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 악몽,,! 가장 참혹했던 러시아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 사망자 3500여명,,,!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난 러시아에서 제작된 최초의 블록버스터 영화 <체르노빌 1986>이 오는 30일 개봉한다.
사고 당시의 진짜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데 주력한 작품이라 눈길을 모은다.
개봉을 며칠 앞둔 22일 오후 서울 용산CGV에서 <체르노빌 1986>의 언론시사회가 열렸다.
현재 시의성 있는 '원전 이슈'
작품은 사고 당시의 충격적인 상황과 목숨을 담보로 용기를 내야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35년 전 실제 발생한 재앙을 재현해낸다.
이 영화는 원전사고등급 최고 등급인 7등급의,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그린다.
지난 2019년 미국 HBO에서 방영한 5부작 미니시리즈 <체르노빌>이 큰 화제를 모은 데 이어, 최근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처리 문제가 부각되는 등 영화의 주제인 원전은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주목 받는 이슈이기도 하다.
영화는 휴머니즘의 가치에 주목하며 원전 재난의 비극을 더욱 극대화한다.
원전에 관한 안전 문제와 방사능의 위험성을 알린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소방관 '알렉세이(다닐라 코즐로브스키)'는 실제 체르노빌 3인의 영웅 중 한 사람이다.
극중 알렉세이와 함께 방사능 오염수에 뛰어든 발레리, 보리스는 실존 인물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사고 직후 녹아내리는 노심과 방사성 물질이 원전 지하에 고인 냉각수와 만날 경우, 수천도 이상으로 끓어 오른 물이 한순간에 증발하며 증기 폭발을 일으키는 '2차 대폭발'이 발생할 것이라 예고된다.
이에 3인의 영웅은 전 세계를 파괴할 이 2차 폭발을 막기 위해 최악의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다닐라 코즐로브스키의 열연과 연출
주연 겸 감독을 맡은 그는 직접 소방관, 의사, 엔지니어, 폭발 목격자들을 인터뷰하여 당시의 실제 이야기를 담아냈다.
소방관 알렉세이 역을 맡은 배우 다닐라 코즐로브스키는 이 영화의 감독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영화 촬영 18개월 전 세트를 제작하고, 1980년대 실제 사용된 물건들을 소품으로 구해놓는 등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영화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로 등장하는 건물은 현재도 가동 중인 러시아 쿠르카토프 마을 쿠르스크 원자력 발전소라고 한다.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한 감독과 제작진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극중 알렉세이는 10년 전 헤어졌던 연인인 올가(오크사나 아킨쉬나)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그녀와의 행복한 나날을 꿈꾼다.
그러던 중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발생하고, 2차 폭발이라는 최악의 상황 속 사랑하는 연인과 그녀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게 된다.
감독은 체르노빌 사건의 원인을 기록하기 위함이 아닌, 재난의 결과로 삶이 망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데 중점을 뒀다.
그는 "그 사건이 그들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떤 질문과 선택으로 끌었으며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히로시마 원자 폭탄의 약 400배의 방사능이 유출되고 사망자 약 3500명, 암과 기형 피해자 40만 명을 발생시킨 실제 사고를 다룬 원전 재난 블록버스터지만, 이 영화는 사람 사이의 사랑 특히 가족애, 동료애를 깊이 있게 담아내 진한 감동을 준다.
한 줄 평: 사람들이 만든 재앙... 그날의 참사를 기억하며
평점: ★★★★(4/5)
영화 정보
제목: 체르노빌 1986
국적: 러시아
감독: 다닐라 코즐로브스키
배우: 다닐라 코즐로브스키, 옥사나 애킨시나, 필리프 아브데예프, 니콜라이 코작
러닝타임: 136분
관람등급: 12세이상 관람가
개봉일: 2021. 06. 30
원자력 사고 요약도
사고 레벨, 7등급 - 대형 사고
사고 일자, 1986년4월 26일 01시 24분경(UTC+3) 참사 D+12846일(35년)
사고 지점, 소련우크라이나 SSR키예프 주프리피야트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북위 51° 23′ 23″, 동경 30° 05′ 57″)
피폭자, 22만~83만 명(예상)
사망자, 43~168명
1986년 4월 26일에 소련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현재의 우크라이나) 키예프 주에 있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한 원자력 사고로 사고 레벨 7등급의 원자력 사고이다.
이 사고는 고르바초프가 본격적으로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에 나서도록 결심하게 된 계기였고, 궁극적으론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폭발 사고의 발생,
대폭발,
1986년 4월 26일 1시 22분 30초, SKALA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 반응로에서의 제어봉 위치. 숫자는 반응로 안으로 삽입된 깊이를 나타낸 것이며, cm 단위다.
- 녹색: 제어봉 (167개)
- 파란색: 기동용 중성자원 (12개)
- 노란색: 원자로 하단에서 삽입된 짧아진 제어봉 (32개)
- 회색: 핵연료 및 압력관 (1,661개)
- 붉은색: 자동 제어봉 (12개)
1986년 4월 26일 1시 24분경에 일어났다.
이날 체르노빌 발전소에서는 부소장 겸 수석 엔지니어 아나톨리 댜틀로프의 지휘하에 특별한 실험이 기획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은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될 경우, 관성으로 도는 터빈이 만들어내는 전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실험조건
- 정격출력 22~33%인 700~1,000MW
- 당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출력은 100%였다.
- 100%의 출력을 22~33%까지 낮추기 위해 제어봉을 삽입.
이런 실험이 실시된 이유는, 원전의 안전장치구조가 완비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대로라면 설계와 시운전 당시에 완료했어야 하지만, 공산권 특유의 "승리적인 조기달성"을 위해 이를 누락하고 이미 발전소 완공을 선언하여 관련자(아나톨리 댜틀로프 포함)들은 이 공로로 훈장까지 받은 상태였다.
그러니 관련자들은 체르노빌 발전소가 이미 상업운전에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서라도 안전성 테스트를 서둘러 완료할 필요가 있었다.
실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모종의 이유로 원자로 냉각장치의 전원공급이 중단될 경우, 비상용 디젤 발전기를 돌려 냉각수를 순환시키게 된다. 그런데 대형 디젤엔진 특성상 충분한 출력에 도달하는 데 1분이나 걸렸다.
서방 측 원전도 이런 종류의 문제가 많았다.
디젤 발전이 최고출력까지 이르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위험은 존재한다.
따라서 원자로가 정지했을 때 과연 냉각 펌프를 작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제때 공급할 수 있는지 불확실했고 그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 실험이 기획됐다.
그리고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전부 실패했고, 댜틀로프에게 바톤이 돌아갔다.
아나톨리 댜틀로프 주재의 실험은 25일 낮 시간대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원자로의 정지를 막기 위해 안전장치를 정지시키고 저출력 상태로 변경했다.
이 때 키예프의 전력 담당자가 낮시간대 전력공급유지를 요구했기에 일시적으로 실험이 지연되어 26일 1시부터 14시까지로 변경되었는데, 그 때까지 계속 저출력 상태로 장시간 안전장치가 꺼진 상태에서 운전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가 안전장치도 없는 구식 소련 원자력발전소가 원인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체르노빌 원자로에도 안전장치는 다 붙어 있었다.
당시 체르노빌 원자로에는 ECCS가 장치되어 있었는데, 실험 내에 이것을 꺼버리는 절차가 들어가 있었고, 실험을 지도하던 댜틀로프는 이 절차를 따라 ECCS를 모조리 해제하고 실험에 임했다.
어쨌든 다시 실험을 실시했을 때, 안전장치는 꺼진 상태였다.
본디 실험 조건은 3,200 MW(열출력기준) 출력으로 운행 중이던 원자로의 발전출력을 22%, 700 MW까지 낮추는 것이었지만, 조작관의 실수로 인해 700 MW로 낮추는 과정에서 출력이 30 MW까지 낮아지면서 원래 예정보다 원자로의 출력이 크게 떨어졌다.
이렇게 출력이 갑자기 떨어지자 원자로 내부의 균형이 깨지고, 중성자를 흡수해버리는 제논-135가 쌓이게 되었다.
제논-135는 원자로 운전 중 우라늄-235의 핵분열로 발생하는 아이오딘-135가 붕괴하면서 생산되는데, 중성자를 흡수해서 제논-136이 되든지, 아니면 붕괴해서 세슘-135가 된다.
원자로를 고출력으로 운전하면 아이오딘이 많이 생성되고, 시간이 지나면 제논으로 변해서 중성자를 흡수해버리지만, 고출력 운전이므로 제논이 그만큼 중성자를 빨리 흡수하는 까닭에 큰 문제가 안된다.
30 MW까지 출력이 떨어져도 아이오딘과 제논의 생산 또한 30 MW로 운전하는 만큼만 나오므로 균형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30 MW로 떨어지기 이전, 그러니까 1,600 MW으로 출력하면서 축적되었던 아이오딘이 문제다.
이 아이오딘은 계속 제논으로 붕괴하는데, 제논이 중성자를 흡수하는 속도는 30 MW 출력 수준으로 느려졌으므로 축적된다.
한편 1,600 MW로 저출력 운전하는 도중 제논-135이 쌓이면서 출력이 통제를 벗어났다는 가설도 있다.
노심 중단에 축적된 제논-135들이 중성자를 모두 먹어치우면서 핵반응을 일으킬 중성자가 모자라게 되었고, 그래서 출력도 잘 올라가지 않았다.
실험자들은 제어봉을 빼내서 출력을 올리기 시작했으나, 제논이 쌓인 노심 중단보다 노심 상단과 하단 쪽으로 중성자가 쏠리면서 원자로 반응 분포가 불균형해졌다.
그러나 어떻게든 실험자들은 200 MW 정도까지 출력을 끌어 올렸고, 이제 댜틀로프는 본디 목표였던 700 MW보다는 낮은 출력이지만 200 MW에서라도 안정을 시킨 후 실험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실험자들은 평소라면 쓰지 않을 급수 펌프까지 가동시켜 노심 압력을 올리고 수동 제어봉을 6개만 남기고 전부 뽑은 상태였다.
규정상 최소 수동 제어봉은 15개였고 15개 내지는 16개에서 RBMK 원자로를 가동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댜틀로프는 실험 매뉴얼을 따라가고 있었던 까닭에 지금 원자로가 어떤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원자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고 있었기에 실험을 중단하고 원자로 강제중지에 들어가더라도 사고를 막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1시 23분 04초에 실험이 실시되었는데, 그 사이 원자로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현재까지 가설만이 있을 뿐이다.
유력한 가설 중 하나는 기포에 의한 정반응도계수를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하는데, 전기 공급이 줄어들자 자연스럽게 냉각 펌프에 공급되는 전기의 양도 줄어들었고, 이로 인해 냉각수의 유입이 감소하자 원자로 내부가 과열되면서 내부 증기압은 상승했으며, 설계 결함으로 인해 원자로의 출력이 상승하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는 흑연 감속로를 탑재한 구식 발전소인데, 안전한 제어가 힘든 면이 있다.
