사항은 군란을 구실 삼아 그동안 해결하지 못한 통상상의 특권이나 치외법권 및 개항장의 요구를 단번에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하나부사 공사 일행은 6월 29일 제물포에 도착했고, 7월 3일까지 약 1,500명의 병력이 상륙하였다. 하나부사 공사 일행은 1개 중대의 호위 병력을 인솔해 7월 3일 입경하였다. 7일에 있었던 고종 알현에서 7개 조항(후에 1개 항이 추가됨.)의 요구 책자를 제출하고 회답 기한을 3일 내로 한다고 통고하였다.일본 측의 일방적인 통고에 대해 조선 정부는 심하게 반발했고 일부에서는 무력에 의한 토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대원군은 이러한 여론을 감안해 일본측의 요구 책자를 반송하는 한편, 청군에 연락을 취해 조속 입경을 촉구해서 일본 측과의 교섭은 교착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청 측에서는 6월 18일 청출사 일본 대신(淸出使日本大臣) 리수창()이 서리 북양대신(署理北洋大臣) 장수성()에게 친 전보를 받고 군란 소식을 알게 되었다. 장수성은 즉각 이 사실을 총리아문()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조선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통령 수사 제독(統領水師提督) 딩루창()에게 쾌선 2척과 군함 1척의 출동준비를 명했다. 당시 남하 중이던 도원() 마젠충()에게도 상해() 대기를 지시하였다. 장수성은 리수 창의 계속된 전문 보고로 일본군의 출병 상황과 조선 왕궁의 피습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는 진해 관도(津海關道) 주후()에게 당시 톈진()에 체류 중인 영선사(使) 김윤식(), 문의관() 어윤중()과 만나 군란이 일어난 배경을 탐문하도록 했다.

 

장수성은 18일부터 26일까지의 회담에서 대원군 난수설(大院君亂首說), 대원군의 제거 방략, 청군의 입경 방략 등을 제시해 청 측의 사태 개입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군대를 출동시키기에 앞서 마젠충과 딩루창이 27일에 인천에 도착해 군란 상황에 대한 제반 정보를 수집하였다. 딩루창은 일단 톈진에 돌아갔다. 그곳에서 출병 준비를 완료하고 있던 광동 수사 제독(廣東水師提督) 우 창칭(吳長慶)과 회동해서 7월 4일 옌타이()를 출발, 7일 남양부()에 도착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대원군의 입경 촉구의 서신이 도착해 있어서 마젠충은 간창대() 200명을 인솔해 수원을 거쳐 10일 입경했고, 12일에는 모든 청군이 입경하였다.

 

마젠충은 입경 다음 날 인천으로 가서 하나부사 공사를 만나 교섭 재개를 종용하였다. 하나부사 공사는 다음 날 마젠충을 방문해 조선 정부에서 전권 대관(全權大官)을 인천에 파견하면 교섭 재개의 용의가 있다고 통고하였다. 교섭을 끝낸 마젠충은 당일로 상경해 딩루창·우 창칭 양제 독과 대원군의 납치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 때 우창칭은 조일간의 교섭 타결을 선결 문제로 주장했으나 마젠충은 끝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13일 정오 우선 딩루창·우창칭 양제독과 마젠충은 대원군을 예방해 안심시켰다. 그리고 오후 4시경 답례 온 대원군을 강제로 납치해 밤을 타 남양만의 마산포()로 호송, 청나라 병 선편으로 톈진으로 이송시켰다. 이렇게 하여 대원군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정권을 회복한 고종은 7월 14일 마젠충의 건의에 따라 선후책()을 강구하였다. 우선 봉조하() 이유원()을 전권대신으로, 공조참판 김홍집()을 부관으로 임명해 하나부사 공사와 협상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7월 15일 이후 17일까지 3차 회담이 있었고, 양측 대표는 제물포조약 6조와 수호 조규 속 약(修好條規續約) 2조에 각기 조인하였다. 이러한 선후 교섭(善後交涉)이 체결되는 동안 민 씨 척족 정권은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청군은 16일 난다 소탕을 구실로 왕십리와 이태원 방면에 출동해 군병 170여 명을 체포, 그중 11명을 참수하였다. 하나부사 공사는 선후 조약 1조에 의거, 흉도 체포를 요구하였다.