일반 경수로의 경우 물이 줄어들면 중성자가 덜 다녀 자연적으로 출력이 줄어드는 데 비해, 이것은 거꾸로 물이 적어지게 되면 출력이 증가해 버린다.
즉, 냉각재 상실 사고가 터져버리면 원자로가 비정상적으로 과다해진 출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폭발해 버린다.
또 다른 문제는, 양의 기포 계수를 가진다는 점이다.
냉각재 사고가 아니더라도 과열된 원자로는 물을 마구 끓게 만들어 수증기로 만드는데, 이것은 물 분자의 밀도를 감소시킨다(수증기의 밀도는 1기압 시 물의 1/1600). 물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핵 반응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데, 밀도가 낮아지니 핵 반응이 활성화된다.
반응이 활성화되니 온도는 더 올라가고, 물은 더 증발하고, 다시 반응이 활성화되는 악순환에 빠져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물이 끓어오르도록 가만히 내버려두면 출력이 스스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참고로 상업용 원자로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가압경수로의 경우, 이와는 반대로 반응도 출력계수가 음의 값을 갖는다. 원자로 출력이 올라가면 반응도가 낮아지면서 출력도 자연스럽게 낮아진다는 얘기. 이것을 '원자로의 고유 안정성'이라 한다.
그러나 실험이 시작된 23분 04초부터 23분 30초까지 원자로의 출력이 계속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점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정반응도계수 상승이 원자로를 불안정하게 만든 원인 중 하나로는 꼽히고 있으나 원자로의 폭주를 직접 격발한 것은 후술하는 제어봉 삽입으로 보인다.
23분 40초, 실험진들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안전장치를 가동하고 원자로의 모든 제어봉을 삽입했다.
이 제어봉은 아랫쪽에 흑연 감속재가 있고 윗쪽에 붕소 흡수재가 있어서, 제어봉이 빠진 상태에서는 흑연 감속재가 자리를 차지하고 핵 반응을 활성화시키지만 제어봉이 삽입되면 흑연은 아래로 밀려가고 그 자리에 붕소가 들어간다.
그런데 체르노빌 사고에서 문제가 된 것은 제어봉 막대가 삽입되고 노심 중단에 삽입되어 있던 흑연이 하단으로 내려가면서 흡수재 역할을 하던 물을 밀어내버렸다는 점이다.
원자로의 과부하로 인해 발생한 1차 폭발은 1,000톤 무게의 반응로의 뚜껑을 파괴했고 2~3초 뒤에 발생한 2차 폭발은 4호 원자로 건물의 상단부를 붕괴시켜 건물의 잔해와 원자로 내부에 있던 흑연 감속재의 파편을 3호기와 기계동을 비롯한 발전소 여러 구획에 흩뿌렸다.
폭발로 생긴 방사성 물질로 가득한 불꽃과 불씨들이 1 km 상공까지 치솟았다.
생존한 원전 직원의 목격담에 의하면, 폭발이 마치 화산 폭발과 같았으며 폭발 직후 거대한 푸른 빛줄기가 마치 레이저처럼 하늘로 솟구쳤다고 한다.
심지어 아름다운 광경이라 이를 구경하려고 원자로 근처로 온 주민들도 있었다.
이후 감속재인 흑연이 타면서 화재가 일어남과 동시에 최소 500경 베크렐, 최대 1,200경 베크렐가량의 흉악한 양의 방사능 물질이 사방으로 누출되었다. 노심용융이 일어났다고도 하지만, 실제로 노심용융이 발생한 스리마일 섬 사고와 비교하면 너무나 빠른 속도로 출력이 폭주했기 때문에 노심용융보다는 폭발에 의한 영향이 더 크다. 실험 시작 시간에서 폭발까지 거의 1분도 안 걸렸다.
이때 누출된 방사능 물질의 총량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 리틀 보이의 400배. 방사성 물질을 대량으로 생성하는 코발트 폭탄과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실제 핵무기보다 이런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방사선은 몰라도 방사성 물질은 더 많이 뿜어낸다.
실제 핵무기가 떨어지면 처음 나오는 낙진만 물로 깨끗이 제거하면 방사능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체르노빌처럼 감속재가 아예 불타오르며 지속적으로 방사성 물질을 뿜어내면 피해가 커진다.
이미 서술했듯 당시 노심 중단의 제논 축적으로 인해 중성자 반응 분포는 물로 가득찬 하단과 상단으로 쏠린 상태였다. 물은 중성자를 잘 흡수하기 때문에 그동안 끓어오르면서도 핵 연쇄반응을 잘 억제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안전장치의 가동으로 제어봉이 내려오면서 이렇게 흡수재 역할을 하던 물이 밀려가고 감속재인 흑연이 들어가자 노심 하단의 중성자 연쇄반응이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원자로를 꺼버려야 할 안전장치가 일시적으로 오히려 중성자 반응을 늘리고 출력을 올려버리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RBMK는 증기 발생이 곧 핵반응으로 이어지는 양의 기포 계수를 가진 원자로이다.
그러나 연료온도계수 등이 이를 상쇄시키고 또 평상시에는 제어봉을 조작하기 때문에 전체 계수는 음으로 떨어진다.
따라서 안전장치의 가동에서 발생하는 일시적인 출력 상승도 마찬가지로 평상시라면 상쇄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실험진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4호기의 정반응도계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작은 충격으로 거대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으나 이를 상쇄시킬 요인은 없었고, 가뜩이나 제논 축적으로 인해 중성자 반응이 상단부와 하단부로 불균형적으로 뭉쳐있어 약간의 변화에도 민감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안전장치의 가동으로 발생한 찰나의 핵반응 증가는 하단부에 쌓여 있던 중성자의 연쇄반응을 폭발적으로 이끌어내면서 폭주로 이어졌다.
만약 안전장치가 발동하기 이전에 제어봉이 적절한 위치에 10여개만 더 미리 들어가 있었더라면 순간적인 반응 폭주를 제어할 여력이 있었겠지만, 제어봉이 6개밖에 삽입되지 않은 상태였므로 억제되지 못하고 안전장치 발동 3초만에 출력이 200 MW에서 530 MW로 증가해버렸다.
그렇다면 밀려난 감속재 자리에 흡수재가 빨리 삽입되어 제 역할을 할 수 있었어야 할 텐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비등 경수로 방식인데 비등 경수로는 가압 경수로 방식에 비해서 제어봉 삽입 시간이 20초 정도로 상당히 길다.
기타 원자로의 경우 비상시 이에 대응하는 시간은 2초 이내라고 한다. 한편 안전장치가 발동된 후 원자로가 폭발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8초 내외이며, 당시 마지막으로 기록된 원자로의 출력은 정상 출력의 10배를 초과한 약 33,000 MW였다.
폭발 과정에는 대체적으로 2가지 모델이 있는데, 하나는 증기폭발이 일어났다는 설이다.
내부의 열이 과도하게 상승하면서 핵연료봉이 파손되고, 달아오른 핵연료와 물이 서로 접촉하면서 한꺼번에 끓어올라 일으킨 증기압이 1차 폭발을 일으켰고, 1차 폭발로 압력용기 상단의 제어부가 터지면서 열리자 나머지 열이 수증기를 흑연과 반응시켜 수소와 일산화탄소로 만들어 또 한 번의 2차 대폭발을 일으켰다는 것이 증기폭발설이다.
다른 하나는 핵폭발을 가정하는데, 1차 폭발 이후 원자로 내의 물은 모두 증기로 증발해버렸고, 자극받은 RBMK 원자로는 계속 연쇄반응을 기하급수적으로 가속시킨 끝에 종국에는 핵폭발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다만 원자력발전소에서 이용하는 핵연료는 저농축 우라늄이기 때문에 급격한 핵폭발이 일어나기보다는 핵연료가 녹아내린다.
따라서 첫번째 설이 더 유력하다.
재앙의 시작, 그리고 진화,
폭발 후 최초의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전력 케이블 대다수가 날아가 시설 곳곳이 마비되는 통제불능의 아비규환이 된 와중에도, 아나톨리 댜틀로프와 선임 연구원 알렉산드르 아키모프는 발 빠르게 대처에 나섰다.
문제는 이들이 이 폭발을 "수소 폭발로 인한 것이지 원자로 자체는 아직 멀쩡하다"고 판단하고 발전소 소장과 부소장에게도 그렇게 보고했다는 것.
이로 인해 "원자로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한시바삐 화재를 진압하고 수동으로 노심에 제어봉을 삽입하고 냉각수를 공급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대처가 정해졌는데, 이미 4호 원자로 자체가 폭발해 붕괴되고 노심의 잔해가 주변을 나뒹굴어 사방으로 치명적인 방사선이 유출되고 있을 때, 존재하지도 않는 원자로에 대한 급수 투입을 위해 인력을 투입시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들을 죽으라고 내보내는 짓이었다.
이 치명적인 오판으로, 아직 멀쩡했던 직원들 다수가 당하지 않아도 됐을 피폭을 당해 개죽음당하고 말았다.
후술하는 소방관들의 피폭도 이 오판으로 인한 결과였다.
그나마 댜틀로프가 3호기 원자로 제어실로 뛰어들어가 정지를 요청한 것이 적절한 판단.
이러한 지휘자들의 판단 미스를 비롯한 미흡한 초동 조치는 그 때까지 이런 재난에 대비한 메뉴얼 자체가 전무하다는 것도 크게 한 몫했는데, 여태껏 체르노빌 원전의 운영 인력들 또한 RBMK가 터질 거라는 상황 자체를 전혀 상정하지 못한 채 그저 AZ-5 버튼만 누르면 비상 정지가 가능할 거란 정도의 대비밖에 없었고 원자력 사고 7레벨 자체가 그 때까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알려진 원자력 사고라 해봐야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같은 레벨 5 정도였고, 레벨 6의 키시팀 사고가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소련 특유의 기밀주의로 냉전 종식 후에야 알려졌을 정도다.
물론 스리마일-키시팀의 두 원자력 사고는 체르노빌과 상황도 스케일도 격이 달라 알려져봤자 딱히 참고는 안 됐겠지만, 그런 마당에 난데없이 전대미문의 레벨 7의 사고가 터져버렸으니 상황의 인지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방사능 누출을 측정할 때 3.6 뢴트겐이 한계인 소형 계측기로 측정해서 3.6 뢴트겐이 나오자 그대로 믿었다가 더 고성능의 계측기로 측정하니 수치가 15000 뢴트겐 이상의 끔찍한 수준으로 드러나자 경악했다는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진 사실.
폭발 직후 인근 소방소로 걸려온 전화 기록. 하단의 2019년 HBO 제작 드라마 체르노빌에도 일부 기술되어 있다.
신고를 받고 1차로 14명의 소방대원이 파견되었고, 그 다음으로 급히 달려온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 소방 준장이 지휘하는 체르노빌 소방대가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전력을 다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그들은 방사능 방호복도 없이 사투를 펼쳤지만, 그들의 힘만으로 막기에는 재난의 규모가 너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중에 도착한 키예프 소방여단과 교대할 때까지 진화 작업에 전력을 다했고, 그 결과 오전 5시에 대부분의 화재가 진압되었다.
이들 소방관은 화재진압 이후에도 남아 현장 정리작업까지 했으며, 많은 수가 엄청난 방사선에 노출되어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2019년 HBO 제작 드라마 체르노빌의 소방관들의 화재 진압 장면. 살인적인 방사선 유출 지대에 아무 것도 모른 채 무방비로 투입되어, 바로 입안에 금속맛을 느끼는 가운데 흑연과 접촉해 심각한 화상을 입거나, 투입 초기 발빠른 움직임을 보여주다가 점차 움직임이 느릿느릿해지며 얼굴이 붉게 변하면서 하나 둘 쓰러져가는 등, 피폭 증상을 뚜렷이 드러내는 와중에도 지붕까지 화재 진압에 나서는 모습이 잘 묘사되었다.
텔랴트니코프의 소방대는 역부족이었으나 화재 진압과 3호기의 보호에 최선을 다했으며,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3호기는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만약 이것까지 터졌다면 재앙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지도 모르며, 이 공적을 인정받아 텔랴트니코프는 그의 부하인 블라디미르 프라비크, 빅토르 키베노크와 더불어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사고 직후 방사선에 피폭됐던 직원들과 1차로 파견된 소방대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쓰러져갔고, 결국 화재가 진압됐을 무렵 실험을 진행했던 새벽조 직원들 중 제 발로 서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화재 진압에서 사용된 대량의 물이 4호기와 접촉하면서 증기로 변했는데, 이 증기가 내부 물질과 반응하여 가연성 물질을 만들어냈고 26일 21시 41분에 다시금 대폭발을 일으켜 높이 50m의 불기둥이 치솟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의 "원자로는 아직 무사하다"는 판단을 완전히 벗어나는 사태의 심각성이 계속 드러났고, 결국 체르노빌 사태 진압의 지휘권은 소련 본국으로 넘어갔다.
내부에서 열을 방출하는 것이 일반적인 불길이 아니라 분열을 계속하고 있는 핵연료라는 걸 깨달은 소련 당국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대량의 붕소, 돌로마이트, 납, 진흙, 모래 등을 뿌리면서 화재를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원자로 상공의 방사선이 너무 강해서 원자로 위에 헬리콥터를 멈추게 할 수가 없었고, 원자로 상공을 지나가면서 흙을 뿌리도록 해야 했다.
이 와중에 Mi-8 한 기가 노심 상공으로 날아가다 엄청난 양의 방사능을 그대로 직격당함과 동시에 크레인 케이블에 로터가 걸려 날개가 분리되며 추락했으며, 탑승 인원이 전원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지역 방송사에서 생방송으로 취재를 하고 있었는데, 이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 전국으로 송출되고 말았다.
이 위험천만하고 희생자들까지 나왔던 방법은 다른 추가대안이 나오기 전인 5월 7일까지 계속되었으나, 흙이 4호기 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뿌려지면서 열이 식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바람에 실패했고, 헬리콥터도 추가 폭발 위험 때문에 물러나야만 했다.
그런데 4호기와 매우 가까이 붙어있던 3호기의 상태가 무사하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3호기에 있던 액체 질소를 4호기에 주입하면서 최종적으로 5월 9일, 원자로 화재 진압에 성공했다.
만약에 3호기마저 폭발했다면 더욱 참담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사고 직후 구 소련 정부는 필사적으로 이를 숨기려고 했으나 사고로 인해 발생된 낙진이 스웨덴까지 날아가, 스웨덴의 언론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소련 근방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 낙진이 감지됐다."고 밝히자 어쩔 수 없이 소련 당국은 직접 해명할 수밖에 없었다.
대피, 그리고 작업 준비,
당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위치한 도시인 프리피야트에는 발전소 직원과 연구원, 그들의 가족 등을 포함 5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고, 특히 100 km 내에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예프가 있었기에 사태는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련 정부에서는 사고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고, 덕분에 인근 주민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피폭당했다.
그리고 사고 발생 당일 그 방사성 물질이 스웨덴까지 날아갔으나 이 항의를 계속 묵살하는 바람에, 이 소문이 전 유럽에 모조리 퍼지고 나서야 사고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낙진은 전 유럽을 싸그리 다 덮었고, 심지어는 저기 멀리 떨어진 일본 및 홍콩에도 이 사고의 낙진이 떨어졌다.
결국 북미/남미/아프리카 같은 지구 정반대편의 남반구를 빼고는 모조리 낙진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사고 첫날의 방사선 누출량은 그렇게 크지 않은줄 알았는데 이는 사고 초기에 사용된 소형 측정기의 계측값 때문. 측정 가능한 최대값이 굉장히 낮았고, 현장에서 측정된 최대값(약 3.6 뢴트겐)을 기반으로 보고 되었다.
프리피야트에 파견되어 방사선량을 측정하던 군인들의 책임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급상승하는 방사선량에 경악했고, 높으신 분들 역시 이 보고를 받고 경악했다.
이후 레가소프의 지적대로 대형 측정기를 가져와 측정한 결과 막대한 수치가 나온 것(약 15,000 뢴트겐). 그리고 26일 밤에 원자로에서 다시금 대폭발이 일어나면서 가뜩이나 많이 누출된 상태였던 방사성 물질의 누출량이 더욱더 크게 늘었고, 이에 따라 소련 당국도 주민들을 피난시키기로 결정했다.
사태가 워낙 심각했던 까닭에 군부대와 경찰, 소방관 등 수십만의 인력이 인근으로 투입되어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처음에는 프리피야트와 체르노빌, 그 인근 지역 주민들만 피난시켰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위험지역은 점차 확대되었기에 4월 30일부터 추가적인 소개 작업이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는 발전소 주변 30 km 이내의 주민 전부가 철수했으며, 방사성 물질이 대량으로 뿌려진 지역으로부터의 탈출이 종료된 것은 8월이었다.
당시 아주 번창하던 도시인 프리피야트[43]는 이 사고로 인해 인구 5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도시를 하루 아침에 전부 떠나야 했다.
현재 가장 유명한 유령 도시로 알려져 있는 지금은 온갖 잡초가 자라고, 야생 동물들이 돌아다니고 있다.
소련 당국은 제염 작업을 위해 전국의 방사선 방호복을 긁어모았지만, 방사선 방호복은 비싼 데다 만들기도 어려워 인력에 비해 턱 없이 부족해 일부 복구 인력만 입을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던 소련 당국은 어쩔 수 없이 화생방 보호의나 우의에 납을 기워만든 임시 방호복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추가로 소련 당국은 아이오딘 131에 대한 방호를 위해 인부들에게 아이오딘이 첨가된 보드카를 다량 지급했다.
이러한 조치는 갑상선 부위에 아이오딘을 과포화시켜 갑상선이 방사성 아이오딘에 오염되는 것을 막아 주기에 분명히 효과가 있었지만, 아이오딘 외의 다른 방사성 물질은 막을 수가 없었다.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수습을 위해 골머리를 짜내다가 토의 끝에 이들이 도달한 결론은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지역은 모조리 부숴서 평평하게 한 다음 콘크리트로 2m 이상 덮어버리고, 오염된 원자로는 초대형 커버를 씌워버린 뒤에 10년쯤 지나면 해결 방법이 나오겠지?"였다.
즉, 지금 기술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일단 뚜껑을 덮어서 봉인해 놓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겨우 5년 8개월만에 소련이 해체되어 버리면서 다른 나라로 쪼개져버렸고 이 계획은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파기되었다.
뭐 그래봤자 소련이 여전히 건재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사고 발생 후 3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폐연료를 처리할 기술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소련이 안깨졌다는 가정하에 뒤져라 연구했다면 모르지만
체르노빌 전투(Battle of Chernobyl)
독재 체제에서만 가능한 무제한적인 인력 동원과 인권을 무시한 조치들이, 이런 비상 상황에는 효력을 발휘했다.
소련 휘하의 모든 공화국에서 인구 비례로 인원을 할당하여 소련 전체에서 총 60만 명의 인력(주로 예비군)을 징발했다.
소련 정부는 엄청난 인원을 조금씩 피폭시키는 방식으로 체르노빌 노동인력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려고 한 것이다.
체르노빌 청산 작업 전체를 연구한 전문가의 의견에 의하면 "현명한 조치였으며 약간의 백혈병 위험은 있지만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은 수준"이라고 한다.
총 지휘는 니콜라이 타라카노프(Nikolai Tarakanov) 장군이 맡았다.
체르노빌 다이버
현장에 도착한 기술진이 제일 먼저 맞닥뜨린 문제는 사고 첫날 화재 진압을 위해 뿌린 물이었다.
기술진 일부에서 사고 직후 녹아내리는 노심과 방사성 물질이 원전 지하에 고인 냉각수 및 소화수와 만날 경우, 수천도의 고열에 물이 한순간에 증발하며 증기폭발을 일으킬 것이라는 예측이 제기된 것이다.
이 예측이 현실화 될 경우, 주변 원자로 3기까지 훼손시킬 것이고, 결국 광범위한 오염이 일어나 수습이고 뭐고 없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것이었다.
현장을 지휘하던 쿠르차토프 연구소 부소장 발레리 레가소프는 예브게니 벨리호프를 해당 주장의 근원지로 지목하며 "영화를 너무 많이 본 사람"이라고 무시했다.
그러나 벨리호프는 국방부 등 정치적 연배가 있는 인물로 고르바초프와 직통으로 전화할 수 있는 거물이었고, 당국 입장에서도 이미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된 사태를 당장 눈 앞에 두고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둘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고 5일째 되는 날, 발레리 레가소프의 명령에 의해 펌프 기사 알렉세이 아나넨코(Олексій М. Ананенко, 1959년생. 당시 27세), 발레리 베스파로프(Валерій О. Беспалов, 1957년생. 당시 29세), 보리스 바라노프(Борис О. Баранов, 1940년생~2005년 사망. 당시 46세), 이 3명이 지하수로 흘러들어가는 방사능을 막기 위해 램프를 들고 직접 지하의 방사능에 오염된 물(냉각수) 속으로 들어가, 펌프를 가동시켜 지하수를 보호했다.
문제의 노심 바로 밑이기도 해서 얼마나 많은 방사선이 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 오염수가 얼마나 들어찼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대단히 위험한 임무였다.
최악의 경우 희생자들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될 지도 모르는 임무였지만, 세 사람은 이 일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확인하고 망설임 없이 하겠노라고 했다.
이들은 후일 언론에 의해 체르노빌 다이버로 불렸다.
흔히 이들이 스페츠나츠 출신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사능 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글이 떠돌아다니지만, 3명 모두 순수한 엔지니어였으며 가장 연장자였던 바라노프가 2005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뿐 나머지 2명인 아나넨코, 베스파로프는 현재까지 생존해있다.
체르노빌 다이버라는 별칭은 당시 동구권 언론에 의해 '지하에 가득찬 방사능 오염수 속으로 목숨걸고 들어갔다' 정도로만 알려지는 바람에 불려진 별명이었고, 최근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2006년에 방영된 BBC 다큐에서 선보인 재연조차 두꺼운 잠수복을 입고 어둡고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일 정도. 제대로 된 이야기가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것은 2010년대 중반에 와서였다.