 

포도청에서 송치한 손순길()·공치원()·최봉규() 등 3명을 효수했고, 이진학() 등 3명은 유배시켰다. 이러한 타율적인 탄압 외에도 조선 정부에서는 난군 주동자들을 계속 처단했다. 이와 아울러 대원군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 조병창(趙秉昌)·조우희(趙宇熙)·이회정(李會正)·임응준(任應準)·정현덕(鄭顯德)·조채하(趙采夏)·이재만(李載晩) 등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군란이 수습되자, 고종은 7월 18일의 교서에 이어 20일에는 실정() 8 항목을 들어 자책하고 유신()을 다짐하는 윤언()을 내렸다.

 

고종은 제도 개혁을 서둘러 7월 25일 기무처()를 설치하였다. 리훙장()이 추천한 중서사인() 마젠창()과 독일인 묄렌도르프(Mӧllendorff, P.G.von)가 도착하자, 11월 17일과 18일 양일 사이에 통리아문과 통리 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을 신설하였다. 이 두 아문 은 12월 4일에 이르러 통리 군국 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과 통리 교섭 통상 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개칭되었다. 이 밖에 새로운 기구로서 주전소(鑄錢所)·기기국(機器局)·혜상공국(惠商公局)·기연 해방 사무(畿沿海防事務)·각항 해관(各港海關) 등이 신설되었다.

 

정부기구의 재정비를 목적으로 감생청()이 설치되었으며, 청군의 지도 하에 군제 개혁을 단행해 4 영의 친군영()을 창설하였다. 군란이 수습된 이후 고종의 유신 선언에도 불구하고 민 씨 척족 정권은 구태의연한 정치풍토 속에서 정권 유지에만 급급하였다. 진정한 개혁은 실현되지 않았고, 다만 무정견 한 개화 정책만 되풀이되었다. 보다 주목되는 것은 군란 이후 청일의 압력이 가중되었다는 사실이다.

 

청나라는 군란 수습과정에서 보인 조처는 물론이려니와 이후 조선의 내정·외교 문제에 적극적으로 간섭해 이른바 종주권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정부에는 척족과 개화파 관료 계층 사이에 친청·친일 정책의 두 부류가 생겨나 대립하여 결국 갑신정변이 야기되었다. 임오군란은 민 씨 척족 정권이 추진한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과 정치·경제·사회적인 모순을 배경으로 일어난 군민의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강화도조약 체결로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 정세는 개국·개화로 향하게 되었다.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국왕과 명성황후 측의 척족()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양분, 대립하게 되었으며 외교노선은 민 씨 정권이 추진한 문호 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 제국(歐美諸國)과의 통상관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은 더욱 심해졌으며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백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었다.

 

개화 정책에 따른 제도의 개혁으로 정부기구에는 개화파 관료가 대거 기용되었으며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하고 이듬해에는 종래의 훈련도감·용호(龍虎)·금위(禁衛)·어영(御營)·총 융(摠戎)의 5 영(營)을 무위영()·장어영()의 2 영으로 개편하자 여기에 소속하게 된 구영문의 군병들은 자기들보다 월등히 좋은 대우를 받는 신설 별기군을 왜 별기(倭別技)라 하여 증오하게 되었다.

 