당사자들은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이러한 별명으로 불린 것을 탐탁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무에 참여했던 아나넨코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3명은 3m 깊이의 발전소 지하에 들어가서 4GТ21(4ГТ-21)과 4GТ22(4ГТ-22)라는 이름의 밸브 2개를 열어야 했고, 그것을 위해서 방사성 물이 들어찬 001번 복도를 지나가야 했다.
그들은 가슴과 발목 언저리에 X선 측정기를 착용하고, 밸브의 플라이휠이 폭발로 날아갔을 것을 대비해 가스 압력식 열쇠도 준비하여 지하로 내려갔다.
바닥에 깔린 큰 직경의 파이프를 따라가서 밸브를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폭발로 밸브 간판이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예상했지만, 다행히 밸브에 간판이 남아 있어서 찾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하고 들어갔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방사선량도 생각보다 낮았고, 물도 무릎 정도까지밖에 올라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물론 매우 위험한 일이었던 것은 맞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대중적으로 연상되는 고방사선 구간이 없진 않았는데, 그 구간에 진입하던 중 앞서가던 바라노프가 전방에 들이밀던 측정기에서 범위를 넘어서는 값이 나타나자 일행 모두 그 지역을 전력질주해서 통과하였다고 한다.
도중에 호기심을 못 이기고 뒤를 돌아보니 위쪽에 있을 중앙 홀로 연결된 구멍을 통해 지하바닥으로 흘러내린 검은색의 거대한 원뿔 형태를 이루고 있던 무언가가 보였고, 그와 동시에 당시 대량의 방사선 피폭자들이 증언하던 금속 맛이 입 안에서 느껴졌다고 했다.
이것은 후술할 코끼리 발 이라 불리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원자로의 잔해와 콘크리트 잔해가 섞여서 마그마처럼 흘러내린 혼합물이었다.
이들 3명의 헌신적인 사고 수습 활약에 대해, 우크라이나 정부는 2018년 4월 25일에 3급 용맹훈장을 수여하었다.
이어 드라마 체르노빌을 통해 이들의 활약이 재조명되자, 우크라이나 정부는 상훈의 격을 높여 2019년 6월 27일에 우크라이나 국가영웅 칭호와 함께 우크라이나 최고의 훈장인 금성훈장을 수여하였다.
이들 이외에도 수많은 소련의 군인들과 스페츠나츠들 역시 죽음을 마다 않고 체르노빌에서의 오염을 막으려다가 희생됐다.
이들은 소련을 살렸다.
후에 소련이 붕괴되고 여러 나라로 분단되긴 했지만 이 후폭풍이 유럽에서 지금도 심각한 문제인 걸 보면, 이들은 소련뿐 아니라 유럽 전역을 살린 셈이다.
바이오 로봇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로봇이 투입되었다.
미국제 로봇은 7분 정도 작동하다가 원자로에서 방출되는 강한 방사선에 의해 회로가 타서 멈추었다.
일본제 로봇은 9분 동안 작동하다가 멈추었다.
그런데 소련제 로봇은 1시간째 작동 중이다.
사고 현장에 취재를 위해 온 기자들이 소련제 로봇의 성능에 감탄하고 있을 때, 확성기가 울려퍼졌다.
"이바노프 이병! 이제 쉬는 시간이니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오시오."
- 당시 상황을 빗댄 공산주의 유머 -
소련군이 폭심지 주변을 헬기로 찍은 화면에서는 아직도 방사성 물질이 고농도로 나오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에 대해 엔지니어들은 서로 논의하여 거대한 석관을 씌워 원자로의 지붕을 덮어버리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 작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일단 발전소 지붕을 조금이나마 깨끗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지붕은 폭발 당시 흩어져 날아가거나 쌓인 흑연 감속재 조각으로 뒤덮여 있었고, 방사능에 심하게 오염되어 있었다.
인간은 투입되는 즉시 즉사하는 수준이었기에 무인 달 탐사 차량인 루노호트를 만들었던 기술자들을 불러와 로봇을 제작해서 투입하였다.
거창한 물건은 아니고 원격 조종 불도저 같은 간단한 것으로, 조각을 지붕 아래로 밀어서 떨어뜨렸다.
달은 우주 방사선이 강력하게 내리쬐는 환경이므로 달 탐사 로봇이라면 원자로의 방사능도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이 로봇들로 방사능에 심하게 오염된 파편들을 지붕 아래로 떨어트려 지붕의 방사능을 사람이 억지로 투입될 수 있을만한 수준으로 낮출 수는 있었으나, 이들은 배터리 작동시간에 크게 문제가 있어 이들만으로 방사능에 오염된 파편들을 모두 처리할 수는 없었다.
작업을 마냥 미룰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자원자와 발전소 인부들을 포함한 약 3,500 명 정도의 인력을 투입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로봇을 대신해 폭심지에 투입된 이들은 바이오 로봇으로 불렸다.
그러나 문제는 방사선 보호의가 몇 벌 없었다는 것. 애초부터 그 많은 인원에게 방사선 보호의를 전부 줄 수는 없었고, 가격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즉시 우의에 납 판때기를 끼워서 만든 조잡한 화생방보호의가 만들어졌으나 이것마저도 몇 벌 없었던 까닭에 작업 인원들이 돌아가면서 입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성능의 방사능 보호의가 있어도 해당 보호의를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일정 시간 동안 방사능에 노출되었을 때는 다른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이 너무나도 크다 보니 현실은 달랐다.
당시 지붕 상황 촬영 영상 풀버전 > https://youtu.be/Gpf3zGtvH3A
게다가 지붕의 방사선 수치가 너무 천문학적으로 엄청나다 보니 올라가 잠깐 작업한 뒤 되돌아와 쉬어야 했는데, 보통 작업 시간이 2분을 넘어가면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으며 방사선 수치가 강할 경우 작업 시간은 불과 40초로 제한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8명이 뛰어들어가 방사능에 오염된 파편을 삽으로 퍼내서 지붕 아래로 떨어뜨리는 작업을 2번 하고 다시 뛰어나와 재빨리 옷을 벗으면, 그걸로 다음 조가 갈아입고 또 다시 뛰어들어가는 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당시 이 위대한 자기 희생의 모습을 찍으려고 같이 현장으로 들어간 이고르 코스틴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방사선 때문에 카메라 필름이 타 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3,500명이 열흘을 밤을 새며 작업한 뒤에야 겨우 33% 정도의 방사능이 줄어들었고, 석관 작업이 진행되었다.
소련 정부에 의하면 지붕 작업자들의 피폭은 수백 밀리시버트 정도로 통제되었다고는 하는데 당사자들은 "그것은 축소된 수치이며, 실제로는 몇 배나 많이 피폭되었다"고 주장한다.
"지붕에서 복귀한 후 코피를 쏟으면 병원으로 실려갔고, 몸을 가누지 못하면 집으로 보내졌다."는 증언 등을 볼 때, 많은 이들이 급성 피폭의 증상을 보였을 정도로 전반적인 피폭량은 매우 높았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40초 이내에 모든 작업을 끝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흑연 조각을 포함하여 현장의 파편 중 약 10%는 로봇이, 나머지 90%는 이 '바이오 로봇'이 치웠다.
이들은 평균 250 밀리시버트를 피폭당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방사선과 싸운 대가로 증명서 하나와 100루블을 받았다.
당시 소련 노동자들의 평균 1달 봉급이 200루블 수준이었는데, 목숨을 담보로 한 작업에 대한 대가치고는 매우 초라한 금액이었다.
여담으로 이때 작업에 참여했던 인부들의 증언에서 "그쪽에서 일하자마자 입안에서 시큼하고 아주 신 금속, 즉 납맛이 났다"고 하는데, 저때 이후로 35년이 지난 현재도 그 납맛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것은 방사능의 맛 또는 방호복 때문이 아니라 방사능 피폭 증상 중 하나이다.
입에서 금속 맛이 날 정도면 피폭이 꽤 진행된 상태로 볼 수 있다.
HBO의 드라마 체르노빌에서 묘사된 바이오 로봇들의 작업 과정 영상 > https://youtu.be/uXafEIdkx6c
근거리 실제 기록 영상 > https://youtu.be/q-rGSkhJ_54
마그마 문제
위쪽을 덮는 것뿐만 아니라 아래쪽을 차단하는 것도 문제였다.
용융된 핵연료 마그마들이 점점 바닥을 뚫고 내려가고 있었다.
계속해서 아래쪽으로 핵연료가 누출될 경우 대수층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러면 서부 러시아의 전체 식수원인 드네프르 강이 오염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
엔지니어들은 방사선이 그나마 약한 지하 쪽으로 땅굴을 파들어간 다음, 발전소 아래에 액체 질소를 사용한 냉각기를 설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에 소련 전역에서 광부들이 소집되었다.
섭씨 50도를 넘나드는 열기 안에서 광부들은 1달 만에 작업을 완료했는데, 통상의 3분의 1로 단축된 것이었다.
이때 지반이 매우 좁고 더워서 방호복을 입을 수 없었고, 토양은 방사능에 오염된 상태였기 때문에, 광부들도 다량의 방사능에 피폭되었다.
이로 인해 100여명의 광부가 40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막상 지하에서는 방사능 수치가 그렇게는 높지 않았지만 터널 입구가 발전소 근처에 있었다.
이렇게 많은 희생을 한 끝에 발전소 아래에 공간을 마련했더니, 정작 냉각기 완성에 기술적인 문제가 생겼다.
결국 액체 질소 냉각기는 무산되었고 그 자리를 콘크리트로 채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광부들의 이 작업은 결과적으로 불필요했다고 한다.
당시 지휘부는 녹아내린 노심이 땅을 뚫고 내려가 지하수까지 도달하면 흑해에서 키예프까지의 모든 식수원이 오염될 것이라 예상하고, 광부들을 동원해 그것을 막으려 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지하의 불순물이 계속해서 노심에 섞여 핵분열을 중단시켰고, 덕분에 노심이 지하수까지 도달하지 않은 것.
실제로 당시 지휘부도 최악의 결과가 일어날 확률이 약 50%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작업을 강행했다.
때문에 이를 보고 광부들의 희생을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결과론적인 해석임에도 씁쓸한 결과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석관의 완성
체르노빌 원전을 완전히 뒤덮을 석관의 부품은 소련 각지에서 제작되어 운반되었고, 이 부품은 현장에 투입된 인원들이 조립했다.
현장에서 모든 것을 다 하지 않은 이유는 발전소 주변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었고, 이런 곳에서 오래 작업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
조립은 1986년 10월에 완료되었으며, 현장의 소련군은 방사능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다.
이후
이것은 단지 첫 번째 전투의 종결일 뿐이었으며, 그 후에도 사후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석관 위에 다시 더 큰 석관을 씌우는 프로젝트 역시 진행되고 있고, 우크라이나 단독으로는 도저히 무리라 각국의 모금을 걷어 2016년에 진행하였다.
새로운 석관 건설 현장.
완성된 석관을 옮기는 영상.
새로운 석관이 완성된 후, 핵연료를 끌어내 폐기할 때까지 위협은 계속될 것이다.
1991년에 이 메달과 인증서를 저 생지옥에서 고생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으며, 그 사람들이 받은 이 훈장을 그들의 자식들이나 홀로 살아남은 배우자들이 팔고 다녔다고 한다.
메달을 나눠주었을 때가 소련 해체 직전이었는데, 그 직후부터 소련과 구 소련권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큰 혼란에 처해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빈곤에 빠지고 복지혜택 같은 것도 별볼일 없어졌기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안정적인 삶을 누릴 환경이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은 명예로운 메달이 되어야 했을 텐데, 혼란 때문에 값어치가 떨어져서 말 그대로 떨이 수준의 값어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21세기에도 저 메달들을 이베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메달 단품의 가격은 약 4~9달러 정도. 목숨을 걸고 한 일에 비하면 기가 찰 가격이다.
가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인증서가 세트로 구성된 상품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 창고에 있던 미수여 메달이 경매로 올라오는 것으로 추측된다.
물량이 많은지 한국에도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보이며 당근마켓에서 거래되기도 한다.
책임자들의 처리
문제의 실험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사고 당일 즉사하거나 극심한 피폭으로 며칠에서 몇 주 사이에 사망했으며, 발전소 직원들 상당수도 그 뒤를 따랐다.
반면 발전소장 빅토르 브류하노프(Виктор Брюханов)와 실험책임자 아나톨리 댜틀로프(Анатолий Дятлов)는 살아났으며 소련 정부는 이 둘에게 책임을 떠넘기게 되었다.
중대한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를 적용, 형사고소를 통해 10년의 징역형을 내린 것. 그리고 현장 직원들도 도마에 올랐지만 조사 결과 그들은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것으로 밝혀졌으며, 사후에 용기 칭호가 수여된 사람도 있다.
사고는 너무 컸지만 책임자들이 의도적으로 사고를 친 것이 아니었고, 당시 소련 형법상 업무상 과실치사죄에 해당하여 최대 형량으로 판결 내린 것이 10년형이었다.
브류하노프와 댜틀로프는 모두 형기를 채우지도 않고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애초에 핵심 책임자였고 사고 당시 최근방에 있었기 때문에 댜틀로프 역시 평생 방사능 때문에 고생했고, 사고가 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1995년 결국 세상을 떠남에 따라 체르노빌 사고 후유증 사망자 명단에 올랐다.
반면 브류하노프는 멀쩡히 살아 2011년 4월 28일, 체르노빌 발전소장이었던 빅토르 브류하노프가 기자와 인터뷰까지 했다.
원문Bing 번역 아직도 살아있다니 사고 당시 피폭량이 250rem(2.5Sv)이었기에 살아남은 것 같다.
어쨌든 둘 다 자신들이 그토록 믿었던 3.6 뢴트겐보다 압도적인 피폭을 당하긴 했다.
BBC 다큐멘터리에서
BBC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Surviving disaster - Chernobyl Nuclear disaster>에선 소련 당국의 공식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들의 '악행'을 스크린에 담았는데, "안전장치를 끄고 실험하면 위험하다"는 기술자들의 주장을 묵살하면서 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가 일어났는데도 방사선 수치가 높지 않다고 상부에 허위보고를 한다.
이때 사용된 소형 계측기의 최대값이 3.6 뢴트겐인데, 레가소프의 지적이후 대형계측장비를 갖고 와서 측정한 결과는 15,000 뢴트겐을 초과했다.
이런 엄청난 수치의 방사선이 뿜어져 나오는 곳에 사람을 데려다 두면 2~3분이면 바로 치사량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EBS에서 <대재앙 -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라는 제목으로 더빙 방영되었다.
이 다큐에서 댜틀로프의 3.6 뢴트겐 이라는 엉터리보고를 받은 브류하노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3.6이면 뭐 별거 아니구만" 하며 허허 웃는데, 더빙한 한국 성우들의 연기가 초월번역 수준이라 보면 살인충동이 날 정도다.
나중에 사태가 심각해지고 발레리 레가소프의 추궁에 "난 이번 년도에 훈장을 받기로 되어 있었네... 이 사고로 인해 그걸 날려버릴까 두려웠다." 라고 말하며 결국 자기 안위만 생각하다가 그나마 피해를 덜 볼 수 있게 해결할 수 있던 걸 돌이킬 수 없게 크게 키운 셈. 레가소프는 그 말을 듣고 "소장님은 용서받을 수 없어요" 하고 치를 떤다.
실제 모습을 보면 브류하노프가 장신 거구에다 윤곽이 뚜렷한 인상이고 댜틀로프는 마른 체구에 여우상인데, 다큐상의 배우는 브류하노프가 오히려 인자해보이는 배우이고 댜틀로프 역은 뚱뚱한 체구의 배우가 맡았다.
피해
인명피해
올렉산드르 페드로비치 아키모프(우크라이나어) / 알렉산드르 표트르비치 아키모프(러시아어) 선임 연구원으로, 동료인 레오니트 톱투노프와 함께 제어장치에 달라붙어 마지막까지 폭발을 막으려고 시도하다 피폭당했으며, 사고 직후 14명의 소방관들을 지휘하여 화재 진압을 시도했다.
이후 톱투노프와 함께 원자로 근처의 냉각수 밸브가 있는 곳으로 가서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해 밸브를 작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터진 원자로에 냉각수를 투입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고, 결국 톱투노프와 함께 추가적으로 피폭되며 쓰러진 채 소방관들에게 발견되었다.
이후 아키모프는 톱투노프와 함께 병원에 실려간 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범인으로 손가락질당하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아키모프는 15시버트 이상의 방사선에 피폭되었기에 급성 방사선 증후군으로 인해 사망했다.
쌍둥이 동생으로부터 골수 이식을 받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죽기 이전 말을 할 수 있을 때, “난 모든 걸 올바르게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라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고 한다.
사후 용기 칭호가 수여되었다.
발레리 일리치 호뎀추크,
순환펌프 기사. 이 사고의 첫 번째 사망자이다.
사고 당시 아나톨리 댜틀로프의 지시에 의해 메인 순환펌프 엔진실의 맨 끝에서 순환펌프를 작동하고 있다가 펌프가 심하게 흔들리며 증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하는 상황을 목격했고, 아키모프에게 보고하려고 하려는 순간 원자로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이 그를 덮쳤으며, 그는 곧바로 붕괴된 발전소의 잔해에 매몰되었다.
호뎀추크는 폭발로 인해 즉사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폭발한 원자로와 너무 가까운데다가 폭발이 메인 순환펌프룸을 붕괴시켰기 때문에 현재도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탓에 모스크바에 있는 그의 무덤은 시신이 없는 가묘이며, 원자로 3호기와 4호기 사이의 공간에는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는 위령비가 만들어져 있고, 매년 유족들이 추모하기 위해 방문한다고 한다.
발레리 페레보스첸코
제어봉이 노심에 삽입되지 않자 알렉산드르 쿠드럅체프, 빅토르 프로스쿠랴코프와 함께 수동으로 제어봉을 집어넣다 피폭당했다.
사고 이후 그는 친구인 호뎀추크를 비롯한 동료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6주 후에 숨졌다.
이반 오를로프,
원자로 제어를 시도하다 피폭되어 사망.
바실리 이바노비치 이그나텐코
사고 직후 투입된 14명의 소방관 중 한 사람. 계급은 중사. 발전소 지붕과 원자로에서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노출된 원자로의 노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소방관 중 한 명이었다.
14시버트 이상의 치명적인 방사선에 피폭된 그는 곧 매우 심각한 급성 방사선 증후군(ARS)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프리피야트 병원에 잠시 머무르다 모스크바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2주뒤인 1986년 5월 14일에 ARS 합병증으로 숨졌다.
그의 아내 루드밀라 이그나텐코는 체르노빌 사고 이후 딸 나타샤를 출산했으며 나타샤는 태어난 지 4시간 만에 사망했다.
링크에 따르면, 피폭 후 입원한 이그나텐코를 만나기 위해 당시 임신 중이어서 문병이 불가능했던 아내 루드밀라가 "이미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 둘이 있어 괜찮다"고 거짓말을 하여 허가받아 입실하였고, 남편이 죽는 그 날까지 병실에 함께 있었다.
이때 "남편과의 신체적 접촉(키스나 포옹 등)을 금하라"는 지시를 무시하여 루드밀라도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피폭되었고, 태중의 딸 나타샤는 더욱 더 영향을 크게 받아 선천성 심장기형과 간경변으로 인해 태어난 후 4일 만에 사망.
그러나 루드밀라 역시 피폭에 무사할 수는 없어서, 2년 뒤 급성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겨우 목숨을 구했다.
류드밀라의 회고에 의하면 움직이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한움큼씩 빠지고, 피부는 갈수록 벗겨지고, 입안에서 간 조직과 폐의 조각을 계속 토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됐느냐면, 고선량의 방사능 피폭을 당한 뒤 염색체가 완전히 파괴돼서 더 이상 몸에서 세포분열과 새로운 세포를 만드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 문서를 참조해 보면 알 수 있다.
2019년 12월에 BBC에서 아직 생존중인 루드밀라와 이에 대해 인터뷰하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샤셰노프
자동 시스템 엔지니어로 사고 당시 604호실에 있었다고 한다.
604호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그는 폭발에 의해 고온의 냉각수와 증기를 뒤집어썼으며, 쓰러진 기둥에 깔려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졌다.
발견된 후 프리피야트 병원에 후송되어 즉시 치료를 받았으나, 척수파열, 전신화상 및 부상으로 인해 사고 당일인 1986년 4월 26일 5시 또는 6시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의사에 의하면 그는 의식을 회복한 후 "원자로에서 멀리 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4월 29일 체르노빌 근처 Czystogłówka마을의 공동 묘지에 묻혔다가 1년 후 꺼내져서 동료 29명과 함께 모스크바의 공동묘지에 재매장되었다.
발레리 호뎀추크와 함께 폭발로 인한 초기 사망자 중 한 명이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지만, 올레크 겐리흐처럼 폭발로 수증기를 뒤집어쓰고도 살아남은 사람도 있다.
다만 올레크 겐리흐는 예외적인 경우고, 부상에 의해 2명, 방사선 피폭에 의해 29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투입된 인원 중에 이 중 25,0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쪽은 정말 방사선 때문에 사망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아서 비공식 집계로 남아있다.
당시 피폭 인원이 제대로 집계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피해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애매한 저수준으로 피폭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소련 정부는 제한된 사람들(주로 공산당원 위주)만 치료해주며 아전인수격으로 데이터를 해석했다.
냉전 시기의 소련은 사고 피해를 줄이고 자료를 숨기기만 했다.
그러니 소련에서 내주는 자료만 가지고 사고 경위나 피해를 말 그대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축소에 대한 서구권의 추측은 부풀리기를 하는 모양새가 될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자연사한 사람이나 살아있는 사람마저 죽었다고 카운트)
이 대형사고로 인해 지금까지도 이 발전소 주변 지역이 몽땅 출입금지 지역으로 묶여 있다.
스리마일에 이은 체르노빌 사고로 원자력 발전소는 대표적인 기피시설물이 되었다.