구군영 소속 군인들에게는 군량이 풍부하였던 대원군 집정 시대와는 달리 13개월 동안 군료()가 밀려 불만은 고조되었고 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군병은 민 씨 정권 이후 빈번하게 일어나는 군 료미 불 사태의 원인이 궁중 비용의 남용과 척신들의 탐오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특히 군료관리의 책임자인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병조판서 민겸호()와 경기도관찰사 김보현()에 대해서는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1882년 6월 초 전라도 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되자 6월 5일 선혜청 도봉 소(都捧所)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구(舊)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1개월분의 급료를 지불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혜청 고직()의 농간으로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 아니라 두량()도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군료의 수령을 거부하고 시비를 따지게 되었다. 군료의 지급 담당자가 민겸호의 하인이며 그의 언동이 불손하여 군병들의 격노를 유발시킴으로써 군료의 수령을 거부한 구훈련도감 포수() 김춘영()·유복만(정의길(강명준() 등을 선두로 하여 선혜청 고직과 무위영 영관()을 구타하고 투석하여 도봉 소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민겸호는 주동자의 체포령을 내려 김춘영·유복만 등 4, 5명의 군인이 포도청에 잡혀갔다. 이어서 그들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 중 2명이 곧 사형되리라는 소문이 퍼지게 되어 군병들은 더욱 격분하였다(도봉 소사 건). 이에 김장손(유춘만(:유복만의 동생)이 주동이 되어 투옥된 군병의 구명운동을 전개시키기 위해 통문을 작성하였다. 6월 8일에는 이최응()이 별 파진(別破陣)을 동원하여 군변을 진압할 것을 국왕에게 건의했다는 소문이 퍼져 군병들은 더욱 흥분되어 도봉 소의 군료시비사건은 정변으로 확산되었다. 6월 9일 김장손과 유춘만을 선두로 한 무위영 군병들은 무위 대장 이경하()의 집에 가서 민겸호의 불법과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으나 이경하는 군료관할의 권리가 없다는 것을 내세워 변백 구해(辨白求解)하는 글을 써주고 민겸호에게 직접 호소하도록 하였다.

 

민겸호의 집 앞에 이른 군민들은 도봉 소 고직을 발견하여 민겸호의 집안으로 난입하게 되었으나 민겸호와 고직은 찾지 못한 채 가재도구와 가옥을 모두 파괴시키고 폭동을 일으켰다. 사태의 중요성을 생각하여 민 씨 정권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 김장손과 유춘만 등은 운현궁()으로 올라가 대원군에게 진정한 후 진퇴를 결정해주기를 요청하였다.

대원군은 이러한 군민의 소요사태에 대해 무위영 군졸 장순길() 등에게 명하여 표면상으로는 효유 선무하는 태도를 취하여 밀린 군료의 지급을 약속하며 해산하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김장손과 유춘만 등을 불러 밀계()를 지령하고 심복인 허욱()을 군복으로 변장시켜 군민들을 지휘하게 하였다.

 

대원군과 연결된 군민들은 좀 더 대담하고 조직적인 행동을 개시하여 일대()는 동별영()의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약탈하여 포도청에 난입한 후 김춘영·유복만 등을 구출하고 이어서 의금부()를 습격하여 척 사론자(斥邪論者)인 백낙관() 등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다른 일대는 경기감영을 습격하여 무기를 약탈하고 나머지 일대는 강화유수(민태호()를 비롯한 척신과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 파괴하였다.

 

군민들은 이날 저녁에 일본공사관을 포위 습격하자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 등 공관원 전원이 인천으로 도피하였다. 또 한 편의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 하도 감(下都監)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 공병 소위를 살해하고 일본 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하는 등 일본 공사관 습격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날의 폭동은 끝났다. 이튿날은 전날보다 더 강력해진 폭동 군민들이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돈령부 영사(敦寧府領事) 흥인군() 이최응과 호군() 민창식()을 살해하고, 창덕궁 돈화문()에 육박한 후 곧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궐내로 난입하였다. 난군들은 궐내 도처에 흩어져 명성황후와 척신들을 수색하던 중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도관찰사 김보현을 발견하여 살해하고 계속 명성황후의 행방을 찾았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홍계훈()의 도움으로 충주 장호원()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한편 군민들의 난동을 조정에서는 민겸호의 보고에 의해 단순한 도봉 소의 군료분쟁으로 생각했으나 척신들의 집들이 습격·파괴되고 군민이 대거 폭동에 참가하게 되자 무위 대장 이경하를 동별영에 보내어 진무 시켰으나 실패하였다.

 

점점 사태가 위급하게 번지자 당면의 책임자를 문책한다는 뜻에서 선혜청 당상 민겸호, 도봉 소 당상 심순택(), 무위 대장 이경하, 장어 대장(壯禦大將) 신정희() 등을 파직시키고 무위 대장 후임으로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을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상호군(조영하()의 제안에 따라 별기군 영병관(윤웅렬()을 통해 일본공사 앞으로 서한을 보내어 군 변사 실을 통고하고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였으나 군민들의 공격으로 공관원 전원이 인천으로 탈주한 뒤였다. 난민들이

궐내로 진입을 하게 되자 국왕은 사태의 수습을 위해 대원군의 입시를 명하였고 이에 따라 대원군은 부대부인() 민 씨(閔氏)와 장자 이재면을 대동하고 입궐하였는데 이때 허욱의 지휘 하에 구훈국병(舊訓局兵) 200명이 대원군을 호위하였다.