또한 디스커버리 다큐멘터리에서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사고 당시 프리피야트는 물론 키예프도 정상치보다 수천 배는 더 높은 방사능 오염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나 당국은 다가오는 5월 축제(5월 1일 국제 노동절)를 준비하기 위해 이 사실을 숨겼다.
체르노빌 사고로 현장지휘를 맡았던 발레리 레가소프 역시 높으신 분들에 의한 강압과 정치적인 힘에 눌려 UN 사고청문회에서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소련 정부에서 날조한 거짓 결과 보고서를 발표한다.
이후 전세계 인류와 사고로 인해 죽은 자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이후 자살한다.
이때 원자력 사고 수습 과정에서 레가소프도 피폭의 영향으로 해가 갈수록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곧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상황과 과학자로서의 양심, 죄책감에 죽기 직전에 모든 걸 폭로하는 음성과 자료를 낱낱이 공개하고 바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각 단체마다 사망 입증과 집계 방식, 그리고 기준이 천차만별이라 정확한 피해 수치의 통계는 알 수 없다.
본 문서의 서술에서는 핵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 의사회의 2011년 보고서에 따른 83만명의 근로자를 피폭자 기준으로 한다.
83만명이 아닌 다른 기준을 쓰기도 한다. 연간 평균적으로 130~170밀리시버트의 방사능에 계속해서 피폭되었던, 작업 초기인 1986년에서 1987년 사이에 누출 방지와 누출 방사능 처리 작업에 투입된 해체작업자들 22만 6천 명을 기준으로 보기도 한다.(EXPOSURES AND EFFECTS OF THE CHERNOBYL ACCIDENT, 526쪽)
한편 북유럽에서는 이 사건으로 인해 10만 건 이상에 달하는 낙태 수술이 행해졌다.
그래도 조사를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어서 2012년 11월 8일, 미국에서 사고 현장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에 대한 추적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자세한 건 관련 소식 문단을 참고하면 된다.
다행인 건 지하 콘크리트층이 뚫리는 수준의 멜트스루는 피했다는 것이다. 만약 여기까지 갔더라면 지하수가 오염되어 희생자 수는 수십 곱절이나 늘었을 것이다.
한편 위에 언급한 알렉산드르 아키모프 등 피폭 희생자들은 죽은 뒤에도 그리 편하지 못하게 되었다.
심하게 피폭된 관계로 그들의 시신 역시 심각한 수준의 '방사성 폐기물'이 되었기 때문에 납으로 된 관에 안장한 뒤 용접하고 콘크리트로 구덩이를 채우는 형태로 매장해야 했다.
주변 지역의 피해
체르노빌과 프리피야트는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유령도시가 되었으며, 주변 마을들도 모조리 비워졌다.
이때 수많은 땅에도 방사능이 검출되었는데, 향후 바람을 타고 번질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아예 트랙터를 사용하여 땅을 갈아엎고 밑에 있는 오염되지 않은 흙을 퍼올려 덮어버렸다.
주변의 숲들도 똑같은 이유로 갈아엎으려고 했으나 시간과 인력이 너무 많이 소모된다는 이유로 그냥 출입금지구역으로만 지정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붉은 숲이다.
원전에서 18km 떨어진 체르노빌 시는 오랫동안 유령도시가 되었다가, 2003년 체르노빌 복구 및 개발 프로그램(Chernobyl Recovery and Development Programme)이 시작되면서 관련자들이 들어와 거주하고 있다.
원전과 프리피야트 관람도 여기서 출발. 그러나 전성기에 비하면 꽤나 적은 숫자로, 일부 건물을 제외한 도시의 거의 모든 건물이 빈 상태라서 유령도시에 가까운 상태다.
주변 국가의 피해
1986년 사고 당시 피해 예상지역
주변 국가들도 무지하게 피해를 봤다.
일단 벨라루스(벨로루시)에서는 소아 갑상선암 발생률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특히 하필이면 바람이 북쪽으로 불고 있었던 탓에 벨라루스에는 이 사고의 낙진의 80% 가량이 떨어져 지금도 벨라루스 국토의 33%씩이나 되는 곳(한국의 절반이 넘는 면적)이 방사능 오염으로 출입금지 구역이다.
2019년 현재도 국토의 22%는 오염지역으로 남아있으며 벨라루스의 국토개발 계획에 심각한 장애로 남아있다.
이 빈땅을 루카셴카 정부는 낙농업 중점지역으로 만들 미친계획을 추진했지만 2016년에도 이 지역에서 동위원소 스트론튬-90이 벨라루스 농업부가 정한 안전 기준치인 ㎏당 3.7 베크렐의 10배가 넘는 수치로 확인되었다.
낙후된 벨라루스의 경제사정 탓인지 관련 연구자들은 벨라루스가 국민들을 방사능 발암물질로부터 국민들을 지키는데 실패했다고 성토하고 있다.
영국이나 스웨덴 같은 유럽의 반대쪽에서도 토양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었다.
특히 영국의 일부 지역은 이때의 사고로 방사능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출입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곳도 있다.
이탈리아산 파스타에서 방사능 물질이 검출되어 일본에서 수입이 금지당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 역시 이 사고의 영향으로 현재 2, 30대 중에 갑상선암 발병 비율이 높아졌다는 주장이 있다.
<당신의 갑상선암은 체르노빌 탓인가> 이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에는 방사능량이 미미했으며, 갑상선암의 발생율 증가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건강에 대한 관심과 검진율의 증가가 원인이라는 반론이 있다.
<녹색연합 최초 문제제기에 대한 반론> 그러나 아주 영향이 없던것은 아니었던것은 아니었고 이 당시에 방사능에 대한 규제조치가 약했기 때문에 남양유업과 한국야쿠르트를 비롯한 여러 식료품 회사에서 방사능 과다검출로 폐기처분될뻔한 유럽 여러 나라들의 폐기 농산물, 유제품을 수입해서 분유, 커피프림, 라면, 사료 등으로 가공해서 팔았던것은 사실이다.
이 문제는 1980년대 말에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우지 파동이나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처럼 공론화되지는 못하고 그냥 묻혔다.
이 사건 이후 유럽 여러 나라의 야생동물의 뼈와 뿔에서도 방사능이 검출됐다. 독일 같은 경우 방사능에 오염된 사슴이나 멧돼지를 잡을 경우 정부에서 돈을 주고 회수할 정도였는데, 특히 사슴의 경우 한약재로 인기가 높은 녹용에 방사능이 쌓이기 때문이다.
서방 세계, 특히 서유럽 지역에서도 체르노빌 사고가 너무도 큰 피해였기 때문에 자국 내 원전 반대여론과 집단 패닉 사태를 우려하여 사건에 대한 진상을 감추었다. 체르노빌 사건 관련 자료는 당시 즉각적으로 발표되지 않고 어둠 속에 묻혔으며, 2000년대 들어서야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었다.
동식물들의 피해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소개령이 내려질 때, 시민들은 키우던 동물들을 데려갈 수 없었기 때문에 두고 갔다.
이후 오염지역을 격리하는 과정에서 구역 내에 살아 움직이는 동물들에게는 전부 살처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중 살처분을 피한 동물들도 있었고, 현재 체르노빌 지역은 몇십 년간 인간의 손이 닿지 않고 보존된 덕분에 야생동물의 천국이 되었다.
방사능 물질이 어느 정도 줄어들자 동물들이 돌아와, 현재는 유럽의 희귀동물들이 여기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4m가 넘는 메기나 초거대 지렁이/쥐 사진이 떠돌면서 체르노빌 사고로 인해 방사능으로 등장한 돌연변이라고 나오고 있지만 루머에 불과하다.
4m가 넘는 메기는 웰스메기라는 종으로, 원어종 자체가 3m는 자라며 사람의 출입이 통제되면서 자연 상태로 무럭무럭(?) 자란 것에 불과하다.
River Monsters에서는 방사능으로 인해 오히려 크기가 줄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
초거대 지렁이는 '자이언트 지렁이'라는 녀석으로, 남미/호주에 서식하는 종. 이 또한 원래 기본 1m에 최대 3m까지 자란다.
마지막으로 거대쥐는 중국 모 대학생의 제작품이라고 한다.
물론 실제로 방사능으로 인해 체르노빌 주변에서 서식하는 기형동물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하나의 몸통에 머리통이 여러 개가 달린 개구리나, 중심 자체가 둘둘 말린 해바라기나, 꽃 한가운데를 뚫고 다시 올라온 꽃대와 꽃 같은 기형 생물들이 발견되었다.
소련에서는 사고 후에 어떻게든 발전소 간판만은 내리고 싶었지만, 이미 간판이며 뭐며 전부 방사성 물질에 절어버린 뒤라서 건드릴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복구작업 때 쓰던 장비들도 방사능 폐기물로 버려져 있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조국을 수호했던 ISU-152와 같은 중자주포 는 물론이요,
세계 최대 헬리콥터 Mi-26도 전작인 Mi-6와 함께 투입되었으며, Mi-6는 대부분 폐기처리. Mi-26은 수리 및 복구작업을 통해 재생했다고 한다.
거기다 바로 옆에는 소련에 2대밖에 없다는 초지평선 레이더, 일명 "러시아 딱따구리" 듀가-1이 위치한 비밀 기지도 있었는데, 이 사고로 버려졌다.#지도와 사진 보기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투입된 비용이 거의 국가 예산 전체 규모에 맞먹었던 것으로 구 소련의 붕괴를 불러일으킨 결정적 요인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가뜩이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들인 비용에 미국과의 군비 경쟁으로 인해 소련의 재정지출이 크게 늘어났고, 전전임자 유리 안드로포프의 경제 개혁은 단기 처방으로 끝난 상황. 더군다나 사우디와 영미권 업체간의 치킨게임으로 인해 석유값이 폭락한 데다가, 쓰는 돈은 그대로인데 걷어들일 돈은 크게 준 상태에서 체르노빌 사고가 터져 수습하는 데 드는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든 바람에 소련 경제가 회생불능의 상태가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거기다 위에서 언급됐듯이 아직도 많은 지역이 방사능에 덮여 있고, 50만 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한 것과 그 인력들 대부분과 인근 지역에 살았던 이들 대부분이 방사능에 피폭되었으므로 건강한 삶을 살았을 리는 만무하다.
또한 정화작업에 투입한 자원과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 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과장이 있다고는 해도, 소련 같은 대국조차 부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비용이 들었다. 실험 책임자 한 사람의 나태함이 전 인류에게 벗기 힘든 큰 굴레를 안겨줘버린 셈이다.
이렇게 원자력 발전소 폭발로 인한 대규모 피해와 이를 수습하는 데 혼선을 겪었고, 이후로도 다른 희생양을 찾아 죄를 뒤집어씌우는 소련 당국의 태도는 소련과 공산주의 정치 체제의 실패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나마 소련 당국이 비난 이후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정보 공개를 허용한 것이 이 사건이 부른 몇 안 되는 진보다. 참고
이 때 입은 인적, 물적 피해는 1980년대 유가 폭락, 미국의 SDI 계획에 따른 군비경쟁과 함께 소련 붕괴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힌다.
사고 이후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환경에 미친 영향과 복구에 대한 보고서를 IAEA가 내놓았다.
다운로드는 여기에서 할 수 있다.
1, 2, 3호 원자로 가동
아직도 발전소 잔해 안에는 사고 당시 즉사한 발전소 직원 발레리 호뎀추크(메인 순환펌프 기사)의 시신이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전기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1, 2, 3호 원자로를 계속 가동했다.
덤으로 옆에 2기의 동형 원자로를 건설하다가 1988년에 취소했다.
물론 일대가 쑥대밭이 되어 주민이 모두 피신한 상황이지만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다.
결국 1991년에 2호 원자로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우크라이나 정부는 손상이 너무 심하다며 2호 원자로를 폐쇄했다.
1호 원자로 역시 문 닫으라는 세계 각국의 압력으로 인해 1996년 11월에 폐쇄되었고 2000년 11월에 3호로도 정지됨으로서 모든 원자로가 멈추게 되었다.
그러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자체가 현재진행형의 문제인 관계로 지금도 일정 인력이 상주하며 지속적인 관리 하에 있다.
관광명소
현재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지역에는 타지인, 심지어 외국인도 출입할 수 없다.
단, 우크라이나에서 인정받은 한 관광 업체의 관광 프로그램을 통해 출입할 수 있다.
바로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기 1개월 전에 사전 예약을 하고 그조차도 심사와 신원조회를 거쳐야 하며, 정신병력이 있거나 범죄전력이 있는 사람은 제한된다.
심지어 만약 이 지역의 방사능에 오염되어 사망한다 해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써야 출입할 수 있다.
2009년 10월 15일 EBS에서 방영한 '세계테마기행'에서 실제로 들어갔다 나왔다.
또 공돌이 용달도 들어가서 영상도 찍었다. 영상
공인된 우크라이나 출신의 가이드가 반드시 1명은 따라다니며, 다른 곳은 위험하기 때문에 지정된 곳, 즉 주로 아스팔트 도로로만 갈 수 있다.
방사능 물질이 비에 의해 쉽게 쓸려나가고 우크라이나에서 관광객들을 위해 비가 오지 않을 때는 하루에 2번씩 도로의 물청소를 진행하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는 도로 근처가 안전하다.
그래서 도로만 다닐 수 있고, 방사선 탐지 장비인 가이거 카운터를 가지고 다닌다.
입구에서 조금만 들어가도 정상치의 10배를 넘는 방사능이 존재한다.
만약 카운터에서 방사능의 양이 많이 검출될 경우, 집으로 귀가하기 전에 여기 들어왔을 때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 소각해야 한다.
따라서 방문 시 여벌의 옷과 신발은 필수로 준비해야 하고, 절대로 비싼 명품 옷을 입으면 안 된다.
2011년부터는 관광객들에게 본격적으로 개방할 생각인 것 같다. 현재는 안전한 관광코스를 찾는 중.
2011년 4월 16일에 방영된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EBS 이후 지상파 최초로 체르노빌에 다녀왔다.
물론 EBS의 세계테마기행보다는 분량이 적으나, 그래도 비교하자면 세계테마기행에서는 붉은 숲 근처 도로에서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않으려는 가이드가 나왔지만 2580에서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근처 도로에서 풀숲으로 한참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탑기어 UK 21시즌 3화 방영분 중에서 출연진들에게 연비 좋은 경차에 기름을 23리터만 넣어준 뒤 100마일(약 160km)을 가라고 했다.
출연진들은 당연히 가능한 거라며 진짜 도전은 따로 있을 거라느니 말했는데, 도착지가 체르노빌이었다.
출연진들은 문을 열고 다니고, 엔진 제어장치를 해제하고, 지그재그 주행을 하는 등 어떻게든 연료를 많이 써서 체르노빌에 가기 전에 차를 멈추게 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리처드 해먼드는 성공했지만, 제레미 클락슨[82]과 제임스 메이는 실패해서 차에 가이거 계수기를 달고 체르노빌 안으로 들어갔다.
특히 제레미는 체르노빌 안에서 입구로 돌아가던 중에 차가 멈춰서 걸어서 나와야 했다고 한다.
또한 해당 필름을 촬영한 카메라맨들에 대해 엔딩 크레딧에서 'Extra Brave Film Cameras'라고 지칭하며 3명의 이름에 효과를 주었다.
2013~2014년 경부터는 체르노빌 관광이 매우 자유로워져서, 사실상 돈만 충분한 성인이면 누구나 관광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지정한 여러 여행사의 투어 프로그램은 2주 전까지 신청할 수 있고, 신상에 심각한 문제가 없는 한 출입 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2016년 11월 29일에 새로운 석관인 NSC(New Safe Confinement)가 완공되어 폭발한 원자력 발전소 본 건물은 볼 수 없게 되었다.
2019년에는 건물들이 낡아 붕괴 위험이 커져서 출입이 제한되는 구역이 늘고 있다.
여전히 안에 남아있는 위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아직 확실하게 안전을 확보한 게 아니다.
석관 밑에 봉인되어 있을 뿐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고 당시 기술진이 목표로 한 것은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피해의 확산을 막는 것이었다.
그 당시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당시 복구반의 노력으로 30년이란 시간을 번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그 시간은 지났고, 체르노빌을 덮었던 석관의 수명도 슬슬 끝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발전소 밑바닥이 문제인데, 워낙 악조건이었기에 원래 설치하려던 액체 질소 냉각기를 설치하지 못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오늘날 또 다시 지하수로의 누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당시 체르노빌 뒷수습은 일단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는 것이 급하므로, 완전한 해결책은 나중에 나오리라 보고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식이었다.
그런데 냉전이 끝나고 동구권 경제가 붕괴하면서 어영부영하는 사이 내구연한이 다가온 것이다.
우선 우크라이나 정부는 새로운 석관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급조한 콘크리트 석관이 수명을 다했기 때문인데, 새로운 석관은 자유의 여신상이 그대로 들어갈 만큼 높이가 크다.
2016년 11월 14일(현지시간), 'New Safe Confinement'라는 이름이 붙은 이 석관이 드디어 완성되어 원자로 4호기의 봉인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상
새 차폐막이 원자로 건물을 밀봉한 뒤에는 내부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하지만 사고 발생 후 3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확실한 해결 방법은 나오지 않고 있다.
원자로 처리 방안
현재 기술자들이 지금도 방사선을 내뿜고 있는 원자로를 제거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기술자들끼리의 논의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 아직 남아 있는 플루토늄 등의 방사능 물질들을 어디에 버리느냐"는 것이다.
저 멀리 우주에 내다 버리는 방법도 신중히 논의는 되고 있지만, 논의만 되고 있을 뿐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고 있다.
우주에 버린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좋지만, 문제는 로켓으로 쏘아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로켓이 고장나서 대기권 돌파도 하기 전에 공중 폭발이라도 한다면 타국에 극도로 치명적인 방사능 ICBM을 떨구는 꼴이 된다,
더군다나 대량 수송이 가능한 우주 발사체가 대부분 퇴역했기 때문에 소유즈 같은 걸로는 택도 없다.
더욱이 우크라이나와 가까운 곳에서 로켓을 쏠 만한 장소는 바이코누르, 플레세츠크,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인데, 이 곳은 입지가 카자흐스탄 영내, 북극해, 중국 국경과 시베리아 횡단철도 근처라는 환장상적인 위치선정을 자랑한다.
즉, 이걸 쏴줄 만한 발사장도 없다.
또 로켓을 발사하는 것이기에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간다.
이외에도 국제법상 제약도 있는 등 이렇다 할 해답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2065년까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를 해체하고 정화 작업을 완료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바로가 우크라이나 비상사태부 장관에 따르면 (해체) 작업에는 50년이 걸린다고 하며, 비상사태부의 다른 관계자는 "핵연료 꺼내는 데 30년, 해체 작업에 60년이 더 걸린다."고 예상했다.
4호기의 핵연료 외에도 노후화된 사용후핵연료 냉각수조에 저장된 21,000개(2천 톤)의 폐연료봉도 처리해야 한다.
2015년까지 새 저장시설이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유로마이단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데다,
우크라이나는 동부가 분리독립할 기세라 어떻게 될지 불투명하다.
RBMK
체르노빌 발전소의 원자로에 사용된 원자로는 RBMK(Реактор Большой Мощности Канальный,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였다.
체르노빌 사고가 난 후, 동형 원자로에 대해 대규모 안전 보강 조치가 실시되었다.
- 제어봉 설계 변경
감속재의 길이를 노심 하단까지 닿도록 연장해서, 핵 반응 분포가 고르게 나오도록 변경한 것 - 반응도 여유를 수동 제어봉 30개에서 48개로 증가
- 30개, 이후 80개의 고정 흡수재를 추가하여 기포에 의한 정반응도계수를 조절
- 이로 인한 출력 저하를 만회하기 위해 연료 농축률을 2%에서 2.4%로 증가
- SCRAM(긴급 운전 정지) 절차가 18초에서 12초로 감소
- 긴급 안전 장치에 무단 접근시 경보 발령
2011년 기준으로 동형 원자로 11개가 아직도 운전되고 있으나, 새로 짓는 것은 없다.
왜냐면 RBMK 방식 자체가 1950년대에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이미 설계수명이 다했기 때문.
현재 러시아가 새로 짓는 원자로는 VVER(Водо-водяной энергетический реактор, 물-물 에너지 반응로. 러시아식 가압경수로)방식인데, 이놈도 골 때리는 게 초기 모델에는 RBMK처럼 격납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 딱 1군데 서방의 안전 기준을 맞추는 VVER이 있는데, 바로 핀란드가 건설한 로비사 원자력 발전소. 이 원자력 발전소는 원자로만 소련제였고 나머지 운용설비는 지멘스 등에서 충당했다.
지금도 이 VVER은 정상적으로 운전되고 있다.
현재 러시아의 쿠르스크, 레닌그라드 같은 에너지국영 기업 엿먹이기, 스몰렌스크 발전소에서는 아직도 RBMK 원자로를 발전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시작되는 위험
우크라이나의 원전안전문제연구소 과학자들이 "원자로 내부의 중성자 밀도 증가가 실제로 관찰되고 있다" 라는 발표를 했다. 실험을 통하여 과학적 가설이 입증되었다고 하며 면밀히 모니터 중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원전측에서는 현재 수준은 안정적이다라는 반대 성명을 내었다. 관련 기사 #
관련 소식
마리아 샤라포바의 가족들이 당시 샤라포바를 임신한 상태에서 체르노빌 근교에 살고 있었는데, 이 사고 때문에 소치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샤라포바를 낳았다.
실제로 샤라포바의 친할머니는 이 사고로 피폭당했다.
그래서 샤라포바는 체르노빌 피해자들을 돕는 자선활동을 하고 있다.
2011년 4월에 경향신문이 체르노빌 원전의 기술자 니콜라이 이사예프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때 동료들 가운데서 자신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공포의 붉은 숲과 피해농민 인터뷰도 링크.