 

임오군란의 상황도

대원군은 사태 수습의 책임을 맡고, 왕명으로 ‘자금() 이후 대소 공무()는 대원군 전에 품결()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사실상의 정권을 장악했다. 곧이어 국왕의 자책교지()가 반포되어 군변의 정당성이 합리화되었고, 대원군은 이를 계기로 군민을 무마하여 사태 수습에 나서 우선 군병의 요청에 따라 무위영·장어영과 별기군을 혁파하고 5 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혁파하고 3 군부(三軍府)를 설치하였다. 

 

군병들에 대해 군료의 지급을 공약하고 척족의 제거를 위한 인사조치를 단행하여 이재면으로 하여금 훈련대장·호조판서·선혜청 당상을 겸임하게 하여 병()·재() 양권을 장악하게 하고 중앙의 각 부서와 지방의 관찰사 등 수령들에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였다. 대원군이 기용한 인물은 대개 남인 계열의 노 정치가 들이며 인재의 보충을 위해 투옥되었거나 정배 당한 죄수들을 석방시키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서정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민심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는데 6월 15일에는 각 지방의 미납 세미(未納稅米)를 급히 서울로 보낼 것을 지방관에 명하여 군병들의 군료와 도민()의 식량에 충당했으며 20일은 각 공원가(各貢援價)에 감합() 등의 절차는 갑자년(:1864) 이후의 신정 정식(新定定式)에 의하도록 하고, 21일에는 민폐의 근원이 되는 신감채()·해홍채()의 징수를 금지하도록 했다. 22일에는 주전()을 금지시키고 동시에 각종 도고()의 민폐에 관한 것도 혁파시켰으며 26일에는 수세()에 원래 정한 액수 이외의 부과는 일절 금지하도록 하였다.

 

일부 난병들은 명성황후의 처단을 주장하고 해산을 거부했으므로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실종을 홍거()로 단정하고 명성황후상()을 공포하였다. 이에 민 씨 일파는 큰 타격을 받았으나 곧 청(淸) 나라 톈진[]에 주재하고 있던 영선사(使김윤식() 등에게 통지하여 청나라의 원조를 청하였다. 통지를 받은 김윤식 등은 대원군의 존재 위험성과 함께 난다(亂黨)의 소탕, 조선과 일본과의 사이에 청국이 조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청국 정부는 김윤식의 의견에 따라 일본과 대항하기 위해서는 군대를 파견할 필요성을 느끼고 오장경() 등으로 하여금 4,5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곧 출동하게 하였다.

 

명성황후의 국상을 강제 진행함에 따라 대원군의 정치적 실권은 단축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청국은 종주국()으로서 속방()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갖고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에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한 오장경은 서울 요소에 군사를 배치한 후 조선의 내정에 직접·간접으로 간섭을 하며 군영()을 찾아온 대원군을 납치하여 톈진[]으로 호송함으로써 대원군은 정권에서 다시 축출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하나부사 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에 대항하지 못했고 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조선 측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일본 정부는 조선에 대해 군란의 수모자()를 처단하고, 일본인 조해자() 유족에게는 위문금을 지불할 것이며, 일본 정부에 손해배상금 50만 원을 지불할 것과 일본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키는 것 등이다.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임오군란은 조선 정치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혁명적인 사건이다. 이질 문명권들과 평화적으로 만나려는 조선 조정의 노력은 1880년을 전후해 나타난 중국의 새로운 조선 정책으로 좌절된다. 중국은 러시아와 이리() 분쟁을 겪으면서 새로운 변경() 정책을 채택한다. 대원군 압송이나 중국 군대의 조선 주둔은 이런 정책이 한반도에서 실행된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임오군란으로 일본은 한반도 문제에서 일단 후퇴하지만 해군 증강의 길을 걷게 된다. 이와 같이 임오군란은 동북아 3국에게는 충격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임오군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첫 대응은 모순된 것이었다. 조선에 대해 가능한 모든 요구를 하되 그 관철을 위해서는 전쟁은 피하고 평화적인 수단에 의존한다는 정책이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정책은 일본 국내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임오군란의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에서는 호전적인 분위기가 만연되었고 이를 어떻게 무마시키느냐 하는 것이 일본 정부의 고민이었다. 그렇다고 한반도 문제로 중국과 대결할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대원군 정권(1882년 7월 24일~8월 26일)은 안과 밖의 압력으로 어떤 일도 수행할 수 없었다. 안으로는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미미하였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장례라는 국가적인 대사에 시간을 허비해야 하였다. 밖으로는 중국의 신속한 개입으로 그의 정권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그가 일본 공사와 만나 국제 문제를 논하는 당당한 모습에서 범인이 아닌 기개를 본다.