2011년에는 우크라이나의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체르노빌 원전 사고 관련자들의 특혜와 연금 등을 줄이고 남는 돈을 빈민 구제에 사용하겠다"고 했다가 전국적인 반대 시위에 직면했다.
2011년 9월 4일에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프랑스를 통과한 방사능 구름은 건강에 아무런 영향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악성 사기죄로 기소된 보건성 방사선 방호 중앙국 국장 피에르 펠런 교수가 면소 판결을 받았다.
국민과 교수 사이에 계약 관계가 성립된 것이 아니므로 사기죄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게 이유라고 한다.
번역기는 여기를 참조. 환경 운동가들과 (방사능 구름 때문에 암에 걸린) 갑상선암 환자들은 이 판결을 강하게 비난했다.
2012년 11월 8일에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수습작업에 참여한 작업원 11만 명을 20년간 추적 조사한 미국 국립암연구소와 대학 연구팀이, "저선량 피폭도 백혈병의 발병율을 높인다"는 연구결과를 미국 학술지에 게재했다.
체르노빌 사고 이전에도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이들 자손들의 유전체 시퀸싱을 돌려서 얼마나 변이되었나 보는 2가지 실험결과가 나왔다.
한쪽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서 131I에 노출된 359명의 아이들과 81명의 나중에 태어난 아이들의 시퀸싱을 돌렸고, 다른 한쪽은 DNMs이라는 한 세대 내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생식세포 돌연변이를 130명의 어린이 (1987 ~ 2002년)와 부모 세대를 모두 시퀸싱 한 결과 과도한 돌연변이가 없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고 등급
이 사고는 전 세계의 원자력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 원자력 사고 척도> 7등급으로 분류되었다.
비교를 위해 5등급 이상의 다른 사고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윈드스케일 사고
5등급의 사고. 한때 서방에서는 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라고 알고 있었다. -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5등급. 인명피해는 없다. - 키시팀 사고
원자력 사고 역사상 유일한 6등급이며, 체르노빌 이전에는 사상 최악의 사고였지만 소련의 수치 국가기밀이었기에 그 실상이 알려진 것은 소련이 망한 이후였다. -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5등급이었다가 7등급이 된 사고이며, 현재진행형이다. 여기에 적힌 사고들 중에서 유일하게 체르노빌과 비견될 수 있는 원자력 사고다. 다만 누출된 방사능의 양과 후폭풍은 역시나 체르노빌 쪽이 압도적.
이동식 발전소 프로젝트
소련은 1990년대에 완성할 목적으로 원자력 발전소 차량을 구상 중이었고, 개발완료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나는 바람에 핵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이동식 원자력 발전소 개발 프로젝트는 전면 백지화되었었으나 부활했고 2020년 즈음부터 배치할 예정이라고 한다.
정치적 영향
미국과 소련 양국의 핵무기 감축 논의에 체르노빌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보다 더 넓은 지역이 더 높은 수치의 방사능 오염지대로 변하면서 핵전쟁 이후 펼쳐질 지옥에 대해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며 핵무기 감축을 주장하는 세력이 정치계에서 큰 힘을 차지하게 되어 핵무기 감축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물론 핵무기 감축을 통한 비용 절감 등의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그리고 덤으로 소련까지 무너졌으니 미국은 좋다
더불어 이 사고는 소련에 엄청난 재정지출을 강요하여, 안 그래도 석유 가격 하락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졸전으로 고생하던 소련 경제에 일격을 날렸고 소련이 붕괴하는 데 기여하였다.
작품들
다큐멘터리
1. 사상 최악의 참사 (2004) - 내셔널 지오그래픽
2004년 사상 최악의 참사 시즌 1의 7화로 다루어졌다. 약 1시간 분량.
2. Surviving Disaster (2006) - BBC
2006년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드라마이다.
꽤나 자세히 사건의 경과를 설명하고 있으며, 발레리 레가소프의 시점에서 사건을 돌아본다.
해외에서는 2019년작 HBO 드라마 체르노빌과 구별하기 위하여 BBC판 체르노빌 이라고 부른다.
국내에서는 EBS 다큐 10에서 더빙 방송하였으며, 위의 영상이 당시 EBS 더빙판이다..
3. The Battle of Chernobyl (2006) - Discovery
2006년 디스커버리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로 한글자막이며 총 90분 분량이다.
다른 다큐에 비해 비교적 분량이 길어 자세하게 내용이 나온다.
이후 2016년 디스커버리에서 비슷한 분량의 다른 다큐도 제작되었으나 해당 다큐는 자막이 없다.
대중매체
다크우드
스토커 시리즈
아토믹 러너 체르노브
1988년 1월 데이터 이스트에서 제작한 오락실(아케이드용) 게임으로 주인공이 해당 원전사고로 피폭된 광부라고 한다.
에어울프
1987년 미국에서 방영된 TV시리즈 에어울프 시즌 4에서 9~10화 '스타보그라드 핵발전소'(Stavograd) 상•하편은 체르노빌 사고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이다.
작중 소련이라는 국명은 나오지 않으나 가상 지명이 스타보그라드로 누가 봐도 소련이다.
외부의 개입을 꺼리고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며 큰소리치는 소련 군부와 관료들을 간신히 설득한 후, 방사능이 아무리 뿜어져 나와도 끄떡없는 천하무적 에어울프가 폭발한 원전에 접근하여 공대지미사일을 발사해 사태를 수습하는 데 성공한다.
종말론자 중 요한묵시록의 내용을 추종하는 종말론자들이 좋아하는 떡밥 중 하나다.
요한묵시록의 중 8장에 '큰 별 하나가 강과 샘물에 떨어졌다.
그 별의 이름은 쑥으로 물을 쓰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러시아어에서 체르노빌(Чернобыль)의 원래 뜻은 검은 쑥(Black mugwort)이다.
그 지역에서 쑥이 많이 나와서 붙여진 이름. 우크라이나어 체르노빌(Чорнобиль)과 비교.
콜 오브 듀티 4: 모던 워페어
'위장 완료' 미션에서 잠시 언급되는데, 맥밀란 대위가 프라이스 소위와 함께 프리피야트에서 핵연료봉을 거래하려는 이므란 자카에프를 저격하러 가는 도중 공설중앙체육관을 통과하면서 "5만 명이 이 도시에서 살았었지...
지금은 유령 도시야."(50,000 People used to live in this city... Now it's a ghost town.)라고 말한다.
이때 창가 쪽을 보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보인다.
미션을 시작할 때도 보인다.
체르노빌 다이어리
1980년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상황이 유사해서 본작품이 시대를 앞서갔다고 재평가되었다.
아니, 오히려 본작의 부해보다 더 끔찍한 모습이 나온다.
체르노빌라이트
체르노빌(2019)
2019년 5월 HBO에서 방영했던 미드. 체르노빌 사건의 그날을 되짚어보는 작품으로 여러 면에서 찬사를 받고 있다. 예고편 영상(한글 자막)
PLAYERUNKNOWN'S BATTLEGROUNDS
에란겔 맵에서 나오는 밀타 파워 지역이 여기를 모티브로 두고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안 그래도 둘 다 소련이었던 지역이고 구조가 비슷하다.
심지어 폭파 지역도 비슷한 것으로 보아 에란겔 역시 체르노빌과 같은 처지인 듯 하다.
그 외에도 펍지 주식회사는 학교와 수영장 지역을 실제로 프리피야트의 사진들을 참고하고 미리 만들어진 프리피야트 건물 모델들을 사용하였다고 밝혔다.
여담으로 에란겔은 어떠한 실험 중 사고로 모두 대피해야 해서 버려진 지역이라는데, 이 밀타 파워 지역의 폭발이 이 실험 실패를 뜻하는 듯 하다.
결국 체르노빌이랑 같은 처지다.
메탈기어 솔리드 V 더 팬텀 페인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체르노빌 사건과 배경은 다르지만 아프간에 주둔하는 소련군 병사들의 잡담을 훔쳐듣다 보면 '내 사촌이 과학도인데 프리피야트 쪽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에 취직했다더라'는 말이 가끔 나온다.
병사는 "나 같은 돌대가리는 아프간 파병와서 이 고생을 하는데 똑똑한 사촌 녀석이 부럽다!"라고 말한다.
Chernobyl: A Natural History
'INPUT 2011 서울'에서 시사작으로 뽑혔던 2010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이다.
한국에서는 KBS에서 '체르노빌 자연의 역사인가'라는 제목으로 더빙 방송된 적이 있다.
체르노빌 사고 직후 대피했다가 20여년이 흐른 시점에서 출입금지지역 내로 출퇴근하거나 출입금지지역 내로 귀환하여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습을 통해 체르노빌 사고 이후 변화된 자연환경과 야생동식물의 생태 등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의 체르노빌의 모습을 보여준다.
트랜스포머 시네마틱 유니버스
3편인 '다크 오브 더 문'에서 소련이 아크의 엔진 부품으로 실험을 하다가 대재앙급 방사능 누출 사고가 난걸로 나온다.
체르노빌:원전 대폭발
2013년, 러시아에서 제작한 영화이다.
체르노빌 1986
러시아에서 제작한 2021년 개봉 영화. HBO 드라마 체르노빌(2019) 을 보고 반발한 러시아가 새로운 영상물을 만들겠다고 공표한 적이 있는데, 그것과 연관된 제작물인지는 불명. 개봉 시기가 의심스럽긴 하다.
사고 첫날 소방관의 화재진압 활동이나 주민 소개, 체르노빌 다이버 등의 이야기를 그렸다.
하지만 티저 예고편에서 부터 실제로는 있지도 않았던 지하 수중 잠수장면 등이 나오는 등 고증에 대한 걱정이 나오고 있다.
HBO 드라마의 고증을 비판하고서 만든 영화지만, 여기서도 고증 문제가 나오고 있다.
Liquidators
상술했던 증기폭발을 막기 위하여 펌프를 가동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안드레이 아나넨코, 발레리 베스파로프, 보리스 바라노프 이 3인의 이야기를 게임으로 만든 작품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저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가 있다.
이게 다 서방의 음모라고 외치며 방사능의 위험을 부정하고 인민을 갈아넣던 당시 소련 정부의 행태와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애절한 목소리들을 담고 있다.
히로세 다카시 저의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있다.
원자력 발전소의 책임자의 가족들이 겪는 일들이 담겨 있으며 방사능의 위험성과 사람들에게 미치는 악영향,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상황과 소련측의 피해자 관리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타
황혼의 투쟁에서도 등장한다.
3Ops의 후기 냉전 미국 이벤트 카드. 미국은 특정 대륙을 하나 지정해 남은 턴 동안 소련이 작전 수행으로 영향력을 배치할 수 없게 한다.
그야말로 소련이 후기 냉전에서 힘을 못 쓰는 원인 중 하나다.
레프트 4 데드 2의 에드온 맵으로도 나와있으며, 제작하는데 7년이 걸린 대작 답게 실제 체르노빌에 온 것 같은 리얼함을 잘 살린 맵이다.
***~^0^~ 잠시다른 youtu.be 영상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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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channel/UCNCZRbUDsmBBKCau3SveIKg
youtu.be/IOzjiVnjFTQ
youtu.be/zc7-qFYKA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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