 

임오군란 이후 한반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한 중국을 만난 일본 정부는 조선 정책을 어떻게 수립해야 되느냐 고민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이른바 조선 독립 국론, 또는 조선 중립론이었다. 중국과 대결할 수 없는 정치 현실에서 비밀리에 조선을 원조해 조선을 중국 영향권에서 이탈시킨다는 구상이었다. 이런 정책은 갑신정변 직전까지 일본 정부가 추구해 온 노선이기도 하다.

 

중국의 임오군란에 대한 태도와 정책은 매우 강경하고 신속하였다. 새로운 조선 정책을 처음으로 현실 정치 세계에 적용시키는 데에 중국은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 안에서는 조선 병합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강경한 한반도 정책이 거론되었다. 조선 문제를 담당했던 북양 아문 과 일본 주재 중국 공사관 두 기관은 병합에는 반대했으나 적극적인 진출을 모색한다. 갑신정변에 이르는 국제정치적인 여건이 조성된다. 영국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1860년대 이후로 견지해 온 중국과의 협조 정책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이 한반도에 배타적인 지위를 가지려는 것이 도화선이 되었고 영국도 이에 버금가는 이권을 획득하려고 하였다. 러시아는 경제적인 후진성으로 인해 1880년대 중반까지는 한반도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수 없었고 전통적인 ‘기다리는 정책’을 고수하였다. 그럼에도 일본을 비롯한 열강이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에 신경을 쓴 것은 그들이 전파시킨 ‘러시아 위험’에 의한 자기 최면의 결과다.

 

미국은 조선과 수호 조약을 체결한 이후 한반도 문제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냉각된다. 1905년까지 5인의 대통령과 10인의 국무장관들은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는 모두 문외한들이었다. 조선에서 오는 중요한 외교 문서들이 ‘잘못 분류’되기도 하였다. 조선 조정은 미국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였다. 워싱턴 당국의 정책과 서울에 주재한 미국 외교관들의 개인적인 태도, 두 가지를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대한 짝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 외교사의 흐름에 있어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은 큰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서술은 필자의 저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사대 질서의 변형과 한국 외교사』(2004)를 참조하기 바란다.

 

출처 ^참고문헌

  • 「임오군란의 성격」(신국주, 『효성 조명기 박사 화갑 기념 불교사학 논총(曉星趙明基博士華甲紀念佛敎史學論叢)』, 1965)
  • 「청(淸)의 대조선 적극책의 기연(機緣)-임오 사변 시의 파병 문제를 중심으로-」(김종원, 『이해남 박사 화갑 기념 사학 논총, , 일 조각, 1970)
  • 「임오군 변(壬午軍變) 시 청 측 개입의 배경」(권석봉, 『숙대 사론』 6, 1971)
  • 「임오군 변(壬午軍變)」(권석봉,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75)
  • 「대원군 피수 문제(大院君被囚問題)에 대한 재검토」 상·하(권석봉, 『인문학 연구』 3∼5, 중앙대학교인문학연구소, 1976·1977)

  • 임오군란 [壬午軍亂]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연구원)
  • 임오군란 [壬午軍亂] (한국 근현대사 사전, 2005. 9,, 한국사 사전 편찬회)
  • 임오군란 [壬午軍亂] (두산백과)
  • 임오군란 (세계 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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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DFjE2 WJmws

https://youtu.be/Ctk33 ldX2 Ws

https://youtu.be/sizGebSGywE? t=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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